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혐의 유학생 어떻게 보안사에서 일하게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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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 혐의 유학생 어떻게 보안사에서 일하게 됐나
  • 천주교인권위
  • 승인 2009.12.21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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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위 '김병진씨 인권침해 결정문'을 통해 본 '80년대 보안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지난 1일 일본에 있는 김병진(55)씨에게 '보안사의 인권침해' 사실을 인정하는 '진상규명' 결정 내용을 통보했다(12월 6일자 관련기사 참조).

진실화해위는 26년 전 보안사(현 기무사의 전신)가 불법구금, 구타 등 가혹행위, 허위사실 발표 등을 통해 김씨의 인권을 중대하게 침해했다면서 국가의 사과와 명예회복 등을 주문했다.

김씨는 <오마이뉴스>와 한 국제통화에서 "기무사령관은 나와 내 가족 앞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성의를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배상'보다 '기무사의 사과'를 먼저 요구할 만큼 '80년대 보안사의 기억'은 그를 분노하게 만든다.

김씨가 진실화해위로부터 받은 '재일동포 김병진 인권침해 사건 진실규명 결정문'은 그가 왜 분노할 수밖에 없는지와 기무사로 이름을 바꾼 보안사의 실체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83년 7월 9일, 재일교포 유학생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다

김씨는 일본 효고 현에서 한국 국적 재일동포 3세로 태어났다. 일본계 소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73년 관서학원대학 문학부에 입학했다. 하지만 1977년 학교를 중퇴한 뒤 '서울의 봄' 시기였던 1980년 3월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2학년에 편입했다.

1983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직후 같은 대학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에 입학했다. 또한 일본어와 한국어가 유창했던 그는 같은 해 6월부터 삼성종합연수원에서 월 80만원을 받으며 일본어 강사로 일했다.

그렇게 안정적인 유학생활을 꾸려나가던 1983년 7월 9일 오후 3시. 김씨는 서울 관악구 신림동 집 앞에서 4명의 보안사 수사관들에 의해 검거됐다. 진실화해위 결정문에 나오는 그의 증언이다.

"7월 9일 토요일 오후 2시경 서울시 신림5동 집 앞에서 포니2를 타고 온 4명이 '당신 후배가 데모하다가 잡혔다, 잠깐 가서 신원확인만 하겠다'며 차에 태워 서빙고 분실로 연행했다."

김씨는 서빙고 보안사 분실로 끌려갔다. 그의 검거와 연행은 보안사 대공처(3처) 수사과(2과) 수사2계에서 주도했다. 보안사 수사기록 중 '간첩검거통보'(83년 7월 18일자)는 김씨의 연행 배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83. 6. 15 협조자로부터 교포학생이 '한국 대학생들은 데모를 너무 미지근하게 한다'는 등 학생 데모를 은연중 유도하는 언동을 하여 모국 유학생으로서 필요 외의 문제교회 출입 및 문제인사들을 접촉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 내사타 검거하였음."

김씨가 검거되면서 그의 아내 강영미씨도 보안사 수사관의 감시를 받았다. 강씨는 당시 아들(김겨레씨)을 낳은 지 1개월밖에 안된 산모였다. 강씨의 증언이다.

"그날부터 여수사관들이 함께 동거하며 전화가 오면 감시하고, 시장에 가거나 따라오면서 감시하는 등 완전히 감금되어 감시받는 상황이 되었다. 수사관들이 종이 쇼핑백을 놔두고 갔기에 내가 기분이 너무 나빠 발로 차고 나서 신발장 안에 처박아 두었다. 나중에 보니까 그게 도청장치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엘리베이터 고문'... "쥐도 새도 모르게 한강물에 흘려버린다"

보안사는 김씨를 '재일대남공작지도원'인 서성수씨에게 포섭된 '모국 유학생 간첩'으로 간주했다. 그를 불법구금하고 수사하는 과정에서 전기고문, 엘리베이터 의자 고문, 구타 등 가혹행위가 있었다. 김씨는 당시 받은 고문을 이렇게 자세하게 증언했다.

"(보안사 수사관들이) 나를 세운 상태에서 (수사2계장인) 김용성이가 양팔을 잡고 길이 1m50cm 정도, 굵기가 지름 10cm 이상 되는 나무 몽둥이로 엉덩이, 등, 허벅지 등 전신을 수십 차례 때리고, '너 이 새끼 죽여버리겠다' '니 마누라를 윤락녀로 만들고 니 자식은 애비도 모르게 만들어 고아원에 보내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실'로 끌고 갔다. 엘리베이터실은 가로 세로 4m, 3m 되는 방이었는데, 이용실에 있는 의자 같은 게 있었고, 주위 바닥에는 수갑과 휴지통 등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의자에 앉은 상태에서 팔걸이에 양쪽 팔을 묶고 (수사관인) 이○○이가 양쪽 집게 손가락에 전기 코일을 감고 야전용 발전기 같은 걸 돌리며 '간다, 간다'라고 말했다.

발전기 레바를 돌리는 순간 나는 정신을 잃어 버렸다. 나중에는 의자가 묶인 상태에서 바닥이 아래로 꺼졌는데 아주 캄캄하고 냉기가 있고 음습한 지하였다. 그때 이○○이가 위에서 '거기는 한강으로 통하는 곳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한강물에 흘려버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보안사 수사관들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부인했다. 최아무개씨는 "서빙고에서는 조금 큰 조사실을 'VIP실'이라고 부른다"며 "VIP실에 엘리베이터처럼 상하로 조작하는 의자는 전혀 없었다"고 진술했다.

다만 또다른 수사관이었던 고아무개씨는 "서빙고 분실에 2층에서 1층으로 의자가 내려가는 시설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보안사 조사가 끝난 뒤 안기부의 '정보사범 신병처리 조정'에 따라 83년 10월 김씨는 서씨와 함께 국보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넘겨졌다. 검찰로 송치되기 이틀 전인 10월 19일 언론들은 보안사의 발표를 받아 '간첩 4개망 16명 검거'라는 제목으로 크게 보도했다. KBS와 MBC는 보안사 발표 당일 저녁 각각 '조총련의 붉은 마수'와 '조총련의 검은 그림자'라는 특집프로그램을 내보냈다.

김씨는 "그때 MBC, KBS 등 방송사 기자들이 와서 서빙고 분실 뒷마당에서 김용성의 지시로 강제로 인터뷰를 했다"며 "학생데모를 선동하고 간첩혐의를 시인하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공안검사' 고용주는 왜 공소보류 처분을 내렸나?

흥미로운 사실은 김씨의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한 검사가 현재 '친북인명사전'을 작성하고 있는 고영주 현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점이다. 고 위원장은 현대사의 격동기였던 80년대와 90년대에 대검과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근무했던 '대표적인 공안통 검사'다.

그런데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였던 고영주 검사는 공소보류 처분 승인을 요청했다. '공소보류'란 국보법 위반 피의자의 범죄 혐의가 충분하더라도 범행동기와 결과, 범행후 정황 등을 헤아려 검사가 공소제기를 보류하는 것을 말한다.

고영주 검사는 '공안사범 공소보류 처분 승인 품신'에서 "범증은 충분하나 죄과를 깊이 뉘우쳐 전향하고 간첩 서성수를 검거하는 데 기여한 공이 크기 때문"이라고 기재했지만, '모국 유학생 간첩 혐의'를 받았던 김씨가 공소보류 처분을 받은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를 보안사에 강제근무시키기 위한 조치였다는 얘기다.

김씨는 84년 1월 1일부터 보안사 대공처(3처) 수사과 소속 6급 군무원으로 임용됐다. 그는 대공처 수사지도계 첩보분석반에게 일하며 주로 첩보분석과 통역을 맡았다. 기무사 존안 인사기록카드에는 '사령부 3처 소속. 84. 1. 1. 6급 임용. 84.1.4 3처 수사관 보직.86. 1. 31. 면직(의원)'이라고 기재돼 있다.

당시 보안사 수사관이었던 이아무개씨는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김씨의 보안사 강제근무 배경을 이렇게 해명했다.

"당시 김용성 계장이 한학동(재일한국학생동맹) 관련자 등을 수사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재일사건 관련 통․번역이 필요해서 김병진을 공소보류한 후 보안사에 근무토록 제안하고, 과장님, 처장님 등과 협의해서 결정했다."

또다른 수사관 최아무개씨도 "(주된 업무는) 일본 관계 첩보 분석과 통․번역이었다"며 "김용성 당시 수사2계장이 의욕을 가지고 추진했던 것으로 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당시 보안사 대공처 수사과 수사2계장이었던 김용성씨는 진실화해위의 두 차례 출석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김병진씨가 보안사에 근무하도록 강요했던 그는 지난해 12월 이후 출국해 현재 미국에 체류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병진씨는 "보안사에서 내 업무는 첩보분석이었고, 대공처 수사과 수사1계 내근직 첩보분석반이 내 소속이었다"며 "예하 보안부대에서 올라오는 첩보를 분석하거나 때때로 일본어 문서 번역, 통역, 도청테이프 번역 일을 하기도 했다"고 진술했다.

88년 <보안사> 펴낸 뒤 입국금지 당해... "5공청문회 증언 막으려고"

김씨의 부인 강영미씨는 당시 "보안사에 근무하면 차라리 이혼을 하겠다"고 강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보안사 근무를 거부하기는 어려웠다. 그는 월 14만원을 받으며 84년 1월부터 86년 1월까지 보안사에서 근무했다.

김씨는 2년여 동안 여러 건의 재일교포 간첩수사와 고문장면을 직접 보았다. 보안사는 재일교포 유학생들을 간첩혐의로 불법구금하고, 폭행하고, 전기고문을 가했다.

김씨는 "서울대와 연세대 교포 유학생 대상 간첩조작 계획인 '연서계획'에 따라 수사3계에서 간첩사건을 조작했다"며 "재일교포 사업가인 채아무개씨가 수사2계 직원으로부터 구타당하고 오줌싸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김씨는 둘째 아이의 출산을 핑계로 퇴직을 신청했고, 퇴직이 허용된 직후인 86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가 목격한 '80년대 보안사의 실체'는 88년 발행된 <보안사>(소나무)에 고스란히 기록됐다.

<아사히신문> 논픽션 수상작이었던 <보안사>는 88년 6월 일본에서 처음 발간됐고, 두달 뒤 소나무 출판사에서 한국어로 번역돼 출판되었다. <보안사>는 보안사에서 직접 근무했던 사람이 80년대 무소불위의 조직이자 '5공화국의 산실'인 보안사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기록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보안사> 출판은 출판사 압수수색, 8000부 압수, 출판사 사장 지명수배, 직원 2명 연행 등의 '수난'으로 이어졌다. 또 저자인 김씨는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으로 기소중지당했다.

김씨는 지난 2004년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당국에서 자신을 입국금지시킨 이유와 관련 "겉으론 <보안사> 출판 때문이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며 "88년 5공청문회 증인으로 서는 걸 방해하기 위해 기소중지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내 입국조차 금지당했던 김씨는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인 2000년 5월에서야 고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86년 2월 보따리 하나만 들고 황급히 일본으로 출국한 지 15년 만이었다.

진실위, '인권침해 진실규명' 결정... "'과거사 청산운동'을 펼쳐야"

그리고 24년 만인 지난 1일 진실화해위로부터 "국가는 보안사가 민간인 신분의 김씨를 연행해 불법구금과 가혹행위를 가한 점과 피의사실 공포로 신청인과 가족, 다수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을 침해한 점, 회유와 협박으로 김씨를 보안사에 근무하도록 강요한 점 등에 대하여 김씨 및 관련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피해와 명예를 회복시키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진실규명' 결정문을 받았다.

지난 12일 한국에 들어온 김씨는 "기무사를 방문해 기무사령관의 사과를 받아내고 싶은 심정"이라며 "조만간 군의문사위 활동도 끝나고 진실화해위원장이 보수 인사로 바뀌었는데 다시 '과거사 청산운동'을 펼쳐야 할 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