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인권] 노동(자)은 ‘유연’하게 활용해도 되는 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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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 인권] 노동(자)은 ‘유연’하게 활용해도 되는 도구인가?
  • 박동호(신부, 서울대교구 신수동성당)
  • 승인 2009.05.27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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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문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노동문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언급하기 전에 몇 가지 전제할 것이 있다.

우선 교회는 전통적인(혹자는 이를 보수적이라 평가할 것이다) 접근방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은 당시의 세상을 ‘급격한 변혁’의 시기로 규정하였다. 그 급격한 변혁은 인류에게 희망과 기쁨을 안겨줄 수도 있으나 동시에 절망과 고뇌에 빠뜨릴 수 있음을 지적한다. 이를 공의회는 ‘심각한 불균형’이라 명명하였다. 공의회는 “현대 세계는 동시에 강하면서도 약하고, 최선을 이루거나 최악을 저지를 수 있으며, 자유와 예속, 진보와 퇴보, 형제애와 증오의 길이 열려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은 스스로 불러일으킨 힘들이 인간을 억압할 수도 있고 인간에게 봉사할 수도 있으므로 그 힘들을 바르게 다스리는 것이 인간 자신의 책임임을 깨닫게 된다”(사목헌장 9항)고 진단한다. 공의회는 이 심각한 불균형을 극복하기 위한 모든 노력이 인간의 존엄함과 공동선을 지향해야 함을 사목헌장의 제1부 ‘인간의 소명과 교회’ 편에서 상술한다. 필자가 교회가 노동문제에 있어 전통적인 접근방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밝힌 것은 앞에서 언급한 ‘심각한 불균형’의 원인을 ‘사회구조’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그것을 부정하지는 않고 있지만), ‘인간’ 자신의 불균형에서 그 근본원인을 찾는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둘째로 교회가 이른바 ‘사회교리’를 통해서 노동문제에 분명하고 일관된 태도를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세상의 변혁에 대한 ‘대응’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사실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출현한 초기 자본주의는 노동문제를 사회문제로 부각시켰다. 자본의 축적과 노동의 착취라는 구조적 모순의 심화는 ‘계급갈등’을 야기했으며, 이 사회문제에 대한 진단과 대안의 한 주류로 등장하여 급속하게 팽창한 것이 사회주의였다. 사회주의의 종교비판이 불러온 무신론의 확산은 교회가 대응해야 할 중요하고도 시급한 과제였다. ‘새로운 사태’로 시작한 교회의 사회교리는 그러니까 세상의 심각한 경제적 불균형에 대한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에서 출발했다기보다는 사회주의와 무신론의 확산에 대한 대응에 불과하다는 지적은 일리가 있다.

셋째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밝힌 교회의 정체성은 성경과 역사의 성찰에 그 토대를 두었다는 점에서 개혁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 했지만, 그럼에도 교회는 이중질서 곧 가시적이면서도 동시에 영적 실체라는 교회 정체성에 대한 이해는 현세 사물질서에 대한 교회의 태도를 정립하는 데 딜레마에 놓일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이 같은 필자의 개인적 소견을 전제하고 오늘날 우리 사회의 노동문제와 우리 교회의 시각과 전망을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노동문제를 바라보는 보편교회의 시각은 사회교리에 근거하여 일관된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요약하면, 노동문제를 인간의 문제와 더불어 사회구조적 문제로 바라봄으로써 균형을 갖추고 있으나 실천에 있어서는 한계를 보인다. 교회는 분명하게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서 노동의 우월성을 밝히고 있다. 거시경제든 미시경제든 경제는 ‘인간’을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음도 분명하다. 노동자가 ‘노동의 노예’ 상태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분명한 신념이다. 그러나 근대화, 현대화, 정보화, 그리고 세계화 따위로 세상질서를 규정하는 현실에서 노동의 자본에의 예속은 날로 심화되어 왔다. 그 예속은 더 이상 한 개인이나 사업장 혹은 사회의 범위를 넘어 세계의 경제 질서와 맞닿아 있음은 분명하다. 이는 교회의 노동문제 대응에 사회구조적 접근의 필요성을 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엄한 인격체인 노동자가 선한 의지로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 내어놓고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조건에서 자본과 계약을 맺는, 그래서 시장의 자유에 맡겨두어도 괜찮은 경우는 찾기 힘들다. ‘자유시장경제’와 자본주의가 만능이 아님은 교회도 경고하고 있다. (물론 교회는 사유재산권을 부정하는 급진적인 집산주의 역시 대안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여기서 교회는 공동선과 정의의 규범이 경제 질서에서도 실현되어야 한다고 가르침으로써 사회구조적인 접근의 길을 걷는다. 필자가 실천에 있어서 한계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한 것은 교회가 현세 사물의 고유한 질서를 존중함으로써 경제생활에서 구체적인 대안(자본주의 혹은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따위의)을 제시하기보다는 원칙(노동의 존엄함, 노동의 자본에 대한 우월성 따위의)을 제시하는 데 그쳤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국 교회의 경우는 더욱 한계를 보인다. 노동문제를 사회문제로 인식하면서도, 교회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펼치거나 실천하려는 노력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교회의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고 보는 편이 좀 더 솔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둘째로, 가톨릭교회는 가시적이면서도 영적 실체로서 세상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세상을 초월한다는 교회의 자기이해는 교회가 운영하는 사업장의 노사문제를 푸는 신앙의 기준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주면서도 동시에 대안을 마련하는 데 도움을 준다. 교회의 이중의 정체성을 사업장의 노사문제를 푸는 토대를 삼는 것은 생산적이지 않다. 만일에 가톨릭 사업장의 노동자는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문제를 풀고자 하는데 교회가 영적이며 초월적인 성격의 본성을 내세운다면 대화는 지극히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가시적이며 영적인 교회는 사회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이 사회교리는 몇 가지 중요한 원칙 혹은 원리를 토대로 전개되고 있는데, 크게 보아 인간 존엄함의 원칙, 공동선의 원칙, 보조성의 원칙, 참여와 책임 그리고 연대의 원칙 따위가 그것들이다. 노사문제는 언제든지 자본과 노동 사이의 긴장과 갈등으로 악화될 가능성을 갖는 가시적 문제다. 교회 사업장의 노사관계가 신앙뿐만 아니라 현실의 이해관계로도 맺은 관계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회교리는 현실 문제에 대한 우리 가톨릭교회의 신앙의 기준이다. 앞에서 열거한 몇 가지 주요 원리를 노사문제를 상생과 공영의 기초를 삼을 수 있을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위 단체의 자율성을 강조한 보조성의 원리에 기초하여, 자율성의 범위를 넘어설 때, 이해의 갈등과 충돌을 협상 조정할 수 있는 법적 권한과 책임을 갖는 전문 기구 혹은 협상 전문가 집단을 상위기구에 설치하여 운용하는 것도 검토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사회교리가 다루고 있는 ‘노동문제’에 있어서 근원적이고 진지한 성찰이 있어야 하겠다. 근원적인 성찰이라 함은 ‘과연 노동자라는 인격체와 그 인격체에서 나오는 노동력을 구별할 수 있는가? 노동력은 시장에서 매매되는 상품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그 형태를 달리하며 인류 사회에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물론 현실 사회의 경제생활에서 자본주의가 그 주류를 형성하고, 그 대안으로 사회주의와 그 형태가 또 다른 주류를 형성하고 있지만, 어느 경우나 인격체인 노동자와 그 노동자의 노동력을 구별하고 있음은 공통적이다.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이유는 노동력을 상품화하고, 노동력을 시장에서 거래하는 한, 노동자의 노동의 노예 상태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길이 오로지 잉여자본의 축적뿐이라면 한정된 자원을 놓고 인간은 영원히 싸울 수밖에 없으며, 이는 교회가 그토록 경계한 “이성과 법의 원리보다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으로 치달을 것이다. 끝으로 산업사회의 환경에서 설정한 ‘노동’의 개념에 대한 성찰도 필요하다. 주주자본주의 혹은 금융자본주의의 시대라 일컬어지는 시대에 과연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에 합당한 임금을 받지 않은 이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노동의 문제를 육체노동자의 노동 문제로 제한하는 인식은 존재와 인식의 심각한 괴리현상을 낳으며, 거의 모두가 노동자임에도 스스로를 노동자로 인식하지 않음으로써 노동 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