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인권] 한국 법원, ‘유죄’ vs 유엔,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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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인권] 한국 법원, ‘유죄’ vs 유엔, ‘무죄’
  • 여옥(전쟁없는세상 활동가)
  • 승인 2010.05.24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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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자유권위원회, 병역거부 수감자 구제조치 권고
지난 4월 15일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Human Rights Committee, 아래 자유권위원회)는 병역거부로 징역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정의민, 오태양, 염창근, 나동혁, 유호근, 임치윤, 최진, 임태훈, 임성환, 임재성, 고동주가 제출한 개인청원(Individual Communication) 사건에 대해 결정을 내렸다. 이번 결정은 2007년 5월 15일에 개인청원을 제출한지 3년만이며, 지난 2006년 12월 최명진, 윤여범 씨에 대한 결정 이후 두 번째 내려진 권고이다.

▲ 2010년 5월 6일 평화박물관에서 열린 기자회견 [출처] 전쟁없는세상(www.withoutwar.org)


위원회는 이전 결정과 마찬가지로 한국 정부가 병역거부자들에게 대체복무를 제공하는 것이 국가안보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증명해내지 못했으며, 따라서 권리 제한의 타당성으로 입증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결론적으로 한국정부가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아래 자유권규약) 제18조 1항을 위반하였고, 개인청원을 신청한 이들 11명에게 실질적인 보상을 할 의무가 있음을 명시하였다. 또한 앞으로 이와 같은 인권침해가 없도록 노력해야 하며, 위원회의 이러한 결정을 실행할 방법들에 관한 정보를 180일 내로 위원회에 제출할 것을 한국 정부에 요구했다.

유엔, “병역거부권은 인권”

유엔 자유권위원회의 개인청원제도는 자유권규약 선택의정서(Optional Protocol to the ICCPR)에 가입한 국가에 한하여 적용되는데, 규약 상의 권리를 침해당한 피해자가 국내의 모든 구제절차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사안에 대해서 개인이 직접 자유권위원회에 청원할 수 있는 제도이다. 한국은 1990년에 본 규약에 가입했으며 따라서 개인의 권리가 침해되는 일이 없는지 자유권위원회에 정기적으로 보고하고 위원회의 권고를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번 결정 이전에도 권리를 침해받은 다양한 사건들이 개인청원제도를 통해 국제사회의 도움을 요청했고, 8건의 사건에 대해 한국 정부가 규약을 위반하였다는 결론이 내려졌으며 현재 488명의 병역거부 사례가 추가로 유엔 자유권위원회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이번에 다시 한국 정부를 지목하여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구제조치를 취할 것을 결정한 자유권위원회는 준사법적 기구로서 국제인권법의 해석에서 가장 권위 있는 기구로 인정받고 있다. 한국은 헌법에 의해 국제규약을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이 있음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조약 당사국으로서 의무를 이행할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유엔에서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이 세계인권선언과 자유권규약으로부터 도출되는 권리라는 점을 선언하였고, 여러 차례에 걸쳐 채택한 결의들에서 이 점을 재차 확인해왔다. 1998년 77호 결의에서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과 관련된 자국의 현행 법률과 관행들이 아직도 시정되지 않는 국가들에 그 작업을 수행할 것을 촉구했으며, 최근 들어서는 한국 정부에 병역거부권 인정 권고가 되풀이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한국 정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고 있지 않으며 심지어 지난 정부에서 약속한 병역거부자를 위한 대체복무제마저 무기한 보류한 상태이다. 병역거부문제가 공론화된 2000년 이후부터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펼쳐왔고, 이로 인해 사회 각 분야에서 병역거부에 대한 인식과 대체복무제도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하는 변화를 이끌어내었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정부와 국회에 대체복무제도 마련을 권고하고 국가인권위 역시 대체복무제를 권고했다. 결국 국방부가 “전과자를 양산하는 현 제도에는 문제가 있다”면서 병역거부자들에게 대체복무제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한 것이 2007년 9월이었다. 그 발표에 따르면 2009년부터는 대체복무제가 시행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대통령 후보시절부터 대체복무제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었던 이명박 정권은 국민적 공감대 형성을 핑계로 계속 제도 도입 준비를 미뤄오다가 2008년 12월에 연구용역보고서 중 극히 일부분인 여론조사 부분만을 발표하며 사실상 대체복무제도 도입을 무기한 연기했다. 이는 정부가 2007년에 정책으로 제시했던 것과 국제사회에서 했던 약속 모두를 뒤집는 것이었다. 현 정부는 여전히 국민적 합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병역거부자들의 인권을 유보하고 있지만, 사실상 보편적 인권으로서 병역거부권을 보호하고 국민들에게 알려야할 의무가 있는 국가의 책임을 완전히 방기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취해야 할 구제조치

이번 결정은 구체적으로 한국 정부의 인권침해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이므로 이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방안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관련 활동을 벌여나갈 계획이다. 얼마 전 방한한 유엔 표현의자유 특별보고관과의 면담을 통해 양심의 자유의 본질은 자신의 양심을 표현하고 실현할 자유임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종교적․정치적 신념을 바탕으로 군사훈련을 받을 수 없다는 양심을 가진 이들을 계속 처벌하고 구속함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청와대와 국회의장,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 법무부, 국방부 등 이 문제를 책임 있게 받아들여야하는 정부 부처에 면담요청을 해놓은 상태이다. 또한 헌법에서 국제법 질서존중의 원칙을 명백히 하고 있는 한국에서 유엔 권고의 국내적 이행을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지 논의하는 토론회를 마련하고자 한다. 이번 개인청원 결정을 받은 11명에 대해 보상을 포함하여 유효한 구제조치(an effective remedy including compensation)를 요구하는 손해배상청구를 해볼 계획도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820여명의 병역거부자가 한국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수감된 병역거부자들은 1만 5000여 명이 넘는다. 이들은 아무런 대안없이 유죄판결을 받고 구속되어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이러한 처벌이 한국 정부에 의한 인권침해라는 사실이 다시 유엔 자유권위원회에 의해 확인된 지금, ‘글로벌 스탠다드’와 ‘국격’을 운운하는 정부가 국제사회의 계속되는 권고를 무시해서는 되겠는가?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나라라고 자랑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란 얘기다. 지금에라도 병역거부자에 대해 유엔이 권고한 대로 보상을 하고, 아울러 모든 병역거부자를 사면ㆍ석방ㆍ복권하고, 앞으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병역거부권을 받아들이는 법적ㆍ제도적 조치를 마련하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유엔의 결정을 실현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