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없는 시인」박노해의 첫 고백
상태바
「얼굴없는 시인」박노해의 첫 고백
  • 황정유
  • 승인 1990.11.2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동아 12월호에 자전적수기투고
「얼굴없는 시인」 박노해는 누구인가. 「노동의 새벽」을 노래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노동자혁명을 선동하는 글들을 내던져 충격을 안겨준 그의 정체는 아직도 복면뒤에 숨어 있다. 최근 사노맹의 「중앙위원겸 편집책」으로 수배되면서 박기평이라는 본명이 밝혀졌을 뿐. 그 수수께끼의 사나이가 「신동아」 12월호에 3백장 분량의 자전적 고백 「이땅의 자식으로 태어나서」를 투고했다. 복면의 한가닥을 벗고 나선 셈이다. 그의 고백은 「얼굴없는 시인」에게 쏠렸던 궁금증을 풀어주면서,또 다른 한편으로 불행했던 우리사회의 한 단면을 분석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한다. 서정의 시인이 왜,어떤 경로로 혁명론자가 되었는가. 그 물음은 그의 격렬한 논조를 차갑게 비판하면서 동시에 깊이 돼새겨져야 할 물음이다. 여기 「신동아」에 실린 그의 자전적 고백을 발췌해 옮기는 뜻도 거기에 있다.<편집자>

사람들은 나를 「얼굴없는 노동자시인」「얼굴없는 혁명가」로 불러왔다. 나는 왜 「얼굴」이 없는가. 한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사람에게,특히 이 사회의 다수인 노동자계급에게,하나의 전형으로 살아 있는 인물에게 얼굴이 없다는 것은 이 시대의 희극이자 비극이다.

지금까지 나는 엄청난 변신을 거듭해왔다. 한 사람의 평범한 노동자에서 저항하고 투쟁하는 노동운동가로 그리고 「노동의 새벽」을 노래하던 시인에서 선명한 노선을 가진 혁명 시인으로. 그것은 우리 사회가 겪어온 격동의 역사에 내가 그저 순응하고 적응할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1957년 11월20일(음력)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나의 이름은 박기평. 전쟁과 폭력으로 점철된 남한 현대사 속에서 힘없는 민중으로 시달림을 당해온 부모님은 평화의 기틀이 되라고 「기평」이란 이름을 지으셨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 박정묵은 빈농의 가정에서 자라나 일제 때는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목포에서 남로당 활동에 열성이다가 여순반란사건때 주동급으로 빨치산투쟁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여섯살때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빨갱이」라고 성토했다. 오랜 사상적 방황과 모색끝에 나는 고등학교 3학년때에야 비로소 그분의 혁명운동을 용인할 수 있었다. 그날 나는 뗏장조차 무너진 초라한 무덤앞에 담배와 소주를 놓고 눈물로 용서를 빌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뒤 어머니는 행상을 해가며 우리 3남매를 키웠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배가 고팠고 처음으로 국민학교에 입학한 아들인 나에게만 점심을 먹이자는 어머니의 방침에 따라 나는 가족중에서 유일하게 밥 한그릇을 먹을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 그때 내입속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밥 한숟갈을 보며 내 여동생의 눈에 이글거리던 허기의 퍼런 불꽃,내 가슴에 섬뜩하게 남아 있는 그 불꽃을 나는 노동자가 되어 다른 노동자들의 눈에서 다시 볼 수 있었다.

그 절망적인 상황속에서 나에게 뜸직한 아버지가 되어준 것은 나의 형 박기호였다. 나는 그의 진실성과 소박함과 정의로움을 존경한다.

내가 식구들과 주변사람들 모르게 「노동의 새벽」을 발간했을때 형님은 박노해가 자기 동생인줄도 모르고 「가톨릭신학대학보」에 장문의 서평을 게재했다. 형님은 수줍어하며 나에게 자신의 글이 실린 신문을 보여주었다.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서 그 글을 읽어 내려갔다. 그 평론은 참으로 훌륭했고 실천적인 문제제기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 형님은 80년 내가 군에 있을때 사제가 되기로 했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그 편지를 받아보고 그의 필연적인 좌절이 가슴 아프고 함께 혁명운동으로 나서지 못한 그의 한계가 안타까워 슬피 울었다. 여동생이 수녀가 되겠다고 하여 수녀원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와서도 나는 그렇게 슬피 울었다.

한때 역시 신부가 되고자 했던 나는 유물변증법과 역사적 유물론의 철학을 신봉하며 「사회주의혁명」으로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전위투사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국민학교를 졸업한뒤 나는 마을에서 20리 정도 떨어진 벌교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때 어머니는 서울에서 장사를 하고 계셨는데 나는 해마다 여름방학때 여동생과 함께 어머니를 뵈러갔다. 난생 처음 밟아본 서울땅. 그러나 서울은 「꿈의 도시」가 아니라 「잿빛도시」였다. 한눈에 확연히 잡히는 빈부의 격차가 상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어머니가 홍합을 팔고 계시는 창신동 구석길을 찾아갔을 때 나는 남산 팔각정도 가고 동물원도 구경하겠다는 꿈을 버리고 어머니를 도와 리어카를 끌었다. 단속반이 오면 어머니와 함께 리어카를 끌고 도망치고 밤이 되면 창신동 시민아파트 아래 공터(지금은 상수도 가압펌프장)에 쳐진 천막에서 잠을 잤다.

며칠 지나자 나는 어지럼증과 함께 코피를 쏟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어서 빨리 고향으로 내려가라고 성화였다. 몇년만의 재회란 것이 자신의 피붙이들에게 서울구경 하루를 못시키고 함께 단속을 피해 리어카를 끌어야 하고 아들놈은 더위와 과로에 코피를 흘려대니 어미의 심정이 오죽했을 것인가.

엄마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동생을 끌고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나는 다짐을 했다. 작은 환희가 절대적인 죽음 위에 피어나고 있는 땅,거대한 강물처럼 흐르는 슬픔위에 화려한 네온사인처럼 반짝이는 웃음들,백화점앞의 부유한 얼굴들과 천막촌의 시든 미소들…. 아 서울아 기다려라. 내 다시 돌아와 너와 싸우리라. 나는 꼭 정치가가 되어 이 죽음의 도시를 살려내리라.

나는 중학교 3학년때 나와 뜻이 맞는 친구와 정치가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좋은 학교에 진학하여 훌륭한 동지를 규합해야 한다는데 동의하고 작은 절로 올라갔다. 입시공부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곳에 와있던 한 운동권학생을 통해 김지하의 「오적」을 읽고 난뒤 나는 시험공부를 팽개치고 정치학습과 토론에 몰두했다. 막연히 훌륭한 정치가가 되어야 겠다는 부르주아적 정치관도 어느정도 극복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한뒤 나는 서울로 올라와 돈을 벌며 야간학교를 다녔다. 내가 처음으로 잡은 일거리는 국민학생들의 일일학습지를 돌리는 일이었다. 내가 맡은 구역은 남산일대와 퇴계로 명동을 거쳐 서울역과 남대문까지 였다. 그 구역안에는 양동의 창녀촌도 들어 있었다. 음습하고 냄새나는 그곳에서 몸을 팔고 눈물을 팔며 살아가는 수백명의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우리사회의 모순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하루종일 시험지를 돌리고 수업을 받고 나면 몸이 말을 듣지 않았지만 나는 당시 뜻이 통하던 유선배와 매일 저녁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와 나는 신학서적을 찾아 읽다가 해방신학에서 희망을 발견했고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발언을 자주하던 강원용 박형규목사를 찾아갔다. 유선배는 박목사가 이끄는 제일교회의 성가대원이 되었고 나는 다시 김수환 추기경과 함세웅 신부가 인도하는 미사에 참여했다. 이때 나는 정치가의 길과 성직자의 길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화투쟁 소식이나 노동자의 움직임을 접하게 되면 파릇파릇 생기가 도는 나 자신을 알아채고 과감하게 신과 구원의 세계,추상과 관념의 세계를 버리기로 결단을 내렸다. 구체성과 행동의 세계야말로 나의 생명이었다.

고교를 졸업하고 나는 삼원철강에 첫 출근을 했다. 맨처음 공장기숙사에 들어갔을 때 나는 5년이 넘어 때가 번들거리는 벽지를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추석때는 보너스 지급약속을 지키지 않은 회사를 상대로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노동자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버스운전사로 일할때도 나는 조직을 만들어 서로 경쟁하고 시기하는 것이 아니라 돕고 사는 사회의 즐거움을 동료들과 나누었다. 그런중에 동료들의 연애편지를 써주면서 나의 문학도 탄생했다. 「노동의 새벽」이 나온뒤 동료들은 내가 박노해라는 사실을 모른채 나에게 그 책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내 시집이 노동자들에게 미친 영향을 생각하고 기뻐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는 제2시집을 발간하는 것이다. 이 시집은 내용은 물론이고 예술적인 면에서도 전혀 새로운 것이 될 것이다.

일부에서는 나의 작업량이 많아 공동창작이라고들 말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내 이름으로 나가는 모든 창작물은 순전히 개인 창작이다.

나는 특별히 노동운동을 하게 된 계기를 가져본 적이 없다. 일찍이 노동자로서의 삶 자체가 나도 모르게 노동운동을 내 몸속에 스며들게 했다. 나는 어느날 갑자기 출현한 「불순세력」도,북한의 사주를 받은 「첩자」도 아니다. 나는 이 나라의 교육을 받고 이 땅에서 꿈을 품어온 민중의 아들 딸이며 이 사회가 배출한 「이땅의 작품」일 뿐이다.


동아일보 1990-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