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인권] 세상 속의 교회
상태바
[교회와 인권] 세상 속의 교회
  • 박동호 신부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서울 신정
  • 승인 2012.10.31 16: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무엇이 교회를 교회답게 할까?

가난한 이들과 일치하는 교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사회적 관심」에서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사회를 인간다운 발전으로 이끄는 데 있다"며 "이를 위해 교회는 그리스도와 일치해야 하고, 또한 사회와도 일치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또 "예로부터 교회는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과 일치하기 위해 교회의 '남은 것'뿐만 아니라 '요긴한 것'을 가지고도 나누었다"며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잘 곳이 없어서 가난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있는데 교회가 하느님께 드리는 경신례(敬神禮)를 위해 값비싼 장식을 마련한다든가, 화려한 성전(聖殿)을 짓는다든가 하는 일은 교회의 신앙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사회 현실 진단해 복음 선포해야

소유의 노예가 된 세상 사람들에게 존재의 복음을 가르쳐 줘야 할 교회가 더 소유하기 위해 애를 쓴다면 이는 교회의 길을 벗어난다는 뜻이다. 이는 교회 발전이 소유가 아니라 존재에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수의 '소유(所有)'가 다수의 '존재(存在)', 즉 인간됨을 손상시키는 사회 현실에서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사회적 관심」 31항 참조)

예언직, 복음으로 어둠을 밝히는 등불

교회와 신앙인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예언직과 사목직과 사제직이라는 '삼중직무'를 받아 수행해야 한다.

이중 예언직은 교회와 세상의 현실을 진단하고, 복음의 빛을 비춰 해석하며, 그 올바른 길, 즉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 전통에서 예언자는 주로 두 가지 역할을 수행했다. 하나는 하느님 뜻을 전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가 돼주는 것이었다. 구약시대 사회적 약자는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모든 분야에서 소외된 이들이었다.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회의 약자였다.

거꾸로 힘 있는 사람은 모든 분야에 걸쳐 우월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사회 모든 분야에서 이들의 목소리가 반영됐다. 그만큼 이들에게는 하느님 백성을 돌봐야 할 사명과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우월적 지위를 남용해 하느님 백성을 사지로 내몰기도 했다. 이런 경우 예언자는 힘없는 이들의 편이 되어 용기와 희망을 불러일으키며, 동시에 불의한 지도자들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구약의 일부 예언자들, 신약의 요한 세례자, 그리고 우리 주 예수님은 바로 이들 불의한 지도자들 손에 처형되는 운명을 맞는다. 예언자들은 특히 지도자들의 불의함으로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의 신음에 귀를 막은 채 거행하는 겉치레뿐인 경신례를 비판했다.

예언직 수행이 하느님 말씀을 이용해 힘 있는 사람들 비위를 맞추거나, 힘없는 사람의 처지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일은 결코 아니었다. 무병장수의 길을, 대학입학 해법을, 사업번창 비책을, 부동산 개발이익 전망을 돈 몇 푼 받고 알려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용어가 주는 오해라 치부하기에는 성경과 교회의 전통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

다양한 역할의 조화와 일치

사목은 섬김을 의미한다. 인간이 되어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예수님처럼 섬김으로써 하느님 뜻을 실현하는 것을 말한다. 그 내용을 살피기 전에 용어가 갖는 문제를 짚어보자.

고대 농경사회에서 목자와 가축 관계를 반영한 이 용어가 오늘날 현대인에게는 불편하게 들릴 수 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보다는 다스림과 순종의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용어이기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 목자는 양을 보살피지만 다스리는 지위에 있고, 양은 목자의 다스림에 순종함으로써 자랄 수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람은 사람이고 양은 양일뿐이다. 아무리 목자가 양을 사랑과 지극정성으로 돌보고 섬긴다 하더라도 말이다. 목자와 양은 근본적으로 같을 수 없다.

근대 이전 사람들은 하늘이 누구는 지도자로, 누구는 평민으로, 누구는 노예로 세웠으며, 각각 나름대로 역할을 맡겼다고 생각했다. 하늘이 세운 이 질서는 절대적이었으며 신성시되기까지 했다. 사람이 함부로 거스르거나 훼손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신분에 따른 구별과 차별은 당연했으며, 이를 구체적으로 제도화했다. 적어도 정치적 의미의 평등이 실현된 현대사회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질서이다.

예언이라는 용어가 주는 오해만큼이나 사목이라는 용어 역시 오해의 위험이 크다. 성직자를 목자로, 하느님 백성을 양으로 보게 되면 그 둘 사이는 주종(主從) 관계가 형성돼 지배와 피지배 질서를 정당시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혹은 신분에 따른 구별을 넘어 차별을 제도화할 위험마저 있다. 역할의 다양함과 다양한 역할의 조화와 일치를 지향하는 뜻을 담은 용어 개발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