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제와 인권] 사이코패스 사냥, 야만적 광기의 굿판을 치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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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제와 인권] 사이코패스 사냥, 야만적 광기의 굿판을 치워라
  • 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천주교인권위원
  • 승인 2012.09.28 23: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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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사형 집행을 하지 않아서 흉악범죄가 발생하는 걸까?

아니나 다를까, 또다시 사형 집행 논란이 되풀이되고 있다. 최근 토막살해사건, 아동성폭력 등 흉악한 범죄사건이 잇따르면서 정부가 불심검문 확대, 화학적 거세 확대 등 강성 대책들을 내놓은데 이어, 일부 시민들은 당장 사형을 집행하라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 일부 언론은 앞장서서 사형 집행 재개 논란을 부추기고 있다. 이런 와중에 새누리당 박근혜 대통령 후보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흉악범죄의 예방을 위해서는 사형 집행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냉정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정말로 사형 집행을 하지 않아서 흉악범죄가 발생하는 것인지, 사형이 흉악범죄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는 수단인지, 그리고 사형 집행이 피해자의 고통을 보듬어 안는 치유책인지, 흉악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진정 짐승이거나 괴물인지…. 사형 집행 주장을 반박해 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형은 생명을 빼앗는 극단적인 형벌이니까 '당연히' 범죄 예방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당연히'라는 직관은 자명한 것이 아니다. 사형이 과연 범죄 예방 효과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연구가 있었다. 그중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압도적인 다수의 연구는 사형이 무기징역형이나 절대적 종신형보다 범죄 예방 효과가 크지 않다는 것이다. UN 인권위원회도 1988년과 2002년에 두 차례에 걸쳐 광범위한 조사를 실시하여 사형제가 살인범죄 등 반인륜적 범죄를 억제하는 효과가 없다고 분명하게 지적한 바 있다.

UN 인권위 "사형제, 반인륜 범죄 억제 효과 없다"

한국에서는 1997년 12월 30일 마지막 사형 집행이 있었다. 사형 집행이 중단된 지 15년째이다. 그동안의 범죄 양상을 추적해 보면 사형이 범죄 예방 효과가 있는지에 대하여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다. 사형이 선고되는 범죄는 대부분 살인죄이므로 살인범죄의 추이를 보자. 공식통계에 의하면, 살인범죄의 발생건수는 1998년부터 2008년까지 대체로 1000-1100건 내외였다가 2009년 1390건, 2010년에는 1262건을 기록하고 있다. 사형집행이 중단된 이후 10년(1998년-2007년) 동안 살인범죄는 16%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다. 2001년부터 2010년까지의 10년 기간을 잡아 보아도, 살인범죄 건수는 2001년 1064건에서 2010년 1262건으로 증가율은 18.6%였다. 반면에, 사형 집행이 비일비재했던 시절인 1988년부터 1997년까지 10년 동안 살인범죄의 증가율은 무려 31%였다. 사형 집행이 중단된 이후의 살인범죄 증가율이 오히려 더 낮다.

물론 2009년 이후에 살인범죄 건수는 1300건 내외로, 2008년 이전에 비하면 비교적 큰 폭으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이 사형 집행을 중단한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사형 집행을 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시기 살인범죄의 발생건수는 1000-1100건 정도로 비교적 안정적인 수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반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우리는 2011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사형 집행 재개 논란에 휩싸였던 경험이 있다.

2008년 봄, 2009년 봄, 2010년 봄이 그랬다. 그때마다 정부와 여당은 연쇄살인범 등 흉악범죄 예방을 위해 사형 집행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사형 집행을 재개하겠다는 대국민 메시지를 흘렸다. 특히 2010년 3월에는 법무부장관이 청송교도소를 방문한 자리에서 사형을 집행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면서 청송교도소에 사형 집행 시설을 마련하라는 구체적인 지시를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오히려 이명박 정부 들어 살인범죄의 증가가 과거보다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만약 사형 집행이 범죄 예방 효과가 있다면 사형 집행을 재개하겠다는 정부의 협박과 엄포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예방 효과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결국 2009년과 2010년에 살인범죄의 발생건수가 1300건 내외로 증가한 것은 사형 집행이 중단된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회적, 문화적 요인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사형제 유지 여부라든가 사형 집행 비율이 범죄율에 통계적인 상관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점은 외국과 비교해도 쉽게 확인해 볼 수 있다. 유럽연합의 국가들은 모두 사형을 폐지하였다. 유럽연합은 사형제 폐지가 회원국 가입 조건이다. 미국의 경우 연방과 약 2/3 정도의 주에서 사형제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은 사형제를 유지하는 대표적인 국가인데, 살인범죄의 발생률을 비교해 보면 미국이 유럽 국가들보다 훨씬 높다. 한국의 살인범죄 발생률은 미국은 물론 유럽 국가들과 비교해도 상당히 낮은 편이다. 사형제 존치 여부나 사형 집행 빈도는 범죄발생률에 영향을 주는 의미 있는 변수가 아니다.

사형 집행 재개 논란을 벌일 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범죄 유발 요인을 차분하게 점검해 보는 것이 우선이어야 한다.

근본적으로 범죄율 변화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매우 다양하다. 사회문화적 요인, 경제발전에 따른 사회복지 정도 내지 상대적 박탈감의 문제, 갈등이 발생하였을 때 그것을 해결하는 시민들의 일반적인 대응방식의 변화, 인권의식의 변화 등등은 살인을 비롯한 폭력성 범죄의 발생 정도에 상당한 영향을 주는 요인들이다. 사형 집행 재개 논란을 벌일 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범죄 유발 요인을 차분하게 점검해 보는 것이 우선이어야 한다.

사형 집행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일부 흉악한 범죄자, 일각의 표현에 의하면 '인간이기를 포기한 극악무도한' 범죄자에 대한 경고용으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말은 '사이코패스'라든가 기타 흉악범죄를 저지르려는 사람들에게 사형 집행이 강력한 응징의 경고 메시지를 줄 수 있다는 전제를 갖고 있다. 이 주장이 옳은 명제이려면 흉악범죄자들이 자신이 사형당할 수 있다는 것을 합리적으로 고려하여 범행을 자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국내외 범죄학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흉악범죄자일수록 즉각적인 충동이나 단기적인 이익에 집착할 뿐, 사형과 같은 형벌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둔감하다고 한다. 자아통제력을 상실한 상태에서 극악하고 잔인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은 합리적인 생각에 의하여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을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려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이미 벗어나 있는 사람들이다.

2009년 초에 검거된 연쇄살인사건의 범죄자는 '나는 잡히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려는 사람은 자신이 검거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흉악범죄자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사형 선고는 체포된 뒤의 나중 문제이기 때문에 자신이 붙잡힐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범죄자에게 사형은 아무런 억제효과를 지니지 못한다. 범죄자의 말에서 우리는 오히려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면 곧바로 검거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사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훨씬 현명한 정책임을 간파해야 한다.

'피해자 위해 흉악범 처형' 주장은 정치 구호

사형 집행을 주장하는 또 다른 논거는 응보론이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침해하거나 타인의 삶을 무침하게 파괴하는 짓을 한 사람을 사형에 처하는 것이 응보와 정의의 관념에 부합한다는 주장이다. 범죄를 저지르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점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탈리오 법칙이 곧 정의인 것은 아니다. 범죄자가 저지른 죄질에 걸맞은 형벌이 부과되어야 한다는 지적은 맞지만, 과연 어느 정도의 형벌이 정의에 부합하는가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

계몽주의 이래로 근대국가의 형벌의 역사는 사형과 같은 극악한 형벌을 축소, 폐지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범죄와 형벌이 비례적이어야 한다는 명제는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지만, 그 비례성은 '상대적'인 것이다. 노르웨이에서 발생한 테러사건은 수많은 희생자를 내었지만 그 범죄자는 사형도 무기징역도 아닌 유기징역형에 처해졌다. 그래도 그 나라에서는 그 형벌이 정의의 관념에 벗어난 것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형벌은 그 나라의 문명화 수준을 반영한다. 적어도 인류가 문명적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140개 국가가 사형을 폐지하였다는 세계적인 추세를 놓고 그것이 정의의 관념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형 찬성 논거로 피해자의 인권을 거론하기도 한다. 사형 집행을 통해 피해자와 유족의 분노의 감정을 배려해야 하고 복수심을 충족해 주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졸지에 가족을 잃은 슬픔, 삶이 송두리째 파괴되어버린 피해자의 현실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사형 집행이 정말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방책이 될 수 있는지는 곰곰 생각해 볼 일이다. 사형 집행에 의하여 피해자와 유족들의 복수심이 충족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냉정하게 보면 이것은 일시적인 카타르시스에 불과하다. 피해자의 고통과 슬픔을 치유하는 데 사형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와 유족들을 따뜻하게 보듬어 안고 그들이 당한 엄청난 고통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도록 정신적, 물질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이것은 피해자를 위하여 국가와 사회공동체가 함께 노력해야 할 기본적인 의무이다.

오히려 피해자의 상처와 고통을 치유하고 그들이 다시금 삶의 활력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회적 시스템이 미비할 때, 피해자의 고통과 분노의 감정은 가해자에 대한 원한 갚기로 분출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피해자의 고통을 앞에 내세우면서 흉악범 처형이 마치 피해자를 위한 해법인양 말하는 것은 정치적인 구호일 뿐 진정 피해자를 위한 정책이라고 말할 수 없다. 미국의 살인범죄 피해가족의 단체는 "우리의 이름으로 사형에 처하지 마라(Don't kill in our names)"라고 외치면서 사형제 폐지를 전파하러 전 세계를 다니면서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도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 그들은 살인범죄의 피해자이건만 그들의 경험에 의하면 사형 집행이 피해자에 대한 치유책이 결코 아니라고 한다.

이른바 '짐승', '괴물'론에 대해서도 한마디 할 필요를 느낀다. 흉악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일부 시민들은 '악마'니 '짐승'이니 하는 표현을 써가면서 인간으로 대우해 줄 가치조차 없는 존재라고 극단적인 비난을 쏟아낸다. 사형 폐지의 대안으로 절대적 종신형을 이야기하면 흉악범죄자들을 평생토록 교도소에서 먹여주고 재워주는 데 들어가는 세금이 아깝다는 식으로 대응한다.

사형 집행은 야만적인 광기의 굿판일 뿐이다

지난 몇 년 사이에 '사이코패스'라는 용어가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다.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여 '도무지 치료와 교정도 되지 않는 위험한 인물'로 낙인찍고 그 위험성 때문에 사형 등의 수단을 동원하여 무조건 사회에서 배척해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그러한 생각은 사람이 누구나 존엄성을 지닌 존재로서 사회공동체의 유대관계 속에서 발전하고 변화하는 존재임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 사회는 흉악범죄자 개인에 대해 사이코패스니 위험한 사람이니 하는 비난과 낙인을 가하는 데에는 익숙하면서도 정작 그러한 범죄자를 만들어내는 사회환경적 요인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흉악범죄를 저질렀어도 그들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어린 시절 어려운 환경에서 받는 박탈감, 사회의 냉대, 치열한 경쟁에서 실패한 사람을 '루저'로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각박한 생존경쟁, 그로 인해 아무도 돌봐주는 이 없는 처절한 사회적 소외, 이러한 요인들이 쌓이면서 흉악한 범죄를 만들어낸다. 최근 몇 차례 발생한 '묻지 마 범죄'는 모두 실업과 빈곤으로 사회적으로 설 자리가 없는 사람들이 저지른 극단적인 선택이었다. 경제적인 빈곤, 사회적 소외로 인해 궁지에 몰린 사람들의 극단적인 선택이라는 점에서 '묻지 마 범죄'는 '높은 자살률'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각박한 각개전투식의 경쟁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에 비해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은 부실하기 짝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생존경쟁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낙오한 사람들은 엄청난 인격적·정신적 고통을 겪을 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사회에서 소외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흉악범죄는 그 산물로 나타나는 것이다. 치열한 경쟁사회가 사회적응에 실패한 사람을 소외시키고 그 소외가 사이코패스라는 인간형을 낳는 사회문화적 원인이 된다는 점을 주목한다면 '짐승', '악마' 같은 극한 표현으로 그들을 비난하기보다는 양극화 해소라든가 사회안전망의 확대 등 사회적인 연대를 위한 합리적인 사회정책을 고민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무엇보다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 그리고 더불어 사는 사회적 연대의 정신은 모든 국가정책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 타인의 생명을 무참히 침해하였다는 이유로 혹은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인간이 아니다' 내지는 '흉악범의 생명은 존중받을 가치가 없다'는 식의 논리는 사람을 가치 있는 생명과 그렇지 않은 생명으로 분류하기 때문에 위험하고 반인권적이다. 세상에 존중받지 못할 생명이 있다는 주장만큼 위험한 생각도 없을 것이다. 생명의 가치의 경중을 따지는 세상이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필자는 이명박 정부에서 사형 집행 재개 논란이 발생할 때마다 사형 집행 재개를 반대하는 글을 써왔다. 매년 이런 광기 어린 논란을 되풀이해야 하는 현실이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운 심정이다. 사형은 흉악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효과도 없으며 피해자의 고통과 슬픔을 치유해 줄 수 있는 합리적인 방책도 결코 아니다. 나는 감히 말한다. 사형 집행은 그저 야만적인 광기의 굿판일 뿐이라고.

▲ 오는 10월 26일, 대구대교구 삼덕성당에서 사형폐지 기원을 위한 콘서트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