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대와 인권] 한계선에 몰린 아시아의 사람들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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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연대와 인권] 한계선에 몰린 아시아의 사람들을 만나다
  • 강성준(천주교인권위원회 상임활동가)
  • 승인 2008.07.25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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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인데도 마닐라 국제공항을 나서자마자 뜨거운 바람이 뱃속까지 들어왔다. 역시 적도에 가까운 섬나라다. 여름은 지났지만 6월부터 우기가 시작되었고 날씨는 건기에 비해 이때가 더 덥다고 한다. 비가 멈칫멈칫 내리는데도 전혀 고맙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6월 16일부터 20일까지 열린 제7회 ‘아시아태평양 정의평화회의’(7th Networking Meeting - Justice and Peace Workers Asia-Pacific Forum 2008, 이하 JPW)에 참석하러 가는 길. 한국에서는 천주교인권위원회에서 변연식 위원장님과 필자가 참석했다.
1997년을 시작으로 아시아 각국에서 열려 온 JPW는 아시아 지역 가톨릭 정의평화기구와 인권 단체, 그리고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민간 국제기구가 모여 각자의 경험과 정보를 공유하고 활동에 대한 성찰을 진행함으로써 공동의 행동계획을 만드는 국제회의인데 근래에는 약 2년에 한번씩 열리는 것으로 정례화되었다. 올해는 ‘한계선에 몰린 민중들과의 연대’(Solidarity with Marginalized Peoples)라는 주제로 인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대만, 일본, 홍콩, 피지, 뉴질랜드 등에서 4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필리핀 케손시티(Quezon City) ‘베타니아(Betania) 피정의 집’에서 열렸다.

슬럼

오리엔테이션과 라바얀 주교님의 개막미사로 시작된 첫째날에 이어 둘째날과 셋째날에는 필리핀의 도시빈곤을 직접 체험하는 참여관찰(exposure)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참가자들이 6개조로 나뉘어 조별로 서로 다른 지역을 방문하고, 한 사람이 한 가정에서 1박 2일의 생활을 같이하는 방식이었다.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이런 식의 참여관찰 프로그램이 필리핀에서 가능한 것은 지역에 뿌리를 둔 사회단체가 왕성하게 활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과 일본, 홍콩, 대만 참가자들로 이뤄진 동아시아팀은 도시선교회(Urban Missionaries, UM)가 활동하는 마을로 배정되었다. 내가 속한 조는 케손시티 북부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이곳은 빈곤한 ‘북부 삼각지대’(North Triangle)의 한 꼭지점을 이루는 곳으로 정부 표현으로는 ‘국유지를 수십 년 동안 불법 점유하고 있는’ 약 3000가구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강가에 흙과 비닐로 지은 작은 집들이 따닥따닥 붙어 있는 이 마을은 상하수도 시스템을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 강으로 흘러가는 개천 곳곳에서는 빨래와 설거지를 하는 사람들이 간간히 내리는 비를 피해 바쁘게 손을 놀리고 있었고 대부분 집 바깥에 있는 화장실에서 바로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오물로 마을 전체에 악취가 진동했다. 말로만 듣던 필리핀의 슬럼(slum)이었다. 어떤 나라의 대도시든 중심부로 출퇴근해야 하는 저임금 노동자가 모이는 슬럼을 배후에 가지고 있다고 알고 있지만, 처음 본 필리핀의 그 거대한 슬럼은 “어떤 것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었다. 일본에서 온 프란시스 신부(Fr. Francis Fukamizu)는 “1970년대 내가 한국에 갔을 때 서울 사당동에서 본 풍경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내가 하룻밤을 묵기로 한 집은 할머니부터 손녀들까지 3대 10명이 방 2개와 부엌에서 살고 있었다. 남편은 트럭운전사로 일하다 일시적으로 실직했고 아내는 대화 내내 대가족의 빨래와 식사 준비로 분주했다. 이들 대가족의 생계는 근처 도시의 한 무역회사에 다닌다는 딸에게 온전히 달려 있었다. 딸의 월급은 실례가 될 것 같아 물어보지 못했지만, 한달 최저임금이 약 360페소인 필리핀에서 상수도 대신 먹어야 하는 식수가 10리터에 약 40페소라 하니 물을 얻어먹기조차 미안할 지경이었다. 주변에 아는 사람 한둘은 한국에서 이주노동을 한 경험이 있어 한국 사람이 반갑다는 이들 슬럼 주민들에게 꿈이 무엇인지 물어봤다. 딸의 꿈은 계속 일하는 것. 밤늦게 집으로 돌아온 중학생 아들의 꿈은 “영어를 열심히 배워서 한국에 가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가족들과 한창 이야기하던 중에 갑자기 마을 전체의 전기가 끊어졌다. 거주의 법적 지위가 ‘불법’인 이들에게 국가는 전기를 ‘합법적으로’ 공급하지 않는다. 주민들은 전기를 사용하기 위해 주변 전기선에 다른 선을 이어 마을 전체에 공급하고 있었다. 전기선을 감독하는 사람에게 약간의 돈을 쥐어주면 가능한 일이라 한다. 하지만 이날처럼 용량보다 많은 전기를 사용하면 마을 전체가 정전되는 사건이 한 달에 두세 번은 벌어진다고 한다. 재밌는 것은 합법적인 전기가 아닌 만큼 전기선을 복구하는 일도 마을 사람들의 몫이라는 점이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데도 불꽃이 튀는 전봇대에 아무렇지도 않게 올라가 있는 한 사람의 모습에서 슬럼이란 무엇인지, 이들이 내 몰린 극한(marginal)이란 무엇인지를 슬슬 깨닫게 되었다.

필리핀에서 한국을 보다

이 외에도 JPW는 반세계화 운동으로 유명한 월든 벨로(Walden Bello) 교수의 강의 등 흥미있는 프로그램이 많았다. 하지만 누군가 이번 회의의 성과를 나에게 묻는다면 대답하기 참 난감하다. 마지막날에 필리핀의 광산개발 문제에 대한 기자회견을 공동으로 개최한 것 말고는 분명 눈에 띄는 공동의 결의나 사업계획을 만들지는 못했다. 참여관찰 프로그램에 이어 넷째날 열린 국가별 보고서(Country Report) 발표에서 드러난 각국의 인권상황이나 단체들의 대응방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인권침해가 용인되는 사회적 배경과 원인이 나라마다 달랐다. 어떤 나라는 주류 종교와 다른 종교를 가졌다는 이유로 차별받는다. 어떤 나라는 국가주도의 일방적인 산업화 노선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배제된다. 어떤 나라는 외국군의 주둔이 낳는 환경파괴와 상시적인 전쟁 위험을 안고 있다. 또 어떤 나라 정부는 군대 보유를 포기하는 나름 훌륭한 헌법을 굳이 고쳐서라도 이웃나라에 군사적인 영향력을 미치려 한다. 과연 아시아는 하나로 묶일 수 있을까? 오랜 식민지 해방투쟁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라틴아메리카나 하나의 정치․경제체제를 만들어가고 있는 유럽과는 분명히 다르다. 지역별(대륙별) 인권협약을 형식적으로라도 가지고 있는 다른 대륙과는 달리 아시아에서는 이런 식의 시도나 제안이 별로 주목받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지? 어쨌든 이런 이유 때문에 이번 회의의 결과물인 공동성명서는 다소 추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서로 다른 환경에 처한 참가자들이 서로로부터 어떤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자리였다 싶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JPW 참가로 인해 서로 다른 나라들로부터 한국을 발견했다는 느낌이다. 특히 눈으로 볼 수 있었던 필리핀을 통해서 ‘공유’ 또는 ‘공적인 것’의 진수를 느꼈다. 한 사람이 배타적으로 가지면 다른 모든 사람은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소유’라면, '공적인 것‘은 누구도 소유하지 않지만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어떤 것이겠다. 필리핀에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고 놀랐을 사설경찰(Security Guard)은 배타적인 소유의 상징이다. 백화점 등 한국에서는 으레 공공장소로 여기고 누구든 자유롭게 출입하는 곳에서 이들 사설경찰은 들어오는 사람들의 가방을 열게 하고 몸수색을 한다. 더 놀라운 점은 사람들이 이런 수색에 아무렇지도 않게 응한다는 것이다. JPW가 끝난 후 우연히 들른 필리핀의 한 사회단체 사무실은 진입로에 아예 사설경찰의 ‘검문소’가 설치된 부자동네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돌아보면 한국도 배타적인 소유를 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 여기고 장려하고 있다. 특히 새 정부 들어서는 주거와 의료, 전기․가스와 물 등 인간답게 살기 위한 조건이 되는 공적인 영역에 ‘선진화’, ‘산업’이라는 그럴듯한 이름표를 붙이고 노골적인 사유화를 시도하고 있다. 공공장소에서도 사설경찰에게 가방을 기꺼이 여는 필리핀 시민들을 통해 점점 더 ‘공적인 것’에 대한 애정과 기억이 사라진 그 어떤 세상을 먼저 본 것 같아 나는 두렵다. 필리핀의 슬럼이 모든 ‘공적인 것’으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듯 말이다. 누군가는 필리핀에서 한국의 60년대를 발견했다지만 어쩌면 필리핀은 한국의 미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