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개는 '폐지' 5개는 수명단축.. MB의 과거사위 '역주행'
이명박 정부가 공식적으로 출범도 하기 전부터 과거사 정리가 '역주행' 되기 시작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위원장 이경숙)와 한나라당에 의해 현 과거사 관련 14개 국가위원회는 없어지거나 수명이 단축될 위기에 처했다. 인수위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등 5개 국가위원회의 활동기간 연장 없이 폐지시킬 계획이고, 한나라당 안상수 의원이 대표발의 한 과거사 관련 국가위원회 개편안에 따라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를 비롯한 9개의 과거사위를 진실화해위로 통폐합시키겠다는 방침이다. 이 개편안은 25일 국회 행정자치위에 상정됐다.
행정자치부의 인수위 업무보고에서, 보고서로 작성된 내용이 아니라 즉석답변에 의해 우발적으로 흘러 나왔던 ‘과거사위 우선 폐지 방침’이 이명박 정부가 공식 출범도 하기 전에 현실화 수순을 밟기 시작한 것이다.
진실화해위, 2년 동안 10% 진실규명... 남은 2년 동안 90%를?
9개 과거사위 흡수로 업무 과중... ‘수박 겉 핥기 식’ 조사도 우려
인수위측이 연장없이 폐지하기로 한 위원회는 진실화해위,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자진상규명위, 군의문사진상규명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 등 5개이다. 나머지 9개 위원회가 진실화해위로 흡수되기 때문에 모든 과거사위원회는 2010년 일괄 폐지된다. 종료시한 규정을 두지 않은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도 진실화해위에 흡수됨에 따라 폐지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진실화해위에 신청된 사건은 총 10,902건으로 조사개시결정이 난 사건은 총 9,264건(2007년 11월 30일 기준)이다. 1차 활동기한인 4년의 절반이 지나는 동안 진실화해위가 진실규명한 사건은 1,000여 건으로 전체의 9.2%에 불과하다. 활동기간이 연장되지 않는다면 남은 2년 동안 8,000여 건 이상을 처리해야 한다. 여기에 9개 과거사위에서 처리해야 할 몫까지 진실화해위가 떠안게 되면 사건 처리률은 이보다 더 떨어질 것이 뻔하다. 아울러 처리해야 할 사건은 많아진 반면, 시간은 줄어들게 돼 ‘수박 겉 핥기 식’ 조사가 될 우려도 있다.
이와 관련, 국회 행정자치위 수석전문위원은 한나라당안에 대한 검토 보고서에서 “진실화해위원회에 신청접수된 사건에 대한 조사 진척도도 부진한 상태에서 타 위원회의 업무마저 이관될 경우 해당 개별사건에 대한 전문성 부족, 업무과중 및 조직개편에 따른 혼란 등으로 심의가 지연될 수 있는바, 진실화해위원회가 모든 과거사청산 업무를 그 활동기간 내에 마무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가 “진실규명을 기다리고 있는 수 만 건의 민원사안이 산적한 가운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발표를 하는 작태에 대해 지난 반세기이상 민간인 학살의 진상규명을 요구해 온 100만 피학살 희생자 및 피해자 유족들과 우리들은 천붕지사와 같은 충격과 경악, 분노를 금할 수 없다”고 격분하는 이유다.
다른 위원회의 상황도 비슷하다. 일제 강점기 강제 동원된 피해자들에 대한 사건처리 현황은 전체 20여만 건 중 1/3에도 못 미치고 있다.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자진상규명위의 1차 활동기간은 2009년 3월까지 1년 남짓 남은 상태. 이제 1년 연장조차도 할 수 없게 될 처지에 놓였다.
또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 등 9개 위원회가 진실화해위에 통폐합 됐을 때, 당장에 나서는 문제는 인력과 예산난이다.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의 경우, 총 13,347건이 명예회복 신청접수를 했었고 이중 7년여 동안 11,096건이 심의를 완료했다. 남은 2,251건을 2년 안에 완료해야 한다. 연간 1천여 건 이상을 처리해 온 꼴이지만, 진실화해위에 흡수됐을 경우 얘기는 달라진다.
아직 통폐합에 따른 인원과 예산 조정안이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한나라당이 제출한 법안의 취지가 “인력과 예산의 중복지원문제 개선과 위원회 운용의 효율성 도모”인만큼 진실화해위에 인력과 예산이 9개 위원회의 기능을 감당할 만큼 늘어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을 비롯해 보수언론들은 지난해 진실화해위의 인력증원에 대해서도 “예산낭비”라고 맹비난했었다. 진실화해위의 진실규명 건수가 전체에 10%로에도 못 미치는 상황인데도, 지난해 늘어난 인력은 고작 30여 명이었다.
‘실용’ 앞세운 과거사위 강제 통폐합... 과거사 문제도 전봇대 뽑듯?
진실화해위가 9개 과거사위의 기능과 역할까지 떠안으려면, 진실규명 역할을 하는 것에 심의, 보상, 위령추모의 기능까지 추가돼야 한다. 시민단체들이 인수위와 한나라당의 방침에 반발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점이다. 기능과 역할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실용’과 ‘효율’을 앞세워 강제 통합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시민단체 및 관련 전문가들은 9개 위원회의 기능과 역할이 진실화해위로 ‘이관’ 되려면 인력, 예산 등에 대한 대책이 함께 나와야 하는데 이런 것이 없이 진행하는 것은 사실상 ‘폐지’에 다름 아니다고 우려하고 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들의모임(회장 백승헌)'도 25일 발표한 성명을 통해 “9개 위원회는 설립취지와 업무내용, 조직, 인력, 예산 등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들 위원회의 업무를 진실화해위원회에 이관시키기 위해서는 과거사정리기본법이 개정되어야 하고, 진실화해위원회의 업무, 조직, 예산도 그에 맞게 정비되어야 한다”며 “이러한 조치 없이 업무만 이관하게 되면 진실화해위원회가 사실상 그 업무를 처리할 수 없게 되고, 이는 결과적으로 9개 과거사위원회를 폐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고 밝혔다.
과거사청산을위한국회의원모임, 올바른과거청산을위한범국민위, 민주화운동정신계신국민연대,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연대 등 정치인들과 관련 시민단체들 역시 이날 성명을 내 “위원회들간의 업무중복에 대한 점검, 효율성의 제고, 기능의 조정 등이 필요하다면 각위원회별로 충분한 점검과 협의를 거쳐 조정하면서 순리적인 법적 절차를 밟으면 될 것이다”고 말했다.
이들은 또 “우리는 이명박 정부가 박정희 개발독재 시대의 철학을 계승하여 성장과 시장의 논리로 정의와 인권을 무참히 훼손하는 과오를 범하지 않길 진심으로 바란다”며 ‘실용’과 ‘효율’의 잣대를 과거사 문제에 들이대는 것에 우려를 표했다.
[통일뉴스] 박현범 기자 tongil@tongilnews.com
저작권자 © 천주교인권위원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