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타결의 주역은 정운찬도 오세훈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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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타결의 주역은 정운찬도 오세훈도 아니다
  • 천주교인권위
  • 승인 2010.01.02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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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범대위 협상대표의 글] 오늘은 용산참사발생 347일째일뿐
▲ 1월 20일 새벽 서울 용산구 신용산역 부근 재개발 지역내 5층 건물 옥상에 설치된 철거민 농성용 가건물을 경찰특공대가 강제진압 하는 과정에서 불길에 휩싸인 가건물이 무너지고 있다. ⓒ 권우성


2009년 1월 20일 새벽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 철탑 망루에서 여섯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십 년 넘게 한자리에서 장사를 하며 작은 아들 내외와 함께 레아 호프를 경영하던 고 이상림, 평생을 일식집 주방에서 일하면서 모은 재산을 모두 털어 조금 먼 미래에 두 아들과 함께 번듯한 일식당을 운영하리라는 꿈을 품고 있던 고 양회성, 자상한 아버지이자 따뜻한 남편, 궂은일은 언제나 묵묵히 먼저 나서던 사람 고 한대성, 철거투쟁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나타나서 따뜻한 손과 부지런한 발로 누구보다 앞서 싸우고 동료들에게 힘을 주던 고 윤용헌, 십수년 전 건설자본에 의해 이미 쫓겨난 적이 있어 두 번은 빼앗길 수 없다며 천막생활을 하면서도 아내와 함께 마시는 소주 한 잔에 행복해 하던 고 이성수, 그리고 경찰청장에 내정된 당시 서울경찰청장의 무모한 진압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크레인에 매달린 콘테이너 박스를 타고 진압작전에 나섰던 경찰특공대 고 김남훈.....

이렇게 저마다 다른 사연을 가지고 저마다 다른 꿈을 꾸며 살아가고 있었던 여섯 사람. 그가 철거민이었던 경찰이었던 간에 먹고 살기 위해 그 추운 겨울 새벽 남일당 빌딩 옥상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잔혹한 현실을 살고 있었다는 사실은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르겠다. 돈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해왔던 건설자본과 자본의 달콤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21세기의 권력은 이렇게 1년 전 용산에서 여섯 명의 국민을 죽음으로 인도했다. 아니 그들은 여섯 명을 죽였다. 이 '죽음'과 '죽임'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고 기억에서 내려놓으려고 애를 써도 잊혀 지지 않을 것이다.

용산참사 문제가 극적으로 타결되었다는 소식은 모든 언론의 첫머리 기사를 장식했고 국민들은 이제야 냉동고에 모셔둔 다섯 분의 장례를 치를 수 있다는 사실을 반가워했다. 정운찬 국무총리는 서울시에 공을 돌리는 척하면서 자신이 용산문제 해결을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알아달라며 애틋한 표정으로 일관했고 오세훈 서울시장은 사회적 난제를 앞장서서 해결한 장한 일꾼의 모습으로 종교인들의 손을 잡고 승전보를 알리 듯 기자들 앞에 섰다. 남일당 현장도 백여명의 기자들이 골목길을 가득 메웠고 오열하는 유족들을 카메라에 담느라 여념이 없었다.

유족들은 진상규명과 이명박 대통령의 사과가 없는 '반쪽짜리 타결'이라고 했고 용산범대위는 민중의 생존권과 정권의 독재에 맞서 계속 투쟁하겠다고 했다. 어떤 신문은 '용산의 승리'라고 표현했고 어떤 신문은 '시신을 인질로 법치주의를 무너뜨렸다'고 했다. '보상금액이 40억'이니, '수배자들의 불구속 수사를 약속했다'느니 하는 어처구니없는 기사들도 인터넷을 달구었다. '용산문제 해결의 숨은 공신 정운찬 총리', '종교계의 노력으로 급진전', '오세훈 시장의 결단' 등 알 수 없는 제목의 기사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용산참사 유가족들과 용산 4구역 세입자들로부터 협상과 장례를 비롯해 이후 이행절차에 대한 일체의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들 중 한사람으로 직접 서울시와 용산구청 관계자들을 20회 이상 만나며 협상을 직접 진행했던 사람으로서,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일들이 있다.

나는 왜 정부부처 사람을 만나지 못했나

용산참사 문제가 발생하고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자신이 해결해 보겠다고 나섰다. 대표적으로 야당 정치인들과 종교인들이 나섰다. 용산범대위나 유족들은 만나지도 않겠다는 서울시와 정부의 태도에 답답해하던 차에 유력한 인사들이 나서서 해결해보겠다는 말에 기대를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 부처의 그 누구도 '나'를 포함한 협상대표들을 만나지 않았다. 야당의원들이 서울시장을 면담할 때도, 총리실장을 만날 때도 '우리'는 밖에서 면담결과를 전해들을 수 밖에는 없었다. 지난 8월 서울시와 용산범대위와의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보도가 되었을 때도 서울시는 한 종교단체의 성직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전달했을 뿐 직접 만나 협상을 하려하지는 않았다. 마지막에는 시한을 정해놓고 그 시간까지 답을 주지 않으면 모든 제안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을 받기도 했다.

그 이후 여기저기서 자신이 해결사가 되겠노라고 나서는 사람들은 또 생겨났지만 용산범대위 협상대표인 '나'는 정부관계자 누구에게도 우리의 요구를 직접 전달해 보지 못했다. 해결사를 자처했던 야당 정치인이나 종교인들도 이상하게도 '나'와 함께 정부관계자들을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 즈음 신임총리가 내정되었고 퇴임하는 총리가 용산문제를 정리 할 것이라는 둥, 새로 임명되는 총리가 취임직후 문제 해결을 위해 직접 나설 것이라는 둥 하는 확인되지 않은 정보들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러던 중 처음으로 서울시 관계자로부터 만나자는 제안을 받았다. 용산범대위는 고심 끝에 제안을 받아들여 서울시 관계자를 만났지만 지난 8월 종교단체를 통해 전달되었던 내용을 직접 듣는 것에 불과했다. 언론에서는 새 총리가 용산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기대 섞인 보도를 했고 취임 후 가장 먼저 용산을 찾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새 총리가 용산을 방문할 때 문제 해결을 위한 답을 들고 올 것이라 확신했다. 새로 부임한 총리로서 유족들 앞에 사과 하는 것이 부담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에 동감했고 더불어 유가족 보상과 세입자들의 생계대책을 위한 해결책도 들고 올 것이라고 부끄럽지만 기대를 했었다.

▲ 정운찬 신임 국무총리가 추석인 10월 3일 오전 용산참사현장을 만나 유가족들과 면담을 하고 있다. ⓒ 용산범대위


실제로 정운찬 총리는 취임 직후인 추석 연휴를 맞아 남일당 분향소를 방문했다. 방문 사실은 총리가 분향소에 도착하기 1시간 전에 내게 전달되었고 우리는 분주하게 총리를 맞았다.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시민들의 통행마저 가로막은 채, 총리는 분향을 하고 유족들과 마주 앉았다.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미리 써온 원고를 울먹이며 읽어내려가던 신임 총리는 "사인간의 일이기 때문에 중앙 정부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서울시가 나서서 해결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돌아갔다.

정운찬 총리의 방문은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준 것이 아니라 용산문제는 중앙 정부의 일이 아니라는 말로 유족들과 우리들의 분노만 더 키웠을 뿐이었다. 정 총리는 조문 이후 용산문제에 대해 차가운 반응으로 일관했다. 중앙 정부가 나설 일이 아니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총리가 총리실에 담당자를 정해서 연락을 하겠다고 했었지만 연락을 해 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총리실의 한 행정관이 유족 한 분에게 전화를 해서 국정감사기간이라 바쁘니 국정감사가 끝나고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긴 것이 고작이었다.

그 이후로도 '나'와 서울시 고위관계자의 만남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똑같은 제안만을 되풀이 했다. 정부의 사과가 가장 중요하다는 말에 그는 그건 서울시가 나설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했다. 두 달여 지리한 공방이 계속되었다. 용산범대위가 일부러 장례를 치르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냐는 모욕적인 말까지 들으면서도 끈을 놓치 않으려고 노력해야 했다. 자신들이 내놓는 '안'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으면서 고인들을 냉동고에 모셔두고 장례 치를 생각을 하지 않는다며 오히려 우리를 비난했다. 유가족들의 입장은 완강했다. 유가족들이 원하는 것은 보상금이 아니라 정부의 진심어린 사과였고 이러한 불행이 다시 반복되지 않게 하겠다는 대책을 듣고 싶어 했다. '도심 테러리스트'라고 매도된 고인들의 명예를 회복해야 앞으로 아이들과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바람뿐이었다.

12월이 절반 정도 지나기 시작하자 서울시는 '연내해결'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무조건 '연내장례'를 치러야 한다고 압박하더니 '연내합의'라도 하자며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우리는 총리의 사과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계속 요구했다. 보상금이 아무리 많아도 총리의 사과가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수십 번을 확인했다. 총리실과의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서울시에 요청하기도 했고, 총리가 용산 문제 해결을 위해 조언을 듣겠다며 만났다는 유력 인사들에게도 용산의 협상대표가 직접 이야기 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지만 끝까지 총리실 관계자는 한번도 만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촉박해진 서울시는 자신들이 총리실에 협조를 구하고 우리의 요구사안들을 전향적으로 검토할 테니 본격적인 협상을 시작하자고 졸라댔다. 그 이후, 12월 20일을 시작으로 총 여섯 번의 마라톤협상이 진행되었다. 알려진 것처럼 마지막 협상은 12월 29일 오후 4시부터 30일 오전 6시 40분까지 저녁식사와 최종안 검토를 위한 두 번의 정회를 제외하곤 쉼 없이 진행되었다. 용산범대위가 장례를 치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제시한 정부의 사과, 유족들에 대한 보상과 생계대책, 임시상가와 임대상가를 포함한 세입자들에 대한 보상에 합의하기까지 말로 다할 수 없는 긴장과 첨예한 대립의 시간들이 계속되었다.

언론보도 잘못된 것 있지만 바로 잡지 않는 이유

우리가 요구의 핵심이 어느 보수 신문의 이야기처럼 '돈'에 있었다면 이와 같은 결과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돌아가신 분들의 '목숨'을 어떻게 감히 '돈'으로 환산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345일 동안 상복을 벗지 못한 유가족들과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노숙을 하며 생존권을 위해 투쟁해 온 세입자들의 하루하루를 어깨에 짊어지고 협상에 임했다. 용산에서 함께 눈물 흘리고, 방패에 맞아 쓰러지고, 아무 이유 없이 경찰에 연행되었던 이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을 잠시도 지울 수 없었다.

300일 가까이 비닐 천막에서 잠을 자고 식사를 하며 진상규명과 정부사과를 촉구하는 미사를 매일저녁 봉헌하던 천주교 사제들의 그 결연한 진심이 내 심장에도 흐르고 있었다. 협상을 위해 앉은 자리는 피를 말리는 자리였다. 이제는 고인들을 편히 모셔야 할 때이고 유가족들을 일상으로 돌려보내 드려야 한다는 중압감과 다섯 유가족의 문제만이 아닌, 이땅 민주주의와 인권의 문제가 되어버린 용산의 싸움을 최소한의 성과 없이 끝낼 수는 없다는 신념이 함께 '나'를 짓눌렀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오해의 여지를 우려해 협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그 상세한 내용을 여기서 공개할 수는 없다. 언론에 보도된 내용들 중, 사실인 것도 있고 사실이 아닌 것도 있지만 구구절절 바로잡고 싶은 생각도 없다. 부족하지만 우리 모두는 승리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 너무나 많으나 용산참사 이후 대한민국의 재개발 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사실을 온 국민이 다 알게 되었고 법과 제도를 바꾸기 위해 많은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일관되게 주장하던 정부를 대표하는 총리가 책임을 느낀다고 했고 대통령에게 사과하는 일이며 제도개선을 약속하는 것을 재가 받았다고 한다. 하늘이 반으로 갈라져도 들어 줄 수 없다던 임시상가, 임대상가, 세입자들에 대한 보상이 미흡하나마 이루어졌고, 고인들을 추모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하기로 했다. 2010년을 시작하는 오늘 하루 정도는 안하무인이며 막무가내인 MB정권을 상대로 지난 1년간 우리가 참 잘 싸워왔다는 격려를 서로 나누어도 좋을 듯하다.

용산범대위 성명서에서 밝힌 것처럼 우리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의 문제를 내려놓은 것이 아니다. 앞으로 남은 구속자들의 항소심 재판과 불구속자들의 1심 재판에 충실히 임할 것이다. 이 참혹한 사건의 진상규명이 이번 정권에서 불가능하다면 다음 정권, 그 다음 정권에서는 밝혀지게 될 것이다. 인혁당 사건, 민족일보 사건처럼 수십년이 지나고 나서도 결국 그 진실은 밝혀지고 만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보아왔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밝히지만 용산의 싸움은 유족들이나 용산범대위 또는 운동권이라고 불리는 이들만이 해 온 것이 아니다. 이 싸움은 민주주의를 믿고 인권을 존중하는 이 땅의 모든 양심들이, 무자비한 공권력을 앞세운 권위주의 정권은 물론 정권보다도 더 커다란 힘을 가진 건설자본을 상대로 정면대결을 펼친 것이다. 용산의 승리는 우리 모두의 승리이고 이 땅 양심세력들의 승리이다.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이들도 국민이라는 것을, 여기에 그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일이기 때문이다.

1년간 용산참사와 함께하며 참으로 아이러니한 두 가지를 동시에 느끼며 살았다. 국민을 힘으로 억압하고 짓누르면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정권과 수조원의 이익이 눈앞에 있으면서도 서민들을 위해서는 단돈 만원도 더 내어 놓을 수 없다는 자본의 실체를 보며 절망과 참담함을 느꼈지만, 1년 동안 한결같이 용산참사와 함께 해 준 평범한 우리 이웃들의 따뜻한 마음과 옳은 일을 위해 자신을 오롯이 던질 수 있는 이들의 신념을 보며 역시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것도 느꼈다. 다음에 기회가 허락한다면 꼭 그 따뜻한 마음들과 신념의 강자들의 이야기를 더 하고 싶다.

▲ 용산참사범대위는 지난 12월 30일 낮 용산구 남일당 빌딩앞에서 긴급기자회견을 열어 '용산 참사 유가족이 정부와 협상을 사실상 타결했다' '철거민 희생자들의 장례식은 1월 9일 치르고, 정운찬 총리가 책임을 인정하고 유가족에게 유감을 표명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 권우성


고마운 분들, 그 이름을 적는 것도 벅차지만 

용산참사 다섯 분의 열사들의 장례 준비를 시작하며 지난 한해를 돌아볼 수밖에 없다. 감사한 분들의 이름을 일일이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여러 페이지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모두에게 감사하지만 우선 지난 1년간 한치의 흔들림 없이 고인들의 곁을 지켜오신 유가족들께 감사드린다. 유가족들이 흔들렸다면 절대 지금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다. 또 돌아가신 분들과 옥에 갇힌 동지들에 대한 의리를 지키며 단 한명의 이탈자 없이 끝까지 함께 한 용산 4구역 세입자들에게 감사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외로운 감옥에서 당당함과 의연함을 잃치 않고 오히려 밖에 있는 이들을 위로하며 투쟁하고 있는 일곱 명의 구속동지들, 6개월이 넘게 24시간 순천향 병원과 남일당 분향소를 지켜 온 전철연 연대식구들, 글로, 그림으로, 노래로, 시로, 작품으로, 만화로 용산을 기억하는 일에 헌신했던 문화예술가들, 광화문에서, 청와대 앞에서 거듭되는 경찰의 강제연행을 각오하고 단식농성을 진행했던 용산범대위 대표자들, 8개월간의 수배생활을 이겨내며 우리를 이끌어 준 용산범대위의 수배자 석점(경찰들은 이들을 이렇게 부른다. 우리들 중 남성들은 점으로 여성들을 꽃잎으로 그 수를 센다. 우리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1년을 하루같이 용산만 생각하며 휴일도 없이 월급도 없이 함께 했던 범대위 활동가들이 없었더라면 어찌 오늘의 승리가 있었을까?

그리고 특별히 노구를 이끌고 군산에서 상경하셔서 죽을 때까지 용산에서 유족들과 함께하시겠다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셨던 우리시대의 스승, 거리의 신부, 깡패신부 문정현 신부님, 오체투지를 마치시고 다시 용산에서 단식기도를 하시다가 심장이 멎으셔 의식을 잃고 3일 만에 '부활'하셨던 문규현 신부님, 부러진 손목으로 오체투지를 마치시고 천막기도장을 지키셨던 전종훈 신부님, 남일당 본당신부을 자처하시고 물심양면으로 용산의 안주인 역할을 해주신 이강서 신부님, 그리고 온 기독교를 대표하여 혈혈단신 용산을 지키며 일당 백의 역할을 충분히 해주신 최헌국 목사님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용산참사 100일 추모제 사회를 보며 200일 추모제는 하지 않겠다고 했었고 200일 추모제 사회를 보고 난 후 300일 추모제 사회를 맡지 않겠다고 말했었다. 그 약속들을 하나도 지키지 못했지만 300일 추모제를 마치며 용산범대위는 절대 400일 추모제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약속은 지킬 수 있게 되어 다행스럽다.

아직 못다 한 이야기, 아직 다 전하지 못한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갈 수 있기를 바라며, 용산을 기억하고 용산에서 울고 웃었던 모든 이들이 장례위원으로 참여하여 1월 9일 장례식에서 그동안 나누고 확인했던 우리들의 의지와 투쟁, 우정과 평화를 확인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장례가 치러지더라도 용산의 신성한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땅에서 자본에 의한 개발이 지속되고 쫓겨나는 이들이 생겨나는 한, 정당한 국민의 요구를 공권력으로 짓밟는 일이 계속되는 한 우리에겐 2010년 1월 10일, 1월 11일이 아니라 용산참사발생 356일째, 용산참사 발생 357일째 일뿐이다. 우리의 싸움은 이제 '시즌 2'의 시작이다.


<오마이뉴스> 김덕진
김덕진님은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용산범대위 협상대표입니다. 프레시안에도 송고한 글입니다.
10.01.01 15:28 ㅣ최종 업데이트 10.01.01 15:2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93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