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인권] 인권, 민주주의, 그리고 환경마저 부재했던 세계자연보전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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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인권] 인권, 민주주의, 그리고 환경마저 부재했던 세계자연보전총회
  • 백가윤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간사)
  • 승인 2012.09.28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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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마을에 한번이라도 다녀온 사람은 눈이 부시도록 푸른 바다와 하늘, 그리고 아기자기한 그 골목들을 기억할 것이다. 이 소박한 마을에 해군기지가 들어선다는 결정이 내려진 지 벌써 5년 6개월여. 환경, 인권, 안보 그 어떤 관점에서도 정당성을 찾을 수 없는 해군기지 건설의 현장에서 채 7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전 세계인들의 환경 올림픽이라고 불리는 세계자연보전총회(World Conservation Conference, WCC)가 9월 6일부터 15일까지 개최되었다.

한국 인권시민환경단체들과 강정 주민들은 인권침해와 환경파괴가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강정마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제주에서 WCC가 열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지역주민의 환경권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환경 운동의 기본정신, 즉 WCC의 기본원칙에도 명백히 반하는 처사라는 것이다.

IUCN은 적어도 강정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절차상 비민주적이고 비합리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WCC가 열리기 전부터 강정 주민들의 목소리를 막으려는 부당한 시도들이 계속되었다. 우선 WCC 참가자라면 누구나 행사 기간 중 홍보 부스를 신청할 수 있는 정해진 절차에 따라 강정마을회가 신청한 부스가 타당한 이유 없이 거절되었다. 한국 정부는 환경 단체가 아닌 단체에 부스를 허가할 수 없다고 했고 세계자연보전연맹 (International Union of Conservation of Nature, IUCN)은 주최국인 한국 정부의 결정이니 자기네도 어쩔 수 없다는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했다. IUCN은 WCC 해외 참가자들이 한국 정부에 의해 정당한 이유 없이 입국을 거부당했을 때도 정부의 눈치를 보는 데 급급했다. 이뿐만 아니라 독립적 환경영향평가 결과를 발표하는 기자회견 제목에 ‘강정’이라는 이름을 넣지 않도록 요구하는 압력이 IUCN 한국 위원회로부터 들어왔으며 이번에도 어김없이 한국 위원회는 IUCN 사무국 핑계를, IUCN 사무국은 한국 위원회로 서로 책임을 떠넘겼다. 민주적인 절차로 다양한 의견을 수렴한다고 홈페이지에도 버젓이 내세우고 있는 IUCN은 적어도 강정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절차상 비민주적이고 비합리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에 한국 인권시민환경단체들과 강정 주민들은 IUCN 총재와의 면담을 요청하는 서한을 여러 차례 보냈으나 그 때마다 바쁜 일정으로 인해 만나줄 수 없다는 답변만이 돌아왔다. 오히려 IUCN 사무국은 한국 위원회가 일방적으로 정한 날짜에 WCC 참가자들과 함께 강정마을을 방문하겠으니 그 기회를 잘 활용해보라고 강정 주민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강정마을 방문 이후 해군기지 관련 모션(motion, 결의안) 논의 및 투표 과정에서 보인 IUCN 사무국과 한국 위원회의 태도는 강정마을 방문이 요식행위에 불과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줬다.

이번 WCC에는 IUCN 미국 회원단체인 Center for Humans and Nature(CHN)의 주도로 총 35개의 스폰서 단체들이 “강정마을 주민, 자연, 문화와 유산 보호”라는 모션 초안을 제출했다. 이처럼 논란이 많은 모션의 경우 총회에 상정해 모션 채택 여부를 투표하기 전, ‘콘택트 그룹(contact group)'이라는 조정회의를 열어 모션의 구체적인 문구 등을 수정하는 작업을 거치게 된다.

환경 쟁점에 대한 실질적인 토론을 회피하고, 논점을 정치적인 사안으로 몰고 갔던 한국 정부와 IUCN 한국 위원회

첫 번째 열린 콘택트 그룹에서부터 한국 정부와 IUCN 한국 위원회는 강정 주민들과 한국 인권시민환경단체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갔다. 제주해군기지건설이 주변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토론하기보다는 국가 안보를 위해 해군기지 건설이 꼭 필요하다거나 결의안이 통과되면 한국 사회에 정치적 혼란이 야기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환경 쟁점에 대한 실질적인 토론을 회피하고 논점을 정치적인 사안으로 몰고 갔다. 무엇보다도 주민들의 99%가 보상금을 받았다는 주장, 주민들과의 충분한 협의 끝에 해군기지건설을 결정했다는 주장 등은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평화롭게 투쟁을 지속해 온 강정 마을 주민들의 진정성을 모욕하는 발언이었다. 게다가 의견을 조율해 나가는 과정인 콘택트 그룹에 충실하기보다는 논의 중이던 모션을 철회해 줄 것을 요청하는 안건을 총회에 긴급 상정하는 등 처음부터 끝까지 모션에 대한 논의 자체를 무조건적으로 방해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IUCN 사무국도 회의 일정 및 참여범위를 예고 없이 변경하는 등 모션 통과를 막으려는 한국 정부의 태도와 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IUCN 회장 및 한국 위원회 위원장은 이 모션을 제안한 스폰서 단체 중 한국 단체들이 거의 없음을 지적하며 마치 해군기지건설 반대가 한국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닌, 사정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의 목소리인 것처럼 몰아갔다. 그들에게 125개 한국 인권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되어있는 제주해군기지건설 저지를 위한 전국대책회의, 26개 제주도 인권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되어 있는 제주군사기지 저지와 평화의 섬 실현을 위한 범도민 대책위, 강정마을회, 그리고 36개 환경단체로 구성되어 있는 한국환경회의가 제주해군기지건설에 끊임없이 반대한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은 듯 했다.

결국 수많은 논란과 부당한 절차 끝에 총회에 상정된 강정마을 관련 모션 181번은 부결되었다. 모션이 통과되려면 정부 회원의 51% 이상, NGO 회원의 51% 이상의 득표가 이뤄져야 하는데 NGO 회원들의 표는 얻었으나 정부 회원들의 표를 필요한 만큼 얻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정부, NGO들의 표를 합산하면 결의안 찬성이 289표(정부 20표, NGO 269표), 반대 188표(정부 68표, NGO 120표), 기권 188표(정부 60표, NGO 128표)로 내용에 있어서는 압도적인 승리였다.

“WCC 결의안 투표는 졌지만 우리는 강정주민들과 함께 승리했다.”

비록 모션은 통과되지 않았으나 총회가 끝난 후 우리에게 다가와 손을 잡고 지지와 연대의 말을 건네던 사람들을 나는 기억한다. “이처럼 훌륭하고 의미 있는 모션을 지지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강정마을 주민들의 용기에 감동을 받았다. 앞으로도 지지 말고 평화로운 투쟁을 계속 해 달라.”, “투표는 졌지만 우리는 주민들과 함께 승리했다.”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이던 많은 해외 활동가들을 기억한다. WCC 총회 당일, 이른 아침부터 행사장 앞에서 쉬지 않고 천 배를 올리며 제주 해군기지건설 저지를 위해 마음을 모으던 주민들과 강정 지킴이들을 기억한다. 지나가는 단 한 사람에게라도 제주 해군기지건설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끊임없이 목청을 높이던 사람들을 기억한다. 강정에 직접 오지는 못했지만 저 멀리 외국에서, 서울에서 밤새 잠 못 이루고 마음을 졸이며 WCC 결과를 기다리던 사람들을 나는 기억한다. 비록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평화로운 방법으로 투쟁을 계속해 나가는 것뿐이지만 WCC 대응 과정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된 연대의 힘과 한 사람 한 사람의 진심이 모아져서 결국 해군기지건설을 막아내고 강정의 평화를, 동북아의 평화를, 그리고 전 지구의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다.

사진_ 태풍이 지나간 후 강정마을에 뜬 무지개 (조성봉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