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와 인권] 장애인차별금지법 차별진정을 통해 본 장애인 차별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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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와 인권] 장애인차별금지법 차별진정을 통해 본 장애인 차별 문제
  • 조은영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활동가)
  • 승인 2008.08.25 15: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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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환상특급’이라는 SF 외화시리즈가 방영된 적이 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공중을 떠다니는 감시 로봇에 의해 엄격히 통제되고 있는 미래사회. 반사회적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한 사내가 처벌을 받는데, 그 형벌이라는 것이 1년간 이마에 특별한 표식을 한 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 취급을 당하는 것이다. 마치 투명인간이 된 것처럼.
아직도 그 사내가 다른 사람과 한마디 대화를 나누려고 얼마나 애처롭게 매달렸는지, 그리고 외로움에 떨면서 어떻게 폐인이 돼 갔는지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단지 인간으로서 살기 위하여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제정하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이 이야기가 다시 머리에 떠오른 건 장애 관련 문제를 접하면서였다.
현장에서 만난 장애인들은 한결같이 “사회가 장애인을 마치 없는 사람처럼 취급한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다시 사회를 둘러보자 우리 사회는 마치 장애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장애인을 배제한 채 설계돼 있었다. 계단과 턱이 가득한 건물, 휠체어 이용자는 생각하지도 않은 지하철과 버스, 시각장애인은 없다는 듯이 인쇄물로만 나오는 각종 문서와 자료, 청각장애인은 존재하지 않는 양 소리로만 정보를 전달하는 방송….
사람들 역시 장애인을 없는 사람처럼 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학교는 장애를 이유로 입학을 거부했고, 입학하더라도 모든 수업이 장애인은 없다는 듯이 진행됐다. 장애 학생이 알아서 수업에 적응하거나 아니면 배제됐다. 직장 역시 학교와 비슷했고, 식당도 가게도, 하다못해 거리를 걷다 마주치는 사람조차 피하거나 곁눈질로 힐끗힐끗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장애인들은 아무 잘못도 없이 처벌 받듯 차별을 당해야 했다. 장애 때문이 아니라 마치 장애인은 없다는 듯이 대하는 사회 때문에 말이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이하 장차법)은 이렇게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직․간접적인 차별을 예방하고, 장애인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장애인 당사자의 언어와 힘을 통해 만들어졌다.
장차법 제정까지 7년의 노력은 지난 4월 11일 이 법이 시행되면서 작은 결실을 맺었다.

▲ 장차법 시행에 맞춰 열린 기자회견. 장차법은 제정되었지만 장애인 차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법은 시행됐지만 여전히 벌어지는 차별

그러나 장애인 차별은 아직도 일상처럼 벌어진다. 법이 제정됐다고 해서 장애인을 차별하던 관행이나 관습이 한 순간에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가 모은 장애인 차별 집단진정 건수만 봐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장차법이 시행된 4월 11일부터 20일까지 열흘간 156명, 지난 7월 30일 장차법 시행 100일을 맞아 일주일간 차별 사례를 모은 것이 또다시 225명에 이르렀다.
시설 이용이나 대중교통에서의 차별은 물론이고, 사범대를 졸업해 교사임용고사를 보려던 시각장애인이 텍스트파일을 이용한 음성지원 시험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한 사건부터 가입이 의무화 돼 있는 운전자보험마저 장애를 이유로 거부한 사건, 대출이나 신용카드 발급 거부, ATM기 이용에서의 차별, 학교에서 교사가 “특수학교나 가라”며 장애학생과 부모를 모욕한 사건, 그리고 심지어는 청각장애여성이 5살 때 헤어진 부모를 찾기 위해 한 방송프로그램에 출연 약속을 했다가 청각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전하자 방송 진행에 어려움이 있다며 출연 약속을 취소한 사건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차별 사례가 접수됐다.

장애인, 두려움과 용기 사이에서 사회에 맞서다

장애인 차별 진정은 이렇게 물밀 듯 밀려들고 있는데, 법 제정 초기에 장차법 시행기구인 인권위에 확보하기로 약속했던 장차법 시행 인력 20명은 정권이 바뀌자 없던 일이 돼 버렸고, 주무부처인 복지부는 벌써부터 법을 후퇴시키는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장애인 당사자들은 이러한 법 개악을 막고 실효성 있는 법 시행을 위해 필요한 인력과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여전히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글머리에 소개했던 SF외화시리즈 결말은 이렇다.
사내는 1년 동안의 형벌을 참아내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러다 어느날 자신처럼 형벌을 받고 고통스러워하며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달라고 외치는 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 망설이던 사내는 또다시 처벌을 받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용기 사이에서 마음을 굳게 먹고 그녀의 얼굴을 보며 말한다. “나는 당신이 눈에 보이며, 당신도 사람이다. 괜찮다.”고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 역시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 취급을 하는 장애인에게, 차별에 맞서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멋진 말을 건네며 따뜻하게 손잡아 줄 수 있을까. 우리는 당신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