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촛불세대와 ‘지식인들’의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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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촛불세대와 ‘지식인들’의 상상력
  • 좌세준(인권위원, 변호사)
  • 승인 2008.09.25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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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는 가라 /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시인의 시 ‘껍데기는 가라’의 일부이다. 중학교 3학년 국어 교과서에도 나오는 시이다. 이쯤 되면 명시 또는 고전의 반열에 들만하다. 그런데 요즘 위 시에 ‘토’를 달고 나온 사람들이 있다. 우파 지식인 모임 ‘교과서포럼’이 그들이다.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먼저 밝히는데 ‘교과서포럼’ 앞에 붙어 있는 ‘우파 지식인’이라는 수식어는 이들을 가장 자세히 소개한 ‘ㅈ일보’의 표현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교과서포럼’은 현재 고교 2-3학년들이 쓰고 있는 금성출판사의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를 문제 삼고 있다. 우선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에 대한 이들의 ‘토’를 살펴보자.
“대한민국 현대사 서술의 도입부에 소개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역사의 껍데기로 풍자. 문학적 상상과 역사서술은 구별되어야 함”
- 안타까운 일이다. 중학교 3학년 국어 기말고사에 ‘껍데기’가 의미하는 것을 쓰라는 문제가 나왔다고 치자. 답은 ‘거짓, 허위, 불의, 순수하지 못한 모든 것’이다. 그게 아니라 ‘대한민국 역사’라고 쓰면 그건 오답이다. 이건 아주 쉬운 문제이다. 참고로 중학교 3학년 국어교과서(이건 국정교과서인데)에 나온 해석을 보더라도 1연 ‘남아야 할 4월 혁명의 순수함’이고, 2연 ‘남아야 할 동학농민 운동의 순수함’이다(236쪽). 중3 정도라면 위 시를 읽고 ‘대한민국을 역사를 껍데기로 풍자’한 것이라는 ‘문학적 상상’을 동원하지는 않는다. 한마디로 우파 지식인들의 ‘역사적 상상’이 과도한 것일 뿐.

다음으로 “연합군이 승리한 결과로 광복이 이루어진 것은 우리 민족 스스로 원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데 장애가 되었다”(253쪽)는 부분에 대한 이들의 지적을 보자.
“가장 이념적으로 편향된 서술로서 민족, 민중의 반제국주의 투쟁을 통한 제3세계 혁명을 한국민족의 나아갈 길이라고 본 것”
- 이건 나가도 너무 나갔다. 포럼이 문제 삼고 있는 교과서 해당 부분 바로 앞에는 “우리가 나라를 되찾은 것은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한 대가였다”라는 표현이 있고, 바로 뒤에는 “한반도의 장래는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나 정책에 크게 영향을 받게 되었다”는 표현이 전부다. 그 어디에도 ‘반제국주의 투쟁’이나, ‘제3세계 혁명’을 유추해낼 만한 내용은 없다. 전체적 서술의 맥락상 ‘독립운동’과 ‘연합국 승리’에 의한 광복을 나란히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정 국사교과서의 서술과도 크게 다르지 아니하다. 유독 해당 부분만을 부각하여 ‘가장 이념적으로 편향된 서술’이라 평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들이 문제삼는 31항목 56개 표현에 대한 지적의 진지함에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포럼이 인용하고 있는 교과서 표현은 다음과 같다. “전쟁 중 남한 거창영동노근리에서 주민들이 죽임을 당했고, 북한군도 대전에서 주민을 죽임” 이에 대한 포럼측의 평가는 “국군에 의한 학살을 3건 소개한 반면 북한군에 의한 학살은 하나만 소개. 국군이 더 많은 학살을 자행했다는 인상을 줌”이다.
- 이건 사실 코미디에 가까운데, 교과서 해당 부분의 서술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경남 거창과 충북 영동의 노근리 등 여러 곳에서 주민들이 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후퇴하는 북한군도 대전 등지에서 많은 주민을 죽였다.”(272쪽) ‘거창’과 ‘영동의 노근리’라면 3군데가 아니라 2군데인데 ‘영동’과 ‘노근리’를 따로 기재하여 ‘3곳’이라 쓴 것은 단순한 착각인지. 북한군의 학살을 표현한 ‘대전 등지’는 과연 대전 한 곳에서만 학살이 있었다고 서술한 것이라는 말인지. 우리나라 고등학교 2, 3학년 정도라면 한국군, 북한군에 의한 주민학살 장소를 양쪽 모두 ‘등’이라 표현한데서 충분히 행간을 읽어낼 것이다.

포럼측 ‘지식인들’은 교과서 수정을 교육과학기술부에 요청하는 것 이외에, 서울시내 고등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현대사 바로알기’ 특강을 실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고등학교 2, 3학년이라면 얼마 전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던 세대이다. 혼자 생각하고 상상할 줄 안다. 일명 ‘지식인들’의 과도한 염려와 훈계가 촛불세대의 지적 판단과 상상력을 통제할 수 있겠는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