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인권] 로마에 서서 사형제 폐지를 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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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인권] 로마에 서서 사형제 폐지를 외치다
  • 변연식(천주교인권위원회 위원장)
  • 승인 2009.06.24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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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로마에서 상떼지디오(Sant'Egidio) 공동체 주최로 5월 25일~26일 열린 4차 세계 법무부장관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회의 주제는 “모라토리엄(사형 유예)에서 사형제 폐지를 향하여-생명없이는 정의도 없다” 용산 참사 문제로 수배되어 순천향 병원 장례식장에 갇혀있는 인권운동가들과 날마다 용산현장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는 문정현 신부님을 생각하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한편 생각하면 이 정부는 연쇄 살인범 사건을 이용해 용산 참사의 진실을 덮으며 사형 재개를 부추기고 있지 않은가. 이 회의에 참석하도록 애써주신 성염 전 교황청 대사님의 말씀처럼 모든 인권 문제가 후퇴하고 있는 이 마당에 1998년 김대중 정부 이후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 한국이 12년째 모라토리엄을 유지하고 있음을 국제사회에 다시 한번 천명하고 이제 진정한 사형제 폐지국가로 가는 길목에서의 한국의 역할과 책임을 얘기하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문정현 신부님께도 이런 사실을 말씀드리니 “인혁당으로 여덟 분이 사형당한 사실보다 더 큰 증언이 어디 있겠는가” 하시며 격려해주셨다.

▲ 5월 25일 로마 시청 강당에서 사형폐지를 위한 4차 세계 법무부 장관회의 개막식 직전 모습. 앞줄 중앙에 마르티노 추기경의 모습이 보인다.


로마공항에 도착하니 아시아 담당자인 마리넬라 변호사와 레오나르도가 마중을 나왔다. 미리 보낸 원고를 검토해보았고 25일 오전 로마 시청 강당의 연설자 11명 속에 끼었다며 기뻐해주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영어도 잘 통하지 않고 아무리 이메일을 보내도 내가 언제 어떤 형태로 연설을 하게 될지 자세한 프로그램이 오지 않아 애를 먹었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이해가 되었다. 40여개 국가에서 법무부 장관과 차관 그리고 3개국에서 NGO 대표가 왔는데 이들 중에 누구를 선정할지는 힘들었을 것이다.

▲ 5월 25일 오전, 연설을 위해 각국 대표들이 단상위에 앉아있는 모습


드디어 25일 아침, 로마시내의 교통 체증 때문인지 숙소에서 경찰차의 호위를 받으며 로마시청으로 이동하였다. 여기저기 잘생긴 로마인 조각상이 우리를 반겨주고 공동주최 측인 유럽연합(EU) 관계자를 비롯해 로마시장, 이탈리아 외무부장관과 정부측 대표들, 상떼지디오 회원들로 강당은 가득 차 있었다. 늘 뉴스기사에서나 뵈었던 마르티노 추기경(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과 인사를 나누고 그분의 대회 축사로 그날의 행사가 시작되었다. 발표자가 나란히 연단에 올라 앉아 있다가 한사람씩 연설대에 서는 방식이었는데 강당 뒤에는 통역실이 있어서 영어, 불어 스페인어, 이태리어, 포르투갈어, 러시아어 등으로 동시 통역이 이루어졌다. 처음 연설은 남아프리카(공) 법무부장관이었는데 만델라 전 대통령의 미소에 익숙해져있어서인지 그분의 얼굴도 친숙하게 다가왔다. 내 차례가 다가오자 레오나르도는 나보다 더 긴장하여서 연설문을 챙겼는지 몇 번이고 확인하였다.

▲ 이철수 화백의 판화를 통해 사형 당하신 인혁당 여덟분과 유족들에 대해 설명


이렇게 해서 “1975년 4월 9일 인혁당 여덟 분이 대법원 사형 판결이 난지 18시간도 되지 않아 사형을 당하였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를 인혁당 사건이라고 부르고 국제사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가장 어두운 날이라고 불렀습니다”로 시작되는 연설을 하게 되었다. 워낙 내용이 충격적이어서인지 강당 안이 조용해지며 청중들이 내 말에 귀 기울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연설 중간엔 인혁당 희생자들과 가족을 형상화한 이철수 화백의 판화그림을 보여주었다. 방송카메라가 모두 그림에 집중하였다. 족자 형태여서 더욱더 동양적인 그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았다. “이렇게 여덟 분이 억울하게 사형당하셨습니다. 사형제는 오판의 가능성이 있고 정치적으로 악용당할 수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사형을 언도 받고도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살아남았고 살아있었기에 나중에 대통령도 될 수 있었고 평화와 민족 화해를 위한 노력으로 노벨 평화상도 받았습니다.” 사형당해 재심에서 이겨도 생명을 되돌릴 수 없는 문제와 살아남았을 때의 삶의 충만성과 성공을 이렇듯 한국역사로 선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예는 없을 것이다. 내 순서가 마지막이기도 했지만 연설내용이 이 대회의 주제 “생명이 없으면 정의도 없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인지 사회자는 내 연설내용을 축약하여 자신의 클로징 멘트로 사용하며 힘 있게 대회를 마무리하였다. 연설을 끝내고 자리로 돌아오니 좌우 옆자리에 앉아있던 코스타리카 법무부 장관과 잠비아 장관이 축하한다며 악수를 건네 왔다. 초청을 받은 이후 거의 한 달 동안 어깨를 짓누르던 부담감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개인적인 감회도 깊었다. 국가보안법 문제나 다른 인권문제로 국제회의에 나가 인혁당 사례를 든 적은 있지만 이렇듯 지구촌 각국에서 온 법무부장관들과 로마인 조각상들 앞에서 이분들의 억울하게 사형 당하심을 증언하게 될 줄은 몰랐다. 말 그대로 법무부장관들이 아니라 정의의 대신들(Ministers of Justice)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34년 전의 참극을 하소연하며 다시 한번 그들의 무죄 판결을 받아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정말 간절히 그분들의 한이 조금이라도 풀렸으면 하는 마음이다.

▲ 5월 26일 오전, 이탈리아 의회 방문, 피니 하원의장 면담


오후 프로그램은 상떼지디오 성당과 함께 있는 본부 건물에서 각국 대표들, 형법학교수, 변호사, 정치인, 종교인들이 둘러앉아 페널 토의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사형제를 이미 폐지한 국가 대표들은 주로 정치지도자의 결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며 정부는 사형폐지가 법제화되도록 그리고 대체 처벌이 가능하도록, 절대 포기 하지 말고 노력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어느 아프리카 나라는 사형제는 보복의 수단이고 그 나라에서 보복은 또 다른 죄로 여겨지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문화적 접근을 할 수 있었고 사형제 폐지에 이르게 되었음을 발표하였다. 키르키스탄 어머니는 오판으로 아들을 잃은 절절한 슬픔을 말하였다. 사형제가 소위 범죄 억지력에 영향을 주지 않는 점, 교화의 가능성이 전면 부정되는 점 등도 당연히 거론 되었다. 이렇듯 각국의 정부대표들이 친 형제자매처럼 모여 앉아 사례를 발표하고 경험을 나누며 어떻게 사형제 폐지운동을 완결할 것인가 전략을 짜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가난한 자와 장애인의 성인으로 불리는 성 에지디오 정신이 곳곳에 배어있는 그곳은 “어떻게 하면 우리 모두 함께 살아 갈수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 가득 찼다. 이 운동이 되돌릴 수 없는 세계적 추세라는 사실을 계속 알려내고 그를 위한 노둣돌이 되야 하며 생명의 문화를 위한 중재자가 되기로 마음을 모으는 것, 오랜 비행시간 끝에 짧은 만남이지만 그곳에 함께 하는 이유일 것이다. 다음날은 이탈리아 의회를 방문해 잔프랑코 피니 하원의장을 면담하고 그의 기조연설 후 참가자들과 각 나라 대표들이 소개되는 것으로 모든 일정이 마무리 되었다.

▲ 25일 오후, 상떼지디오 본부 건물에서 열린 회의


이번 회의를 주최한 상떼지디오(Sant'Egidio)는 1998년부터 사형제 폐지 국제 캠페인 “생명을 위한 도시(Cities for Life)"를 로마, 베를린, 마드리드, 마닐라 등 전 세계 1,000여개 도시에서 효과적으로 펼쳐왔고 이탈리아 정부와 교황청에 영향력이 큰 정의평화운동 단체이다. 1968년 18살 청년이 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살리고자 친구들과 시작한 이 공동체는 그 청년이 60살이 된 지금도 매일 저녁 8시 30분 소박한 성가대의 음악으로 시작하여 산타마리아 성당에서 30분간 기도모임을 갖는다.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소박하고 실천 가능한 이 기도회는 매일 저녁 소통과 만남의 장이 되어 사제뿐 아니라 누구나 그곳에서 자신과 이웃의 삶을 나누고 소통한다. 텅 비어가는 유럽교회를 그러려니 바라보던 나에게 그 기도모임은 충만한 삶의 공동체로 다가왔다. 수평성과 자율성의 힘이라고 할까. 그들은 또한 비둘기(Dove)라는 집 없는 자들을 위한 급식소와 이민자를 위한 언어학교를 전국에 운영하고 있다. 집 없는 자, 배고픈 자는 지도에 표시된 비둘기를 찾아가 먹고 씻고 잠을 잘 수 있다. 이들이 민간단체이면서 이렇듯 전 세계 법무부장관들을 불러 모아 대회를 여는 힘인지도 모르겠다. 가난한 자, 죄 있는 자 다함께 살아 보자고.

 


상떼지디오 홈페이지 : http://www.santegidio.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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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 http://www.santegidio.org/index.php?idLng=1064&pageID=1&res=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