'인권'대 '반인권'의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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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대 '반인권'의 대결
  • 이창영
  • 승인 1997.1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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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수 기준, 국제사회와 현격한 시각차
김대중 총재의 발언으로 촉발된 정치권의 양심수 논란에 대해 국내 인권·사회단체들의 비난이 잇따르고 있다. 동시에 이번 논쟁을 계기로 양심수 석방과 악법개폐 문제 등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벌어져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3일 민가협, 천주교인권위원회, 민주노총, 전국연합, 경실련, 참여연대, 여성단체연합 등은 각각 성명 또는 논평을 통해 "치졸하고 유치한 논쟁" "구태의연한 여론몰이" "전·노 석방과 정치흥정을 벌이는 작태" "저질 사상시비"라며 정치권을 강도높게 규탄했다.

경실련, 참여연대 등은 "정부와 정치권이 그릇된 기준으로 국민을 호도하고 있다"고 비판했고, 전국연합도 "양심수 문제를 사상시비로 몰고가는 것은 정략을 넘어 국민을 우롱하고 수많은 양심수들을 능멸하는 폭거"라고 비난했다. 민가협은 "21세기를 불과 2년여 남겨두고 있는 지금, 중세의 '마녀사냥'이나 50년대의 냉전구도에서 벌어졌던 매카시선풍을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며 개탄을 금치 않았다.

"공산주의자도 양심수다"
이번 논란에서 보수우익진영은 "공산주의자나 폭력행위자는 절대 양심수일수 없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국제사회의 시각과는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국제앰네스티는 양심수를 "폭력을 사용하거나 주창하지 않은 자(자기방어적 폭력은 제외)"로서 "정치적·종교적·기타 양심상 견지된 신념을 이유로 투옥, 구금, 기타 신체적 제한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최근 사회과학서적을 판매한 이유로 구속된 서점주인들도 앰네스티 기준에 따르면, 엄연한 '양심수'다.

또한, 3일자 한 일간지를 통해 소개된 학·법조계 인사들의 견해 역시 앰네스티의 기준을 강조한다. "국가보안법 위반사범과 노동·집시법 위반사범은 사안에 따라 양심수의 범위에 들어간다."(곽노현 교수) "설사 폭력적 방법을 사용했더라도 국민저항권 차원에서 인정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예를들면 87년 6·10항쟁에서 화염병과 돌을 던진 시위대가 그 경우이다."(한인섭 교수) "설사 공산주의자라고 해도 그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처벌당하지 않는 것이 민주주의 원칙에 맞다."(조용환 변호사)

참여연대 등도 "지금 '양심수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은 군부독재 아래서 공안통치에 앞장섰던 사람들"이라며 현 보수진영의 목소리가 구시대적 냉전논리임을 꼬집었다.

김종필, 이인제도 양심수석방 기원
양심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당국과 보수세력들의 주장에 반해 10월 1일 현재 민가협이 집계한 양심수는 무려 8백59명에 달하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까지 나서 양심수 석방운동을 전개했던 천주교측에선 "이 땅에 양심수가 한 명도 없다면 우리 천주교회가 있지도 않은 일을 우겨대고 있는 것이냐"고 반발하면서, "박노해 시인의 신작출판기념회 때 신한국당 이수성 고문, 자민련 김종필 총재,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 등 여야의 핵심 정치인들이 박 씨의 석방과 건승을 비는 축전을 보낸 바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국제사회의 양심수 구명운동도 정부측 주장을 무색케 한다. 국제앰네스티는 김성만(구미유학생 간첩단), 박노해(사노맹), 황석영(방북), 손유형(재일동포 간첩) 씨 등의 석방운동을 전개중이며, 유엔인권위 산하 '자의적 구금에 관한 실무위원회' 역시 황대권(구미유학생 간첩단), 안재구(구국전위) 씨 등의 석방을 권고한 바 있다. 국제의회연맹(IPU)은 지난 7월 간첩 혐의로 수감중인 서경원 전 국회의원의 석방을 권고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기도 했다.

"인권개혁조치 진지하게 논의하자"
3일 각 단체들은 정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충고와 제안의 말을 던졌다. "반세기 이상 국민을 고통과 분열의 질곡으로 몰아갔던 이른바 비뚤어진 사상의 잣대를 제발 좀 거두기를 바란다."(전국연합) "이번 기회에 양심수 석방을 비롯해 악법개폐문제 등 제반 인권개혁조치를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민가협) 느닷없이 전개되고 있는 양심수 논란 속에서 '인권'과 '반인권'세력간의 첨예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 <성명서> - 진흙탕싸움을 걷어치워라 ******

"공산주의자를 제외한"이라는 조심스러운 단서를 달고 양심수의 개념을 축소한 '양심수 사면론'은 그 소심함에도 불구하고 즉각 치졸하기 짝이없는 인신공격과 색깔시비의 융단폭격을 받았으며, 그 결과 당초의 '양심수 사면론'은 다시 위축되어 비겁하고도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기에 급급하다. 지금 정치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식 이하의 '양심수 논쟁'의 정체는 대통령선거를 앞둔 추악한 진흙탕싸움 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그것은 양심수문제에 대한 국민의 정당한 이해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

우리는 우선 "공산주의자를 제외한 양심수를 사면한다"는 김대중 총재의 발상은 결국 우리의 아픈 과거를 되풀이 하자는 구태의연한 주장에 지나지 않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공안세력이 피의자를 '공산주의자'로 규정하기만 하면 바로 공산주의자가 만들어진 어제의 어두웠던 현실을 우리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또한 김 총재의 발상은 반인권적이다. 한 인간의 내심을 이유로 그에게 불이익을 가할 수 없다는 원칙은 근대 법치국가의 중요한 인권원칙으로서 널리 인식되어 있다. 국제사면위원회가 오랜 세월 눈부신 인권활동 속에서 확립한 '양심수'라는 개념은 바로 이런 법치국가의 인권원칙 위에 세워진 개념인 것이다. 한 정치인이 이런 개념을 함부로 변용·축소시킬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또한 "양심수가 한명도 없다"는 공안기관의 총공세를 눈앞에 보면서 국민과 국제사회를 우롱하는 그 뻔뻔스러움에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수많은 인사들을 잡아들이면서도 "양심수가 한명도 없다"고 강변했던 과거의 공안세력은 인적으로, 그리고 제도적으로 한발짝도 청산되지 않은 채 오늘도 옛모습 그대로 우리 사회의 공안세력으로 남아 있다. 그 공안세력이 "이번에 잡아들인 공안사범들만큼은 진짜로 양심수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들 도대체 누가 그 말을 곧이 듣겠는가?

아울러 우리는 "양심수가 있다면 정치인 사면 등과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는 이회창 총재의 비상식적인 발언을 규탄한다. '양심수'는 구금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든 잘못되어 있는 사람들이며, 그 자체로서 조건없이 석방되어야 할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양심수'는 권력형 인권범죄의 주범인 '정치인'과 동열에 놓고 맞바꿀 수 있는 존재는 아닌 것이다.

정치인들은 양심수들로부터 희망을 앗아가는 추악한 진흙탕싸움을 당장 걷어치워야 한다. 그리하여 정치인들은 이제 우리의 인권수준을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을 약속해야 한다.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 스스로가 받아들인 인권기준을 국내에서 준수할 것을 약속하고 그 인권기준에 맞지 않는 모든 법률을 개폐할 것을 약속해야 한다.

1997년 11월 3일 인권하루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