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명경시 풍조와 국가의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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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경시 풍조와 국가의 용기
  • 천주교인권위
  • 승인 2008.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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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인권] 남승한 변호사 (천주교인권위원회 운영위원)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흉악한 사건들이 심심치 않게 보도되면서 요즘 우리나라가 온통 적개심으로 물들어 있는 듯합니다. 2007. 12. 말 드디어 우리나라도 10년간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 사실상 사형폐지국가로 분류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다시 사형을 집행하자는 여론이 팽배합니다. 전직 야구선수가 일가족을 몰살하고, 어리고 예쁜 두 여자 어린이가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성폭행을 하려고 아이를 거듭 발로 걷어 차는 남자의 모습은 국민적 적개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국민들 사이에 일고 있는 이런 적개심이 흉악범죄에 대한 사형을 집행하자는 여론으로 모아지고 있습니다. 사형의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조차도 최근 매스 미디어를 통해 보도된 범죄들의 흉악성과 잔혹성 때문에 사형을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울 지경입니다.

사형을 다시 집행하면 흉악범죄가 줄어 들 것이라는 점이 사형을 집행하자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주된 이유이고 이번의 흉악범죄들의 노정을 사형 재집행의 호기로 삼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형제도의 존속이 범죄를 억지하거나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국민들의 범죄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질 것이라는 전제에 서 있는 이러한 주장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사형을 집행한다고 하여 살인과 같은 흉악범죄가 줄어들지 않는다거나, 사형을 폐지한 국가들에서 오히려 살인죄와 같은 흉악범죄가 줄어들고 있다는 통계는 사형 재집행론자들이나 사형존치론자들도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형 재 집행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통계나 사형의 범죄 억지력이 없다는 사실은 일부러 무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기회에 인기에 영합하는 정책이나 법률을 만들어 국민들의 인기를 사 보자는 심산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듭니다.

지극히 우려되는 것은 사형존치론자들 혹은 사형재집행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러한 인기 영합적이고 일회적인 주장에도 불구하고 공익을 위해 냉정한 판단을 해야 하는 국가가 오히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조장하거나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다시 사형을 집행할 기회를 찾으려 한다는 점입니다. 기실 흉악범죄의 증가의 원인은 사형을 집행하지 않은 데서 찾을 수는 없습니다. 흉악범죄의 증가 원인 중 하나는 인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데서 찾을 수 있고 그렇다면 그 해결책은 인명경시풍조와 같은 사회적 병리 현상의 원인 치료에서 먼저 찾아야 합니다. 인명경시풍조가 팽배한다고 하여 국가가 나서서 사형을 집행하여 사법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국민들 사이에 팽배해 가고 있는 적개심에 불을 붙이고, 흉악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죽여도 된다는 또 다른 인명경시풍조를 탄생하도록 할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인명경시풍조의 탄생이 더 비극적인 사태를 불러 올까 두렵습니다.

인명경시풍조의 만연과 같은 사회적 병리 현상으로 인해 흉악범죄가 늘어 날 때 국가는 여론에 편승하여 사형을 집행하는 쉬운 길이 아닌, 사형수나 흉악범의 인권과 인명도 소중하게 여기는 모습을 솔선하여 보여주는 어려운 길을 택하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비록 국민적 인기에 영합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오직 국가만은 그런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이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생명도 소중히 여기는 모습이야 말로 위기상황에서 국가가 보여주어야 하는 용기입니다. 국가의 진정한 용기를 간절하게 보고 싶습니다.

- <교회와 인권> 2008년 4월호(1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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