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인권「국제적 쟁점」으로/파리 펜대회 서방대표들 문제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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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인권「국제적 쟁점」으로/파리 펜대회 서방대표들 문제제기
  • 황정유
  • 승인 1991.05.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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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작가교류 “인권상황조사” 조건부 통과
"민주화 별진전 없다” 인식… 시위탄압 공격도

한국 인권문제가 국제무대에서 새로운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파리에서 지난 4월26,27일 열렸던 제55차 국제펜클럽대표자대회에서 한국의 인권문제가 거론되는 바람에 한국대표단이 큰 곤욕을 치렀으며,파리의 유력지 르몽드는 시위 도중 경찰에 의해 피살된 명지대생 강경대군 사건과 공해문제 등을 연일 크게 보도하고 있다. 6공 출범 이후 이처럼 인권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국제펜클럽대표자대회는 한국펜클럽(회장 전숙희)이 제안한 남북한 작가교류 촉구결의안을 약 한 시간 동안 인권문제를 거론한 끝에 통과시켰다고 한국대표단이 29일 밝혔다.

한국대표단에 따르면 이 결의안은 표결없이 통과되었으나 『남과 북의 인권상황 및 투옥작가의 현황을 조사해서 오는 11월 빈에서 개최될 국제펜클럽 대회총회에 공식보고한다는 조건이 붙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제펜클럽 인권상황조사단이 서울과 평양에 파견될 것으로 관측되며 북한이 국제펜클럽 비회원국이므로 이 조사단을 받아들일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 관계자가 전했다.

국제펜클럽은 방북 이후 귀국하지 못한 채 베를린에 머물고 있는 황석영씨 문제를 중점적으로 거론하면서 한국이 여행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가 아니라고 비난했다. 한국대표단은 『오는 가을 빈 총회에서는 노동자 시인 박노해씨(본명 박기평) 문제가 거론될 것 같다』고 우려했다.

미국 서독(동독과 통합이 아직 안됨) 캐나다 스웨덴 덴마크 등 구미 선진국들이 한국정부의 인권침해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결의안 통과조건에 인권조사라는 단서를 단 사실은 크게 주목되는 대목이다.

구미의 대표단은 지난 26일 한국펜클럽 전숙희 회장을 국제펜클럽 부회장으로 선출할 때부터 한국의 인권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으며 27일 오후 남북한 작가교류 촉구결의안이 제안되자 공격을 본격화했다는 것이다. 미국 서독 덴마크 대표들은 『한국정부가 북한 작가를 만나기 위해 판문점을 통해 방북하려는 한국 작가들을 저지하고 모두 잡아넣었다. 그런데 한국측이 무슨 작가교류냐』고 비판하고 나섰으며 미국과 덴마크 대표는 『투옥될 것이 확실해 귀국도 못하고 있는 작가 황석영씨를 귀국하도록 주선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한국대표단은 황씨가 한국의 국내실정법을 위반했음을 상기시키면서 『그가 귀국해도 별일이 없을 것으로 안다』고 설득했다. 특히 한국펜클럽 전무이사 이현복 교수(현재 폴란드 바르샤바대 한국어학과 교환교수)는 『과거보다 미래가 더욱 중요함을 고려하기 바란다. 남북한 작가교류가 실현될 경우 이는 한반도 통일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호소했다.

국제펜클럽이 채택한 결의안은 한반도가 1945년 강대국에 의해 분단된 이후 남북한 각자가 접촉하지 못한 사실을 상기시키고 『한국펜클럽과 북한작가동맹간의 대화는 남북한 작가의 접촉과 대화를 고무시킬 뿐만 아니라 한반도 통일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밝히고 한국펜클럽이 제의한 남북한 작가 대화에 북한작가동맹이 동의할 것을 촉구하는 것 등을 주요내용으로 담고 있다. 이 결의안은 유네스코와 국제펜클럽 공동명의로 북한 정부당국에 전달될 예정이며,빈 총회 때까지 이에 대한 북한의 긍정적 회답이 기대된다. 이 결의안은 내년 5월(또는 10월) 한국펜클럽과 유네스코가 후원하는 서울의 「아시아문학세미나」에 북한 작가들의 참가를 유도하기 위해 제안된 것이다.

파리의 국제펜클럽대표자대회에서 한국의 인권문제는 이처럼 일단 진화되었으나 앞으로 인권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재연될 것이 확실하다. 한국대표들은 구미대표들에게 국내법을 내세워 이해를 구해보려고 애썼으나 그들은 남북 분단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통독과 관련해볼 때 여행의 자유언론­학문­사상­창작의 자유를 철저히 보장한 서독이 동독을 흡수하는 데는 이같은 자유보장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엄연한 사실을 구미대표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이같은 사실이 한국에서 거부되고 있는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즉 현재의 한국 국내상황은 민주화의 발전에 별 진전이 없는 것으로 판정을 받은 셈이며 또한 서독대표가 한국 공격의 선봉에 섰다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가운데 강군 사건이 서구 언론에 보도됨으로써 한국의 인권문제가 앞으로 본격적으로 거론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프랑스 국영 TV 안텐2는 이미 지난 4월19일 고르바초프 방한보다는 학생시위를 앞세워 보도하면서 『한국정부는 늘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가혹하게 탄압했다』고 저명한 앵커 브뤼노 마쥐르가 논평했었다. 30일자 르몽드지는 「남한 내무장관 해임,그래도 사회긴장은 악화되고 있다」는 제목의 서울발 보도에서 공해 스캔들로 환경장관을 해임한 지 48시간 만에 내무장관이 물러났다고 강군 사건에 대한 정부조치를 소개하고 『이 사건들로 전국민이 분노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리고 이 사건들은 중증에 걸린 사회병의 부산물이기 때문에 장관해임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진단했다.

이 신문은 또 『강군 사건이 1987년 전두환체제시대 경찰의 난폭성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냈다』고 지적하고 이 때문에 전노협이 총파업을 위협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빈부격차의 확대,부동산투기로 봉급생활자의 집 마련의 꿈이 무너지고 공해로 인해 식수도 불신당하며 서울의 공기가 호흡할 수 없을 만큼 오염되는 등 한국사회가 최근 심각한 사회불안에 직면,중산층의 불만이 증폭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따라서 『노태우 대통령은 외교에 성공했지만 내치에서는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한 난관과 미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다. 즉 노 정권이 구시대의 나쁜 유산을 청산하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개혁의 결단이 없으면 앞으로 인권문제로 인해 「외교성공」마저도 날아가버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프랑스 언론의 시각이다.


<파리=주섭일 특파원>

세계일보 1991-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