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김치와 라면이 그리운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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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김치와 라면이 그리운 아이들
  • 안주리(인권위원, 4.9통일평화재단 활동가)
  • 승인 2009.02.18 22: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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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엄마와 다른 엄마를 둔 결혼이주 가정 아동들은 학교에서나 마을에서나 보이지 않는 존재이다. 이주노동자와 이주가정이 밀집해 살고 있다는 안산지역의 초등학교에서도 이주가정 아동들의 실태에 대하여 정확하게 파악조차 안 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혼과 취업으로 국적을 취득하고 개명을 한 엄마들이 많아지고 있기도 하지만 이주여성 엄마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걱정해서 학교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물론 삼십년 만에 시골마을에 아이가 탄생했다는 미담을 방송에서 보기도 하지만 거주실태 및 신원파악 뿐만 아니라 이들에 대한 적절한 교육과 문화적 여건, 어린이들의 신원을 보장하는 기본적 보호조치는 여전히 미흡한 실정이다. 이와 같이 이주가정 아동들은 엄연히 한국에 살면서도 보이지 않는 유령 같은 존재이기에 특히 취학 전 아동들에 대한 파악은 더욱더 불가능한 실정이다.

▲ 원곡동사무소에서 열린 책나눔 시범행사


2년 전 안산에서 시범적으로 운영되었던 아시아스타트(Asia Start)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함께 읽는 아시아’라는 테마로 한국의 그림책을 아시아 일곱 나라말로 번역하여 한국말과 엄마 나라 말을 함께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 시범적으로 안산의 이주가정과 어린이 도서관에 배포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3개월여 동안 매주 일요일 원곡동사무소에서 열린 책나눔 시범 행사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가정이 나들이 삼아 온가족이 방문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엄마와 함께 방문하거나 또래끼리 방문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말임에도 돌봐주는 가족이 없는 아이들은 매주 행사장을 찾는 단골손님이었다. 취학 전인 6,7세 아이들은 서투른 한국말로 함께 책을 읽고, 무슨 사연인지 본국으로 돌아간 엄마 이야기, 아빠 얼굴을 모른다는 아이, 부모 없이 할머니와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며 봉사자들 곁을 떠날 줄 모른다. 아시아스타트 도서는 현재 전국의 20여개 어린이 도서관과 복지관 등에서 결혼이주 여성과 자녀들을 위한 프로그램에 활용되고 있다.

연초에 한 방송사에서 이혼으로 홀로 아이를 키우기 어려워지자 고향인 필리핀의 친정으로 아이들을 보내 외가 식구들의 돌봄을 받는 2세 아동들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방송되었다.

일하는 여성이 마음 편히 기대어 보육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친정인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인가보다. 아이들은 일터로 떠난 부모의 빈자리를 케이블 방송 만화채널을 보며 아이들끼리 끼니를 해결했던 한국에서의 외로운 기억보다 필리핀 시골마을에서 맨발로 동네 아이들과 뛰어노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일년여 만에 찾아온 엄마가 가져온 김치와 라면에 열광하며 매운 김치와 매운 떡볶이로 그들만의 향수를 달래는 모습이 외국생활을 하면 겪는 한국인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든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시키고자 일자리를 찾아 어린 자식을 떼놓고 다시 길을 나서는 엄마가 한국에서 만나는 현실은 결코 녹녹치 않으리라. 어려운 상황에서도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는 그녀들의 모성에 위로와 격려를 보내면서도 비슷한 또래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그녀들의 삶의 무게를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방송을 보는 내내 필리핀 시골에서 밝게 뛰어놀던 아이의 수줍은 미소와 원곡동 동사무소에서 함께 책을 읽으며 만났던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가 중첩되며 프로그램을 보는 내내 가슴이 먹먹해져왔다. 아동들이 누려야 할 기본적 권리를 규정하고 있는 유엔아동권리협약이 종잇장에 불과한 비참한 현실들이 세계 도처에 존재하지만, 엄마의 따뜻한 품과 아빠의 넓은 가슴이 그리울 아이들은 세계 어디에 살든 아이들이 누려야 할 기본적 권리를 보장받고 정서적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보호받아야 한다.

지난해부터 본격화된 경제 불황과 이명박 정권의 이주민에 대한 정책은 이주노동자, 결혼이주 여성 등의 사회적 약자들을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이주민들을 불가촉천민으로만 인식한다면 언젠가는 우리사회 공동체와 갈등을 피할 수 없을지 모른다. 몇해 전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발생한 한국인 총기사건을 떠올리며 십년 이십년 후… 함께 살아갈 우리의 미래를 바로 오늘의 현실이 앞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