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씨 최후진술 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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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씨 최후진술 요지
  • 황정유
  • 승인 1991.08.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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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공화국은 노동자로 하여금 임금노예가 되게 하거나 죽음을 강요하고 있다. 오늘 검찰이 노동자의 대변자로 일해온 나에게 사형을 구형한 것은 노동계급에 대한 정치적 보복이며 살인이다.
15년의 노동자 삶을 살아오며 현실에 대해 치열한 인식을 한 결과 사회주의를 신봉하게 됐다. 그리고 그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을 결성하고 활동해 왔다. 사노맹이 설사 오류가 많더라도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정권이 나를 죽일 수는 있더라도 노동자의 정통성과 의지는 죽일 수 없을 것이다.

사노맹은 결코 검찰의 주장대로 이 땅의 노동자와 민중에게 손해를 끼친 조직이 아니다.

사노맹은 노동자·민중이 주인이 되는 민중공화국의 건설과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복수정당제 인정 등의 헌정질서를 존중해 왔다. 검찰 주장대로 자유민주질서를 전복·파괴하려 해도 이 땅엔 파괴할 자유민주주의가 없다. 오직 독점자본과 파쇼권력이 있을 뿐이다.

또 무장봉기를 사노맹이 하려 했다고 하나 폭력혁명을 한 세력은 육사 출신의 장군들로,이들은 이미 3차례나 쿠데타를 통해 헌법질서를 파괴해 왔다. 따라서 그런 군부와 독점재벌의 조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재판부는 나를 심판할 자격이 없다.
동유럽권 사회주의의 붕괴로 이 땅의 사회주의는 크게 위협받고 있다.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가 보이고 있는 수많은 모순은 사회주의가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사회주의 위기는 역사적인 필연의 결과로 이런 진통을 거쳐 완숙한 사회주의로 발전해 나간다. 21세기의 사회주의는 인간적이면서도 이미 높아진 개인욕구를 해결해줄 수 있는 한국적 사회주의여야 한다. 지금까지 나와 백태웅 동지가 해온 사회주의가 많은 오류가 있음을 깨닫고 그것을 고치려다 구속되고 말았다.

앞으로는 20대가 아닌 30대 핵심노동자가 주축이 돼야 하고 모든 계급 속에 사회주의자가 침투하고 상류층에도 사회주의자가 있어야 한다. 즉 각분야 전문가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회주의가 돼야 한다.

사노맹은 지난 1년반 가량의 사회주의활동을 통해 남한사회주의운동의 서장을 열었고 탄압에도 불구하고 1천여명의 선진노동자를 노동해방의 투사로 만들었으며 전국 규모의 조직을 통해 노동운동을 지속해 왔다. 그러나 다른 대중조직과 결합하지 못했고 해결책의 제시없이 문제만 제기해 민족민주운동의 한계를 드러냈으며 폭넓은 노동자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또한 과도한 선언과 경직성으로 한계와 오류를 보여온 것이 사실이다. 즉 10년안에 혁명을 완성시킨다는 조급성과 소련 등 동유럽권에 대한 과학적 분석없이 사회주의에 접근했다. 다시 살아난다면 ‘긴 호흡 강한 걸음’으로 30∼50년의 계획으로 사회주의 실천에 힘쓰고 싶다. 그리고 내가 사형장에서 사라지더라도 더 많은 박노해가 나타나 노동자·민중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건설해주길 바란다.


한겨레 1991-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