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엔 사람이 산다…아직도, 그리고 앞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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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엔 사람이 산다…아직도, 그리고 앞으로도
  • 천주교인권위
  • 승인 2009.09.09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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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순천향대학병원 200일의 기록
고 이상림 열사의 손자 동원이는 지난 겨울방학 때부터 여기, 순천향대학병원 영안실 4층이 집이다. 중학교 3학년 새학기를 여기서 시작했고 여름방학을 여기서 보냈다. 그리고 오늘 2학기 개학식 등교를 또 여기서 했다. 고 윤용헌 열사의 작은 아들 상필이와 고 이성수 열사의 작은 아들 상현이도 여기서 학교를 다니고 있지만 녀석들은 고등학생이라 그래도 마음이 좀 덜 쓰인다. 한창 사춘기라 예민할 열여섯 살짜리 소년에게 할머니, 아버지, 작은엄마랑 24시간 동안 한 공간에서 지낸 7개월은 어떤 시간이었을까? 게다가 다른 네 열사들의 가족들과 전철연 식구들까지 한공간에서 어우러져 살고 있으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닐 텐데 '가출'처럼 큰 사고 한번 안치고 여전히 여기서 함께 먹고 자는 것만으로도 대견하고 고마운 일이다.

용산참사가 발생하기 전에도 공부에 취미가 크게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순천향병원으로 거처를 옮기고 나서는 책 한 번 제대로 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년에 가고 싶다는 용산공고에 갈 수 있을지 동원이도 나도 불안하다. 태어날 때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던 상필이는 지난 5월 서울대학병원에서 다른 한쪽 눈의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한달동안 울트라맨처럼 양쪽 눈에 알루미늄 고글을 쓰고 있느라 학교도 두달 가까이 가지 못했던 탓에 성적이 많이 떨어졌다. 중간고사에 불참해서 기말고사 점수의 90%를 중간고사 점수로 계산하기로 했다는데 점수가 영 신통치 못해 하위권 성적을 면하지 못했다.

▲ 용산 참사 유가족들이 참사 이후 200일 넘게 보낸 서울 용산 순천향대병원 영안실. ⓒ프레시안


영안실에서 학교 다니는 아이들

이 녀석들을 여름 방학 중 양평이나 남양주에 있는 '스파르타식' 기숙학원에 보낼까 가족들과 진지하게 의논하고 학원을 알아보기도 했지만 4주에 198만 원이라는 엄청난 학원비에 허탈한 웃음만 짓고 말았다. 그러던 중 매일 용산참사 현장 생명평화미사에서 봉헌초를 판매하며 봉사하시던 모니카 자매님께서 반가운 제안을 해 주셨다. 대학교 3학년인 자매님의 따님이 두 녀석들의 무료 과외 선생님을 자청해 준 것이다. 며칠 후 순천향대학병원 영안실에 자매님과 따님이 방문했다.

한 눈에 보아도 얌전한 모범생 같은 따님을 보고 우리 아이들이 장난꾸러기인데다가 몇 개월째 공부와 담을 쌓았던 녀석들이라고 걱정 섞인 인사말을 건낸 내게 반에서 꼴지하던 고1 학생을 한 학기만에 12등으로 끌어올린 적이 있다며 걱정말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그날부터 일주일에 세 번 하루 3시간씩 두 녀석의 공부를 책임져 주고 있다. 과외 선생님이 오시고 나서 녀석들은 저녁에 TV를 보는 대신 문제집을 꺼내 들여다보는 시간이 부쩍 늘어났다. 이불 깔고 뒹굴면서 TV 보는 것이 가장 큰 취미였던 동원이는 이제 선생님이 오시기 한시간 전부터 샤워도 하고 미리 문제집도 꺼내보면서 예습을 한다. 원래 조용하고 모범생인 상필이는 2학기 때는 반 10등을 다시 탈환하겠다고 다짐을 한다.

<무한도전>이나 <1박2일>을 보면서 깔깔대고 웃다가도 열사분들께 상식(上食·상가(喪家)에서 아침저녁으로 영연 앞에 올리는 음식)을 올려야 할 시간이 되면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목덜미 칼라가 낡아서 헤진 와이셔츠를 챙겨입고 지퍼식 검은 넥타이를 메고 영정 앞에 절하고 향을 피운다. 현장에서 용역 직원들이나 경찰과의 충돌로 만신창이가 된 어머님들이 들어오시면 "힘들었지 할머니, 식사하셨어요?"라며 어른스레 위로를 하는 동원이와 어쩌다가 어머님들끼리 말다툼이라도 하면 엄마 손을 꼭 잡고 "엄마 그만하시고 참으세요" 나지막히 한 마디 건네는 상필이를 본다. 그 참혹한 참사 후 7개월, 세상은 달라진 것이 없고 담벼락 같은 이 정권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지만 아이들은 이렇게 자랐다. 아니 성장했다. 계절이 세 번 바뀐 지난 7개월은 우리 아이들이 어른스러워 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니 사실 이 녀석들이 이곳 식구들 중 누구보다 낫다.

오랫동안 일식집을 운영하셨고 참사 직전까지 삼호복집을 운영하시던 고 양회성 열사의 두 아들 종원이와 종민이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일식조리사였던 아버지를 이어 일식 조리사를 꿈꾸던 두 친구는 6개월 넘게 칼을 잡지 않아 손이 굳어간다고 걱정을 하던 중 외삼촌의 소개로 다시 일을 시작했다. 둘째 종민이는 아침 7시에 출근해서 밤 11시가 넘어서야 순천향대학병원 영안실로 돌아온다. 3주간 일하면서 살이 7킬로그램이나 빠졌단다. 좋아하는 소주 한잔 마실 시간 없이 들어오자마자 씻고 바로 잠드는 종민이를 보며 잠이라도 한번 이불 펴고 제대로 마음 편히 자고 나가면 좋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 "계절이 세 번 바뀐 지난 7개월은 우리 아이들이 어른스러워 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프레시안


▲ ⓒ프레시안


몸도 마음도 아프지만

용산참사 이후 언론에 가장 많이 등장했고 다큐멘터리 영화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에서도 '여주인공' 역을 맡았던 소위 '얼짱유족' 정영신 씨는 요즘 몸과 마음이 많이 아프다. 매일 지하철을 타고 서울구치소에 있는 남편, 이충연 용산 4상공철대위 위원장의 면회를 가고 남일당 현장과 순천향대학병원 영안실을 오가느라 오랜 노점 장사로 내려앉은 무릎 관절이 바로 펼 수도 없을 정도로 아플 때도 있다. 새벽 6시 상식을 올리다가 앞으로 쓰러져 실신해서 바로 옆 순천향대학병원 응급실에 실려가 악성 빈혈 진단을 받기도 했다. 장염으로 배가 꼬여 고생한 후 친정에서 요양 중인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흰머리가 많이 생겨 염색을 해야겠다며 농담을 건네기도 한다. 그녀가 아픈 곳이 어디 몸뿐이랴. 시아버지를 잃고 매일 뙤약볕 아래 파라솔 하나 의지해서 매일 농성중인 시어머니를 지켜보는 일, 7개월 넘게 용산참사 때 다친 다리 치료 한번 제대로 못 받아서 여전히 목발을 짚고 면회실로 나오는 남편을 매일 마주하는 일, 은행대출을 받고 친지들에게 돈을 빌려 꾸민 그녀의 희망, '호프집 레아'가 '갤러리 레아'로 '촛불방송국'으로 변모해가는 모습을 보는 일도 그녀에게 마음 편한 일만은 아니었으리라.

이곳 순천향대학병원 영안실에는 이들 외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많이 있다. 가난해서 쫓겨나는 사람들이 있고 억울하고 답답한 사연을 목 터져라 외쳐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6개월째 땅바닥 한번 밟아보지 못하고 순천향대학병원 영안실 4층에서 '공중생활'을 하고 있는 수배자들이 있다. 7개월 동안 영안실 1층 로비와 4층 통로에서 은박지 한장 깔고 밤낮없이 2교대로 규찰을 서고 있는 전철연 회원들이 있다. 또, 이곳 영안실 냉동고에는 꿈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소박한 바램들을 꽉 막힌 이 세상에 호소하려다 눈도 못 감고 세상을 떠난 다섯 분이 계시다.

먼저 간 남편을 그리워하며 그들의 정당함과 죄 없음을 밝히기 위해 거리를 선택하고 공권력과 싸우다가 팔이 부러지고 머리채를 잡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수모를 당해도 눈물마저 말라버려 흘릴 눈물도 남지 않은 다섯 어머니들이 있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추스릴 시간도 없이, 전국을 순회하며 오직 용산참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그 어머니들 걱정에 맘 편할 날 없는 여덟 아들들이 있다. (고 이상림 열사만 아들 둘과 딸을 두었고 네분 열사들은 아들만 둘을 두셨다. 열명의 아들 중, 이상림 열사 차남 이충연씨는 구속수감 중, 한대성 열사 장남 한승균씨는 군복무 중이다.)

그리고 나처럼 각자의 일을 뒤로 하고 7개월이 넘게 이곳으로 출퇴근을 하고 여기서 세끼 밥을 먹고 늦으면 자고 글을 쓰고 일을 하는 10여명의 영안실 붙박이들이 있다. 순천향대학병원 영안실과 이웃한 남일당 용산참사 현장에는 생계의 터전이 하루아침에 철거되어 길거리에 나 앉아 있는 용산 4구역 세입자들이 있고 매일 생명평화 미사를 봉헌하며 유가족들과 철거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천막을 치고 생명평화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문정현 신부를 비롯한 천주교 사제들도 있다. 미약한 힘이고, 고작 마음 한 켠을 나누는 일이지만, 8개월이 다 되도록 매일 촛불을 들고 용산참사 현장을 지키고 있는 이 땅의 양심들이 있다.

▲ 가난해서 쫓겨나는 사람들이 있고 억울하고 답답한 사연을 목 터져라 외쳐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프레시안


집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

2009년 설 연휴를 삼 일 앞두고 발생한 용산참사는 여름이 지나 조석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으로 지속되고 있다. 한 달, 두 달, 백일, 6개월, 200일, 7개월, 이렇게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지만 철거민 다섯 명과 경찰 한명을 죽음으로 몰아간 이 참담한 사건 앞에 누구하나 잘못했다는 사람, 책임지겠다는 사람이 없다. 시간이 많이 지났고 세상의 관심에서 멀어진다고 용산참사의 문제를 이렇게 덮어 둘 수는 없다. 용산참사 발생에 대한 정부 차원의 사과와 재발방지를 위한 책임있는 대책이 뒤따라야한다. 이 무모하고 오만한 공권력이 만들어낸 끔찍한 피해 역시 반드시 보상해야할 것이다. 돌아가신 다섯 분의 명예를 회복하고 정성을 다해 장례를 치루고 좋은 곳에 모시는 일도 미룰 수 없다. 서울을 비롯한 전 국토에서 무문별하게 진행되고 있는 재개발과 뉴타운 사업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아직도 용산에, 왕십리에, 가재울에, 사당동 정금마을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009년 이땅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이야기하자면 용산참사 문제를 피해 갈 수는 없다. 가난한 사람들과 한 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을 못 견뎌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본래 살던 주민의 20%만이 정착할 수 있는 가진 자들만을 위한 재개발이 진행되는 한, 국민을 섬기지 않고 군림하는 정부와 공권력이 있는 한, 우리는 이렇게 계속 아프고 상처받아야 할지 모른다. '집'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라는 말이 절절한 호소가 되어 귓가를 맴돈다. 이번 싸움은 정말 꼭 이기고 싶다.

 

7개월 병원생활, 그 이후…"믿음은 먼지만큼도 변치 않았다"

이 글을 보내고 며칠 후, 박래군, 이종회 용산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 두 명과 전철연 남경남 의장 등 3인의 수배자들이 7개월 간의 '공중생활'을 마치고 거처를 명동성당으로 옮겼다. 성당과 주임신부의 배려로 성당 영안실에 기거할 수 있게 돼 많은 사람들에게 안도와 기쁨을 주었다. 명동성당에 몸을 맡기게 된 이들이 앞으로 머물 곳이 또 영안실이라는 것이 조금 서글프기는 하고, 3년 후 다음 대통령 선거 때나 되어서야 어떻게 그 삼엄한 경비를 뚫고 순천향대학병원 장례식장을 빠져 나왔는지 알려주겠다는 세 명의 잘난 척이 야속하기는 하지만 이들의 "탈출"로 용산범대위의 투쟁과 대정부 협상은 더욱 힘을 받게 되었다.

이제 9일 오후부터 용산참사 유족들은 순천향대학병원 장례식장 생활을 정리하고 용산참사 남일당 현장에서 전철연 세입자들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사제들과 함께 기거하게 될 것이다. 동원이, 상필이, 상현이는 앞으로 영안실 대신 故 양회성 열사께서 운영하시던 '삼호복집'에서 등하교를 할 것이다. 장염이 완쾌된 정영신씨는 편두통이 심해져 정기적으로 진료를 받고 있고 여전히 일식집에서 일하는 종민이는 살이 3킬로그램이나 더 빠졌다. 규찰을 서던 전철연 식구들은 이제 각자의 지역과 현장 투쟁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순천향대학병원 영안실 붙박이들'은 '명동성당 영안실'로 근무 현장을 변경했다. 상필이와 동원이의 무료과외 선생님은 홍콩대학으로 교환학생을 가면서 사촌오빠를 자신의 자리에 '꽂아'놓고 갔다. 동원이는 이제 예습은 하지만 선생님 오신다고 '샤워' 따위를 하지는 않는다. 구속 철거민들의 재판은 연일 파행을 거듭했지만 다음 공판부터는 새로 선임된 변호인단과 함께 법정안에서 진실을 밝히는 투쟁을 하게 될 것이다.

짧은 시간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집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라는 깨달음, 묵묵부답인 정부, 시민없이 진행되는 서울시의 재개발, 유가족에게까지 폭력을 휘두르고 몇시간동안 감금 하는 경찰, 여전히 은닉 수사기록 3,000쪽을 공개하지 않고 있는 비열한 검찰, 장례도 못 치른 냉동고 속의 다섯 열사들… 이런 것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이땅 양심들이 전해오는 따뜻한 마음, 진실을 밝히고 열사들의 명예를 밝히겠다는 우리들의 끈질긴 의지, 그리고 반드시 이 싸움은 우리가 이기고 말 것이라는 태산같은 믿음, 먼지만큼도 변하지 않고 다 그대로다.

   
▲ 반드시 이 싸움은 우리가 이기고 말 것이라는 태산같은 믿음, 먼지만큼도 변하지 않고 다 그대로다. ⓒ프레시안

 

 

 

* 이 글은 인권재단 '사람'이 발행하는 격월간지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9·10월 호에도 실렸습니다.
/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프레시안>
기사입력 2009-09-09 오전 10:59:36
http://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908164904&section=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