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몰래 철거된 도라산 벽화... "몰상식이 빚은 과잉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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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몰래 철거된 도라산 벽화... "몰상식이 빚은 과잉충성"
  • 천주교인권위
  • 승인 2010.08.19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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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부 "정치적 압력 작용한 것 아니다"... 작가 측 "소송도 고려할 것"

경의선 도라산역 통일문화광장을 가득 채웠던 벽화가 사라졌다. 벽화를 제작한 작가도 모른 채 벽화는 조용히 철거되었다. 통일부는 "소유권이 정부에 있"으며 "정치 이념적 색깔이 가미된 민중화 같다"는 여론을 수렴해 철거했다고 밝혔다. 이에 벽화 제작자 이반씨와 시민사회단체는 기자회견을 열어 "정치적인 이유로 벽화가 철거되었다"며 "벽화 복원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 이반 작가가 제작한 작품 '하나의 조선, 그 등불이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빛이 되리라'이다. 통일의 염원을 그린 작품이다. ⓒ 이주연


19일 오전 환경재단 레이첼카슨홀에서 진행된 회견에서 이반씨는 "6월 초에 지인이 벽화가 없어졌다고 알려줘 그제야 벽화 철거를 알았다"며 "벽화를 철거한 통일부 남북출입국사무소 측은 '정치적 이념이나 압력이 작용한 것이 아니'라는 답변서를 보내왔는데, 이는 묻지도 않은 일에 도둑이 제 발 저려 이야기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씨는 벽화 철거에 대한 소견서를 통해 "'저질 공무원의 횡포'에 당했다"며 "그들의 '경거망동'이 예술분야에 무식해서인가, '몰상식'이 과잉충성을 빚어낸 난동인가"라고 날을 세웠다. 이어 그는 "작가가 혼신을 바쳐 제작한 벽화를 정권이 바뀌었다고 헌신짝처럼 벗겨내는 나라가 지구상에 어디 있냐"며 "이는 무지한 국가권력이 문화예술에 자행한 무자비한 폭력"이라고 힐난했다.

이씨는 "벽화가 회복되길 바란다"며 "그렇지 않으면 남은 인생 동안 그림 한 점 그리지 못한다 해도 벽화 회복을 위한 싸움에 여생을 바치겠다"고 말했다. 감정이 격해진 이반씨는 눈가에 눈물이 고이고 목이 메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정부, 생명과 평화라는 단어조차 정치적으로 받아들이나"

▲ 19일 오전, 이반 작가와 천주교인권위원회가 도라산 벽화 무단 철거에 반발해 기자회견을 열었다. ⓒ 이주연


회견에 참석한 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은 "정부는 생명과 평화라는 단어를 정치적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며 "2007년에 설치된 작품을 이제와 뜬금없이 철거한 것을 보면 통일부 장관이나 차관이 작품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한 것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김 국장은 "출입국사무소에서 설문조사를 했다지만 일일 평균 7000명이 방문하는 도라산역에서 고작 14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이면서 여론을 수렴해 벽화를 철거했다고 주장한다"라며 "정치적인 의도가 있어서 벽화를 없앴다고밖에 이해할 수 없는 태도"라고 잘라 말했다.

벽화 철거가 한 개인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정부가 창작의 자유를 침해하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는 지적도 이어졌다. 박천남 성곡미술관 실장은 "창원시청에 설치했던 최정화 작가의 설치 작업이 일방적으로 철거되는 등 작가의 저작권을 무시하는 일들이 미술계에서 이어져왔다"며 "이번 사건 역시 저작권과 소유권에 대한 몰이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박 실장은 "작품에 대한 평가는 각각 다를 수 있겠지만, 자신들의 이념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작품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폭력"이라며 "벽화 철거는 개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권력에 의해 침해되는 전형"이라고 말했다.

통일부 남북출입국사무소 "정치적 이념이나 압력 작용한 것 아니다"

▲ 현재 이반 작가의 작품이 사라진 곳에는 천지 사진 등이 대신 자리하고 있다. ⓒ 통일부


벽화를 철거한 통일부 남북출입국사무소는 "도라산역을 찾은 방문객들의 반응이 '어둡고 난해해 이해할 수 없다, 정치 이념적 색깔이 가미된 민중화 같다, 외설스런 표현이 있다' 등이었다"며 "이런 여론을 수렴해 철거한 것으로 정치적 이념이나 압력이 작용한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통일부 측은 "소유권이 정부에 있기에 작가와 합의 없이 작품을 철거한 것에 문제가 없다"고 밝힌 상태다.

이에 대해 김형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변호사는 "벽화의 소유권은 정부에 있지만 인격저작권은 여전히 창작자인 이반에게 있다"며 "만든 창작자의 인격이 예술 작품에 표현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소유권자라도 마음대로 고치거나 공표할 수 없음을 나타내는 인격저작권에 대해 정부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김 변호사와 이반씨는 '철거된 벽화의 원상 복원 및 재설치, 벽화 철거 책임자 처벌, 작가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만일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인격저작권 침해로 형사·민사 소송을 준비할 예정이다. 예술의 자유를 침해한 것에 대해 대한민국을 상대로 손해배상도 추진할 계획이다.

한편, 철거된 벽화는 이반씨가 정부의 요청으로 2005년에 작업을 시작해 2007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14점에 달하는 벽화는 만해 한용운 선사의 생명사상을 축으로 생명·인간·자유·평화·자연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작품 중에는 통일의 염원을 담은 '하나의 조선, 그 등불이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빛이 되리라' 등이 포함돼 있다. 이씨는 비무장지대를 배경으로 꾸준히 작업을 진행해 왔다.


<오마이뉴스> 이주연 기자
10.08.19 17:54 ㅣ최종 업데이트 10.08.19 17:54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33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