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시대의 느티나무’였던 이돈명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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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시대의 느티나무’였던 이돈명 변호사
  • 천주교인권위
  • 승인 2011.01.12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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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명 변호사가 그제 숨을 거뒀다. 고인의 89년 생애는 ‘인권변호사의 대부’란 추앙만으론 부족하다. 그는 각고의 노력으로 이룬 입신양명의 길을 버리고 원칙과 양심을 위해 가시밭길도 마다하지 않은 참지식인이었다. 소박하고 평범하되 우직한 사랑으로 시대의 아픔을 넉넉하게 품에 안았던, 큰 느티나무와도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큰어른 한 분이 또 우리 곁을 떠났다.

생전의 김수환 추기경은 그에게 “이 변호사님, 일생을 잘 살아오셨습니다”라는 헌사를 남겼다. 꼭 그대로다. 그는 단 한순간도 자신의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았다. 쉰세 살의 판사 출신 변호사였던 그가 1974년 인권변호사의 길에 뛰어들게 된 것도 법률가로서의 양식 때문이었다. 그는 유신헌법의 권위주의 독재 아래 법조인의 구실을 고민했고, 반대하는 이들의 입을 틀어막으려 민청학련 등의 사건 조작까지 서슴지 않는 박정희 정권의 반민주적 행태에 분개했다.

권력의 탄압에 희생된 이들의 변론에 참여하겠다는 그의 단단한 결의는 평생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황인철·조준희·홍성우 변호사 등과 함께 70~80년대 온갖 시국사건의 변호를 도맡았다. 시국사건의 재판정과 반독재 민주화운동 대열에서 그는 항상 맨 앞자리에 있었다. 그 과정에서 그 역시 수배된 이를 숨겨줬다는 이유로 수감되기도 했다. 이조차도 다른 이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모진 바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깊은 나무가 바로 그였다.

인권을 지키고 바로 세우는 일은 그가 스스로 부여한 사명이었다. 변호사로서 그의 삶 자체가 억눌린 이들의 삶과 인권을 되찾자는 일이었다. 그는 이를 위해선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인권을 바로 세우려면 새로운 신문이 있어야 한다며 어려운 때 <한겨레> 창간에도 참여했다. 인권을 바로 세울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정치적 소신을 밝히는 일도 꺼리지 않았다. 그에게 개인적 이해 따위 욕심이 없음을 모두가 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서로 의견이 다른 이들까지 너른 품 안에 모두 품은 큰 나무였다.

세상은 아직 그와 같은 이를 필요로 한다. 권력이 비판의 목소리를 법의 이름으로 옭아매거나 찬 들판으로 쫓아내는 과거로 퇴행한 지 오래다. 몰상식과 비인간에 함께 맞설 든든한 힘이 절실한 때다. 그런 구실을 했던 이돈명 선생이 더 그리운 까닭이다.


<한겨레>
기사등록 : 2011-01-12 오후 09:22:41
http://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45849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