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는 생명의 기운으로 충만하여 나무들은 물이 오르고 개나리, 벛?? 목련 등 봄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을 그해 33년 전 4월 9일, 아버지는 그날 이후로 한번도 그렇게 그리워하는 이 딸과 가족에게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리셨습니다.
언젠가는 ‘명희야’하며 나타나실 것만 같았던 아버지...
도저히 믿어지지 않던 아버지의 죽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세월 속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속절없이 확인해야 했습니다.
시험 공부로 밤 늦게 공부할 때면 같이 옆에서 밤을 새워 주셨던 아버지...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입시 공부로 늦은 학교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에도 항상 큰길까지 나오셔서 저를 기다리시다 가방을 들어 주셨죠.
그리고 며칠 뒤 아버지는 우리 곁을 떠나
그 이후로는 결코 사랑하는 아버지의 음성도 모습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 이 딸이 얼마나 아버지가 보고 싶었는지 아시나요?
언젠가 꿈속에서 아버지는 평소와 똑같은 모습으로 제 이야기를 듣고 계셨었죠.
열심히 아버지께 이야기하다
‘아~ 내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그렇게 마음 아파했는데 이렇게 오셨구나... 살아 계셨구나’
생각함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이제는 가시면 안되요’하며 울다 잠이 깼었죠.
새벽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아픈 상실감으로 엄마와 함께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엄마는 동네 사람 다 듣겠다 하시며 저를 말리시고
저는 ‘엄마 나는 세상 사람이 다 듣도록 울고 싶다’며 그렇게 목놓아 울었습니다.
언제나 호탕하시고 유머러스하셨던 나의 아버지...
가족을 사랑하셨고 가족 보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셨던 아버지...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며 우시던 아버지를 기억합니다.
한때 저는 다 무슨 소용이 있어!
왜 아버지는 내 가족만 소중히 생각하고 챙기지 못하셨을까 원망도 해 보았지만
아버지는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그릇이셨습니다.
언제나 웃음이 넘치고 행복했던 우리집을 동네 사람들은 부러워했었고 또 그런 아버지를 존경했던 동네 사람들이었지만, 아버지가 중앙정보부에 잡혀가시고 1년만에 싸늘한 재가 되어 4월 10일 새벽에 집으로 오신 그날 이후로 동네 사람들의 쑥덕거림과 일부러 외면하는 눈길 속에서도 엄마는 그 집을 떠나지 않으셨죠. 언젠가는 아버지의 무죄가 밝혀지고 억울하게 돌아가셨다는 것을 동네 사람들에게 확인시켜주고 떠나도 떠난다며 지금까지 그곳에 계셨습니다.
아버지의 무죄가 법원에서 판결이 내려지고 난 후 엄마는 더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네 아버지는 고문으로 몸이 망가지고 독방에서 그렇게 고생하셨단다’하시며 우셨습니다.
전 ‘엄마 이제는 잊어버리고 좋은 것만 생각하시고 감사하면서 사셨으면 좋겠어요’라고 뻔한 위로를 한답시고 엄마에게 말하곤 하지만 엄마의 그 새까맣게 타서 너덜너덜해진 그 속마음을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평생을 아파도 없어지지 않을 한을 말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그렇게 염원하셨던 민주와 평화 통일!
그리고 결코 유린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의 확립!
아직도 요원한 이 현실을 아버지께서는 하늘에서 지켜보시겠지요?
아버지 이 딸은 아버지의 희생으로 피어날 열매가 무엇인지 잠잠히 지켜보겠습니다.
누구보다도 힘들고 아팠을, 나의 어머니...
우리의 어머님들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보냅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수고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008년 4월 7일
아버지를 여읜지 34년째를 맞은 딸 명희 올립니다.
<통일뉴스>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7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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