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인구의 10%를 살린 인도대법원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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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인구의 10%를 살린 인도대법원 판결
  • 권미란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
  • 승인 2013.04.30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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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를 가로지르는 ‘글리벡’의 사연
여러분, 약을 먹을 때 이상한 기분이 든 적이 있으세요? 약값이 약국마다 다르네, 혹은 약을 독하게 처방한 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이고, 무심결에 물과 함께 삼킬 때도 있겠지요? 저는 일주일에 이틀정도는 약을 만집니다. 하루 종일 빨간 약, 노란 약, 흰색 약을 만지다보면 이게 약인지 바둑알인지 별 느낌이 없어요. 그러다 가끔 울컥 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손발톱 무좀을 없애기 위해 화이자 사의 ‘디푸루칸’이 처방될 때입니다. 곰팡이균을 없애는 약인데, 이 약은 2000년대 초까지 개발도상국에 사는 에이즈감염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에이즈환자나 암환자들은 면역기능이 떨어지기 때문에 효모균이나 곰팡이에 의한 질병으로도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어요. 이때 이 약을 써야하는데 약값이 너무 비싸서 먹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 에이즈 약 중에 ‘칼레트라’라는 약이 있습니다. 이 약이 처음에 세상에 나왔을 때 냉장보관을 해야했어요. 저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우리는 늘 냉장고를 끼고 살잖아요. 그런데 3천만 명이 넘는 전 세계의 에이즈감염인 중에는 냉장고가 없는 이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가난의 병”이기도 한 에이즈는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인도 등의 개발도상국에 더 많이 퍼져있습니다. 정작 ‘칼레트라’를 먹어야하는 사람들은 무더운 지역에 더 많이 사는데 이들에겐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애보트’라는 제약회사는 이 약을 만들 때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에 사는 에이즈감염인들을 안중에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돈이 안 되는 환자들이니까요. 국제적으로 많은 비판이 잇따르자 ‘애보트’는 ‘칼레트라’를 상온에서 보관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었지만 해피엔딩은 아닙니다. 냉장고가 없는 이들에게는 너무 비싸서 여전히 “그림의 떡”입니다. 약은 환자가 먹고 효과를 봐야 비로소 제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인데 그렇지 못한 약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조금 과장하면 이런 사연을 가진 약들은 피와 눈물이 묻어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수많은 가난한 환자들에게 값비싼 약은 그림의 떡입니다.

2001년 어느 봄날 제 구실을 못하는 약이 한국에서도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만성골수성백혈병과 위장관기질종양을 치료하는 ‘글리벡’이라는 항암제입니다. 10년이 넘는 이 약의 긴긴 사연을 들어보시겠습니까? 당시 백혈병은 골수이식이 유일한 치료법이었기 때문에 글리벡은 “기적의 약”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런데 이 약을 파는 ‘노바티스’라는 제약회사가 한달 약값으로 최소 300만원을 요구했어요. 글리벡은 평생 먹어야하는 약인데 기절초풍할 일이지요. 그래서 환자들은 2년이 넘는 시간동안 목숨을 건 싸움을 했습니다. 노바티스에게 300만원을 다 줘야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상당히 많은 약들이 그렇듯이 글리벡은 제약회사가 개발한 게 아닙니다. 1990년대 초에 미국 오레곤 보건과학대학의 암연구소에서 브라이언 드루커(Brian Druker)박사팀이 개발한 것을 1993년에 제약회사가 특허출원을 했습니다. 게다가 글리벡을 만드는데 드는 원가를 계산해보아도 1/20도 되지 않았어요. 곧 우리는 이것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2002년 말 경에 인도의 제약회사들이 글리벡과 똑같은 약을 1/10~1/20의 가격으로 팔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 인도산 제네릭(복제약)을 수입하든지 우리나라 제약회사도 글리벡과 똑같은 약을 만들면 되겠지요? 하지만 특허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특허 때문에, 훨씬 싼 복제약을 수입할 수도, 만들 수도 없었습니다.

당시 인도에서도 글리벡 한 달 약값은 약 300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인도 암환자지원협회(cancer patients aid association)는 인도제약회사로부터 약을 사서 환자들에게는 더 싸게 공급하고 있었어요. 인도정부는 1972년에 의약품에 대한 물질특허를 폐지하였기 때문에 인도 제약회사는 글리벡과 똑같은 약을 만들 수 있었어요. 하지만 인도에서도 글리벡과 똑같은 약을 생산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인도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여 2005년부터 물질특허를 허용해야 했거든요. 1995년 세계무역기구의 출범과 함께 그 부속협정인 무역관련 지적재산권협정(이하 트립스협정)이 발효되어 전 세계적으로 특허제도가 통일되었습니다. 그 전까지 각국은 특허제도가 없는 곳도 있고, 식량이나 의약품, 농산물 등 인간의 삶과 생명에 필수적인 것에는 특허를 허용하지 않는 곳도 있었고, 특허보호기간도 달랐어요. 하지만 트립스협정 발효 이후 동물, 인체 등을 제외하고는 모두 특허의 대상이 되었고 20년간 특허보호기간을 보장해야했습니다. 특허권자는 특허보호기간동안 혼자서만 특허품을 생산, 판매, 수입, 수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집니다. 혼자서만 약을 생산할 수 있으니까 그 독점력으로 약값도 비싸게 부를 수 있는 것이죠.

제약회사는 더 나은 치료를 위한 의약품을 개발하기보다는, 기존 약에 조금 변화를 주어 계속 특허를 걸어 독점기간을 연장하곤 합니다.

노바티스가 글리벡에 특허신청을 한 사실을 알게 된 인도 암환자지원협회는 특허를 주어서는 안 된다며 맞섰습니다. 그 결과 인도 첸나이 특허청은 2006년 1월에 글리벡 특허신청을 반려하였고, 노바티스는 고등법원과 특허심판원(IPAB)에서도 거듭 패소하였어요. 그러자 글리벡 특허 거절의 핵심적인 근거가 된 인도특허법 제3(d)조의 해석에 대해 대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고, 그 최종결론이 올해 4월 1일에 나왔습니다. 인도특허법 제3(d)조는 1995년 이전에 개발된 약에 비해 ‘상당히 개선된 치료효과’를 입증하지 못하면 특허를 얻지 못하도록 합니다. 즉 인도대법원의 판결은 지금의 글리벡이 1990년대에 개발된 글리벡에 비해 형태가 조금 바뀌었을뿐 치료효과의 차이는 별로 없기 때문에 특허를 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신약이라고 하면, 혹은 특허를 받았다고 하면 획기적이고 더 좋은 것일 거라고 기대를 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약회사는 더 나은 치료를 위한 의약품을 개발하기보다는 오히려 기존 약에 조금 변화를 주어 계속 특허를 걸어 독점기간을 연장합니다. 제약회사들은 하나의 약에 하나의 특허만 거는 것이 아니라 염, 이성질체, 용량, 용법, 용도 등에도 계속 특허를 겁니다. 이렇게 하면 각 특허기간이 20년이니까 독점기간이 계속 늘어날 수 있으니까요. 인도대법원의 판결은 초국적 제약회사의 이런 얄팍한 술수를 인도에서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이번 인도대법원의 판결은 초국적 제약회사의 얄팍한 술수를 인도에서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영화배우 안성기씨가 TV에 나와서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아프리카에 사는 사람들을 후원하자고 호소를 하기도 하고, 글리벡보다 비싼 약들도 많지만, 이번 인도대법원의 판결은 유독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왜냐면 이 판결의 영향은 전 세계 인구의 10%의 생명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2009년 세계의약품 시장 규모는 8,370억 달러(약 1,068조원)로 메모리 반도체 시장(08년 456억 달러)의 약 17배에 달하는 규모입니다. 어마어마하지요? 이중에서 북미, 유럽, 일본시장이 약 80%를 차지합니다. 이 사실은 초국적제약회사에게는 누가 돈을 내고 약을 먹을 수 있는지와 같은 말입니다. 돈이 되지 않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에 사는 환자들은 초국적제약회사에게 ‘고객’이 아닙니다. 초국적제약회사의 ‘고객’이 되지 못하는 이들은 어떻게 약을 먹고 있을까요? 이들에겐 인도가 약국입니다. 인도의 제약회사들은 전 세계 인구의 10%에게 값싼 제네릭(복제약)을 공급하고 있어요. 특히 120개국이 넘는 개발도상국에 공급되는 에이즈치료제의 90%가 인도산입니다. 그래서 인도는 “세계의 약국”이라고 불립니다. 인도가 세계무역기구를 탈퇴하지 않는 이상 한국이나 미국처럼 특허를 막 줄 것인지 치료효과가 나아졌을 때만 특허를 줄 것인지가 이번 대법원 판결에서 판가름 난 것이고, 이는 “세계의 약국”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특허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요? 약은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할까요?

글리벡의 사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도 1993년에 출원된 글리벡의 최초 특허는 올해 만료되지만 다른 특허가 2020년대까지 있습니다. 이 외에도 사연 있는 약들이 많습니다만 이야기를 마치며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특허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요? 약은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