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어느 날,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공익소송 한 건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군대 내 사망 사건이라고 했다.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매우 어려운 사건이겠거니 생각했으나, 천주교인권위원회의 인권을 향한 열정 때문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관련 사건 기록을 요청하고 군의문사에 대한 판례를 검색해 보았으나, 역시 승소가 어려워 보였다. 특히 이 사건은 2009년까지만 운영되었던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거친 사건도 아니었다.
기록을 받고 파악한 사건의 내용은 이러하다. 2010년 3월에 입대한 민 모 이병이 자대배치 후 십 여일 만에 목을 매 자살을 했다. 사망 후 군 헌병대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선임병들이 지속적으로 암기강요, 욕설, 질책을 한 사실이 밝혀졌고, 이 사건으로 선임병들은 영창 15일, 휴가제한 5일 등의 징계를 받았다. 이에 유가족은 보훈청에 국가유공자(유족)등록 신청을 했으나, 보훈처는 “부대의 소홀한 병력관리와 선임병 등의 유형력 행사가 자살의 동기와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우울증에 빠져 삶을 포기하게 할 정도였는지는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점 등을 고려하면 자유로운 의지가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 자살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국가유공자등록 거부처분을 하였다.
우선 유족을 만나야 했다. 아버지는 의외로 담담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표정 속에는 억울함을 숨긴 자포자기의 심정도 묻어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충격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사망 원인을 찾으려고 동분서주한 과정을 조용조용히 설명했다. 그리고 군대라는 커다란 벽에 가로막혀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진실을 찾아낼 수 없어서 천주교인권위원회를 찾게 되었다는 말로 마무리를 했다.
조용히 이야기를 마친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극심한 심적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아들을 위해 살아있는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자괴감이 그 눈물 속에 비쳤다. 그 눈물을 뒤로 하고 앞으로의 진행 방향과 예상 결과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매정하다고 비쳐질 정도로 냉정하게. 다시 한번 절망감만 증폭시킨 건 아닌지 하는 씁쓸함에 그래도 최선을 다해보자고 위로하며 아버지를 보냈다.
국민이 있어야 국가도 존재, 그렇다면 국방의 의무보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먼저가 아닐까
국가란 무엇일까? 우리 헌법 제39조 제1항에서는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국방의 의무가 헌법상의 의무인 만큼 군대내 문제에 있어서 권리보다 의무가 훨씬 강조되고 있다. 국가의 존립을 위하여 불가피한 면이 있지만, 국민이 있어야 국가도 존재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국방의 의무보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먼저가 아닐까. 국가는 국방의 의무를 이유로 민모 이병을 징집하고도 사전에 보호하지 못했다. 사후 보호도 거부했다. 이러한 불합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사명감이 어깨를 짓눌러 왔다.
국가가 군인을 징집해놓고 보호하지 못했다. 사후 보호도 거부했다.
먼저 행정심판을 제기했다. 중앙행정심판위원회는 청구를 기각했다. “고인의 사망에 대한 국가의 배상책임문제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고인은 자해행위로 인하여 사망한 것으로 판단되고, 고인의 자살이 수인하기 어려운 국가의 가혹행위에 의하여 발생했다거나 정상적인 의사능력 또는 자유의지가 결여된 상태에서 일어난 것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가 달렸다. 충분히 예상했던 결과였다.
즉시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변론은 법리보다는 감정적 정의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변론기일마다 출석하여 눈물로 호소했다. 민 모 이병과 함께 근무한 선임병 중 한명을 어렵게 찾아 증인신문도 했다. 행정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보훈처가 민 모 이병의 국가유공자등록을 거부한 사유인 국가유공자법 제4조 제6항이 개정되어 국가유공자등록 예외사유 중 ‘자해행위로 인한 경우’를 삭제했다. 판결 선고를 앞두고 대법원 전원합의체도 “교육훈련 또는 직무수행과 사망 사이에 상당 인과관계가 인정되는데도 그 사망이 자살로 인한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또는 자유로운 의지가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의 자살이 아니라는 이유로 국가유공자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로 판례를 변경했다.
국가유공자 인정 판결에 국가는 항소했다. 아버지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버지를 만나고 1년 6개월만인 2012년 10월 24일 10시에 행정법원은 우리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여 승소판결을 하였다. 판결 선고를 들은 아버지의 전화 너머 목소리는 눈물과 웃음이 교차되고 있었다. 아들을 그렇게 보내고 2년 7개월 동안, 가슴으로 통곡하며 옥죄어진 아버지의 심장이 느껴지는 것 같아 뭉클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국가는 항소했다. 아버지의 고통과 눈물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이 소송은 유현석공익소송기금 (이하 ‘기금’)의 지원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기금은 평생을 실천하는 신앙인으로서, 의로운 인권변호사로서, 약자들의 벗으로서 한결같은 삶을 살다 2004년 선종하신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유족이 고인의 뜻을 기리고자 출연한 기부금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천주교인권위원회는 유족의 뜻을 받아 2009년 5월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5주기에 맞춰 기금을 출범시키고, 공익소송사건을 선정하여 소속 변호사들로 하여금 수행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 故유현석 변호사님이 걸어오신 길
유현석 변호사님은1927년 9월 19일 충남 서산군 운산면 거성리에서 출생하였다. 1945년 경성대학 문과을류(법학과)에 들어갔으나 1946년에 하향, 서산법원 서기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1952년에 제1회 판사 및 검사특별임용시험에 합격하였다.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시작해 법무장교, 육군고등군법회의 검찰관, 서울고등법원판사, 서울지방법원부장판사 등을 지낸 후 1966년에 한국 최초의 로펌인 ‘제일합동법률사무소’를 열어 변호사의 길에 들어섰다. 70년대 남민전사건, 80년대 광주항쟁, 90년대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등 굵직굵직한 변론으로 인권옹호와 사회정의 실천에 분투하셨다.1987년부터 1991년 2월까지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이사직을 역임했으며, 1991년 서울지방변호사회 법률실무연구회 운영위원장에 선임됐고, 1999년 대한변호사협회 총회의장으로 취임하였고,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원로회원으로, 언제나 든든한 배경이 되어 후배 변호사들에게 큰 힘을 실어주셨다.
1950년 서산성당에서 유봉운 신부님에게 세례(세례명 사도요한)를 받은 이후, 교회 안에서도 많은 일을 하셨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는 한국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회장, 1988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상임대표직을 맡아 활동하셨다. 그리고 천주교인권위원회를 창립해 후배를 키우신 선각자이자 1992년 이후에도 고문으로 재직하면서 늘 천주교인권위원회에 각별한 애정을 쏟으셨다.
또한, 1992년 한겨레신문 자문위원장을 비롯해, 1997년 경제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 1999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고문, 2002년 사단법인 언론인권센터 이사장 등 여러 사회단체의 좌장으로 신실한 신앙인이자 용기 있는 법조인으로, 지혜로운 예언자의 모습으로 한평생을 사셨다. 199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으며, 지난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사건의 대통령 대리인단 대표로 법정에 서신 것이 마지막 재판이 되었다.
유현석 변호사님은 2004년 5월 25일 선종하여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