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칼럼] “당신, 머리에 염색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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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 칼럼] “당신, 머리에 염색했지?”
  • 천주교인권위
  • 승인 2011.01.17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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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책상에 앉았다. 금방이라도 벽 틈 사이로 담배 연기가 건너올 것만 같다. 엊그제 저녁밥까지 잘 드시고 잠자듯 돌아가신 돈명이 할아버지를 뵈었건만 지금도 옆방에서 담배를 태우고 계시는 듯하다. 전두환 시절, 당신은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갖은 고초를 겪으셨다. 살기에 찬 수사관이 구타까지 하는 순간에도 그분은 뜬금없이 이러셨단다. “당신, 머리에 염색했지?” 나 같으면 모멸감과 절망과 상대방을 향한 증오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을 터인데 웬 난데없는 “머리염색”?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을 묻는 제자에게 “뜰아래 잣나무”를 외친 조주선사 같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계실까. 재판이 없는 날이면 지리산으로, 설악산으로, 방방곡곡 명산대천을 누비던 그 발걸음이며, “풀장 몇 개를 가득 채울 만큼 평생 마신 술”의 기억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흔히들 부활이나 윤회를 말하지만 동일성을 유지하며 영원히 존재하는 ‘나’란 게 과연 있기나 한 건가. 아버지, 어머니 양쪽에서 받은 성격, 지능, 신체적 기능을 바탕으로 태어나서 겪은 경험의 기억들이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니 태어나기 전부터, 그리고 죽은 후에도 동일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나’란, 그저 헛된 집착이지 싶다. 부모가 바뀌고, 경험이 바뀌면 나는 다른 나가 된다.

신경과학의 최신 이론에 따르면 ‘나’라는 정체성을 유지시켜 주는 핵심인 ‘기억’이란 결국 유전자의 지시에 따라 합성된 단백질이다. 우리 몸에 외부 자극이 주어지면 세로토닌 같은 신경조절물질이 분비되면서 전기, 화학적 전달 과정을 거쳐 해마 같은 신경다발 속에 정보를 저장하고 이것이 바로 기억이다. 뇌 과학자 라마찬드란의 <팬텀 인 더 브레인>(Phantom in the Brain)이란 책이 있다. ‘머릿속의 소형인간’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텐데 그 내용은 이렇다. 눈으로 꽃을 보면 볼록렌즈인 수정체를 통해 망막에 거꾸로 꽃의 상이 생긴다. 그럼 망막에 거꾸로 맺힌 상은 누가 어떻게 보나. 사람들은 보통 우리 머릿속에 작은 사람, 즉 몸과 별도의, 영혼인 내가 망막에 맺힌 꽃의 상을 본다고 여긴다. 사실은 망막에 맺힌 영상은 뉴런과 신경전달물질을 통해 뇌의 신경다발에 전달되고 그 신경다발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저장된 기억과 대조하여 꽃이라는 판단으로 나오게 된다.

‘나’는 결국 과거 정보가 저장된 뇌의 신경전달체계에 불과하다 해서 유물론이라며 폄하할 일은 아니다. 뇌의 복잡한 정보처리 결과이긴 하지만 들에 핀 저 꽃은 여전히 아름답고, 첫사랑은 애틋하고, 친구를 위해 제 목숨을 버린 이를 보면 눈물이 나고 감동을 받는다. 그저 이런 과학책들을 보면서 ‘내가 정말로 별게 아니로구나’ 하고 깨달을 뿐.

모든 생물들은 자신을 우주의 중심에 놓아야만 겨우겨우 이 세상을 살아가고 또 번식을 할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생물은 모두 사라지고 말 거다. 그렇긴 해도 결국 이 ‘나’란 존재가 세상의 중심이 아닌 건 과학적으로 너무 분명해 보인다. 스승들의 가르침은 결국 이 이치를 알고 이웃과 삼라만상과 더불어 살라는 거다. 문화에 따라서 이를 사랑이라, 자비라, 어짊(仁)이라, 무위(無爲)라 다르게 부른다. 이미 스승들이 분명히 알려주셨음에도 사람들이 어리석어 이 말씀을 또다시 ‘나’ 중심으로 바꾸어 온갖 교리를 만든다. ‘내’가 구원받고 내가 해탈하고, 스승님을 잘 믿으면 살아서 복 받고 죽어서 천당, 극락에 영원히 살리라고. 이제 우주, 양자물리학자들이며 뇌 과학, 생물학자들이 나서서 그건 아니라고 가르친다. 경전으로, 말씀으로도 안 되니, 과학을 통해서라도 우리의 어리석음을 깨우칠 수 있으려나.

법조인을 영감님이라 부르던 시절에도, 그리고 돌아가실 때까지도 평생을 자가용차 없이 버스·전철에, 걸어 다니신 이돈명 변호사. ‘나’가 별것 아님을 알고 스승들의 길을 뒤따라간 돈명이 할아버지의 바름과 이웃을 향한 한평생, 그리고 그 넉넉함은 이를 기리는 이들의 삶 속에서 거듭날 게다.

김형태 변호사

<한겨레>
기사등록 : 2011-01-16 오후 08:58:02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5903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