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주권' 보다 인민의 자기결정권이 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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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주권' 보다 인민의 자기결정권이 우선
  • 천주교인권위
  • 승인 2009.08.1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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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보편성과 국가주권이라는 모순?
12호 | 2009년 8월 13일  
‘한국 정부가 이라크 전쟁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미국 정부에게 전쟁을 중단할 것을 권고한다면 이는 미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일까? 유엔이 소속 국가들의 인권침해 상황에 대해 우려를 표한다면 그건 개별 국가들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일까? 보편주의와 국제주의를 본래적 가치처럼 여기고 있는 인권의 특성과 국가주권은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북한은 “인권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권리는 자주권”이라고 <로동신문> 등을 통해 줄곧 주장해왔고, 이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국가주권(‘국권’)의 우위를 강조하고 있다.(<로동신문> 2008년 9월 26일자 “<인권옹호>의 간판 밑에 감행되는 인권유린범죄”)


주권, 자주권, (개인적·집단적) 자기결정권

주권과 자주권을 좀더 보편적인 인권의 언어로 말하면, ‘자기결정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은 ‘자주권’을 여러 정치·사회적인 맥락에서 의미를 발전시켜왔지만, 기본적으로는 자기결정권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자기결정권은 보통 개인의 권리와 집단의 권리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개인이 집단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개인의 권리와 집단의 권리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구조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는 구분되지 않기도 하다. “구조는 행위 주체에게 행동과 판단의 근거가 되는 틀을 제공하고, 행위주체들은 자유의지적 선택을 통해 구조를 만들어간다. 즉, 개인권리와 집단권리는 상호의존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형성해 가는 것이다.”(『인권의 문법』, 조효제, 2007) 이를 ‘구조의 이중성’이라고 하는데, 구조의 이중성 속에서 개인의 결정과 집단의 결정이 조화롭게 일치하는 것이 이상적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둘이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의 결정과 집단의 결정이 다른 경우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현실 속에서 이 둘이 충돌할 경우, 집단은 (물리적·이데올로기적) 강제력을 동원해서라도 집단의 결정을 강제해왔다. 따라서 개인의 자기결정권과 집단의 자기결정권은 민주주의 제도 속에서 긴장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고,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고 긴장 관계를 민주적·인권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더 중요해진다.


민족자결권을 둘러싼 북한의 모순

전세계적인 식민지배의 역사 속에서 자기결정권은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주로 집단의 권리로서 ‘인민의 자기결정권’으로 이해되어 왔고, 이는 ‘민족자결권’과 동일시되어 왔다. 집단의 가치를 개인의 가치보다 우선시하고, 또 ‘인민’을 ‘민족’과 동일시하려는 가부장·국가주의적 권력 정치가 작동했기 때문이다. 외세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인민의 집단적 저항은 ‘민족자결권’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실제로도 이 저항은 너무나도 정당했지만, ‘민족자결권’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개인과 (계급적) ‘인민’이 삭제되고 ‘민족’이라는 추상적이고 단일한 의미만 남은 후, ‘민족자결권’은 모든 민족은 자신의 국가(체제)를 가질 수 있는 것으로만 한정해서 해석되어 왔다. 하지만 이후 여러 논쟁 속에서 민족자결권을 포함한 집단적 권리로서의 자기결정권은 “① 인민의 국가 설립 권리(전통적인 민족자결권) ② 국민이 정부 형태를 결정하고 국정에 참여할 권리 ③ 국가의 영토 보전 권리 및 내정 불간섭 권리 ④ 국가 내 또는 국가 간 영토에 걸쳐 있는 소수민이 경제적·문화적 또는 기타 자율성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 ⑤ 국가의 문화적·사회적·경제적 발전 권리”(『인권의 문법』, 조효제, 2007)와 같이 이 모두를 포함하는 권리로 정리되어 왔다. 이와 같이 민족자결권이 다양한 의미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발전하면서 국제정치 질서 속에서 일부는 인정되었지만, 일부는 인정되지 않는 모순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북한 역시 이러한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북한은 자주권을 가장 중요한 권리로 주장하며 민족자결권을 주요하게 내세우고 있지만, 중국으로부터 티벳인들의 자주권에 대해서는 오히려 중국 중앙정부에게 손을 들어주었다.(<로동신문> 2008년 5월 14일자 “부당한 간섭, 응당한 배격”) 또한 <로동신문>은 중국 올림픽 성화 봉송 기간 동안 진행된 티벳인들과 이에 연대하는 여러 인민들의 저항을 ‘분리주의’ 정도로 폄하하며,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의 말을 인용해 ‘티벳독립운동’에 반대하는 북한의 입장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로동신문> 2008년 5월 1일자 “올림픽 헌장과 리념에 대한 엄중한 도전”) 민족자결주의와 국가주의의 모순과 충돌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국가주권이 아니라 인민의 자기결정권으로 인권의 보편성 실현을

‘국가주권’은 한 국가가 다른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주적으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는 집단적인 권리로서의 인민들의 자기결정권이 국가라는 체제를 중심으로 국가간 질서 속에서 표현된 말로 볼 수 있다. ‘국가’를 집단의 역사적이고 특정한 형태라고 했을 때, 국가주권 역시 집단의 자기결정권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개인과 집단이라는 구조의 이중성이 충돌할 수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이라면, 국가의 결정 역시 어떤 형태로든 개인의 결정과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 아니, 오히려 ‘충돌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을까. ‘집단과 개인은 하나’라는 말은 실제로는 집단과 개인의 조화로운 일치를 보여주기 보다는 집단의 이름으로 개인을 억압해온 현실을 가리기 위해 이용된 경우가 많았다. 국가가 항상 모든 인민을 대표할 수는 없다. 국가가 특정 계층화되었을 때, ‘국가’라는 특정 계층·계급의 이해와 다수 인민들의 이해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인권의 항목에서 국가주권보다 (개인적·집단적) 인민의 자결권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가가 인민들을 대표할 수 없다면, 국가주권과 인권의 보편성은 충돌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국제사회에서 다른 국가의 인권침해 상황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어떠한 것도 ‘국가주권 침해’ 혹은 ‘내정 간섭’이라는 반발을 낳고 그 결과 해당 국가 내에서의 인권침해 사실은 가려지는 결과가 발생하기도 한다. 물론 국제정치 속에서는 인권에 대한 언급이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경우도 많았지만.

국가가 주권을 침해당하지 않고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개인적·집단적 인민들의 결정이 국가의 결정으로 투명하게 모아진다면 국가 차원의 자기결정권(주권·자주권)은 침해되지 않아야 할 당연한 권리이다. 하지만 모순은 국가가 인민을 배신하는 순간 발생한다. 국가주권과 인권의 보편성을 충돌하는 것으로 여기고 싶어 하는 욕망은 억압받는 인민들의 욕망이 아니라 인민들을 억압하는 국가의 욕망일 뿐이다. 북한 인민들의 자주적 권리는 당연히 존중되어야 한다. 오랜 시간 동안 군사적 위협과 경제적 봉쇄에 맞서온 북한의 역사를 생각해볼 때 이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권리로 인식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북한 역시 국가의 자주권, ‘국권’을 가장 중시하면서 인민들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하거나 억압하려고 하지는 않았나. 북한이 주장하는 바처럼 인민들의 결정이 국가의 결정과 동일한 경우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인민들의 결정과 국가의 결정이 동일하지 않는 순간 국가는 인민들을 배신하게 된다. 북한 역시 다른 여느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국가와 인민이 항상 합치될 거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국가와 인민이 충돌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현실적 전제로 두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현실을 인정하면서 국가와 인민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는 지점에 대한 정책을 준비하는 것이 국가의 임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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