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공세와 신공안정국, 87년체제 이후를 둘러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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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공세와 신공안정국, 87년체제 이후를 둘러싼 전투
  • 정정훈 (수유너머N)
  • 승인 2013.09.29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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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공안정국, 단지 과거 회귀인가?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등이 연루된 RO(Revolutionary Organization)사건이 터진 이후 한 동안 모든 이슈는 종북 이슈로 빨려 들어갔다. 이미 지난해 총선과 대선을 거치면서 정치권으로부터 심심치 않게 발신된 종북몰이는 조중동과 같은 수구언론, 그리고 일베나 어버이연합 혹은 보수기독교도를 중심으로 한 민간 극우대중과 결합되면서 현재의 지배체제에 비판적이거나 반대적 경향을 표출하는 모든 이들을 정조준하여왔다. 그리고 혁명조직을 뜻하는 RO사건은 종북이라는 모호한 소문의 실체를 확인해주는 증거와 같은 역할 하였다.

하지만 이 사건이 국정원의 불법적 선거개입문제와 박근혜 정권의 정통성 문제, 그리고 국정원개혁이라는 맥락 속에서 발생한 만큼 대중들이 박근혜 정권과 국정원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것만은 아니다. 물론 전반적인 여론은 이석기 의원을 비롯한 RO 조직원이라고 지목된 사람들과 이들의 모판인 경기동부연합에 대한 혐오와 분노가 우세하지만 그렇다고 국정원의 불법선거개입과 개혁이라는 쟁점이 완전히 사그라진 것도 아니다. RO사건을 계기로 조성된 신공안정국의 와중에서 지배세력은 상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완벽하게 대중적 지지를 장악하고 있는 것만은 아닌 형국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적지 않은 진보적 언론들과 지식인들이 양비론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국정원과 경기동부연합이 모두 군부독재시대의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역사의 시점을 과거 군부독재시대로 후퇴시켰다는 비판이다. 물론 이러한 비판은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곱씹어 봐야할 쟁점들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과거회귀' 내지는 '후퇴'의 패러다임은 현재 지배세력의 종북공세와 현재 조성되고 있는 신공안정국이 함의하는 보다 큰 맥락과 의미를 비껴가고 있다. 현재의 종북 정국은 단지 과거에 매몰된 두 세력이 벌이는 시대착오적 해프닝이 아니라 한국의 사회체제 변동이라는 현재적 맥락 속에서 그 의미를 따져봐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87년체제의 시효만료

종북공세와 신공안정국은 한국사회의 지배연합이 기득권추구 회로와 권력을 영구적으로 공고화기 위한 새로운 사회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다시 말해 소위 87년체제라고 불리는 (형식적) 민주화체제를 종식시키고 신자유주의라는 사회경제적 틀을 영구적으로 유지하며 이에 대한 저항을 무력화하려는 기획 속에 작금의 종북공세와 신공안정국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87년체제를 제도정치의 관점에서 규정하자면 독재세력의 상대적 우위 하에서 독재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정치적 타협을 통해 형성된 정치권력의 작동체계라고 규정된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 차원에서 보자면 87년체제는 독재체제를 전복한 대중의 힘에 대한 제도정치권의 반응으로서 형성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민주화의 실질적 동력이었던 대중의 반체제적 힘을 ‘정치적 재현’을 통하여 특정한 체제 경계 내로 흡수하고 필요에 따라 동원하도록 하는 것이 이 체제의 핵심이다. 즉 대중의 반체제적 힘에 바탕하여 성립하였으나 그 대중의 힘을 대의정치제도를 통하여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이 87년체제의 중핵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사회의 기득권연합, 즉 사익추구블록에게 야당으로 표상되는 정치권의 민주화세력은 ‘주적’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이 세력의 기득권의 확장과 유지에 가장 위협이 되는 반체제화되기 쉬운 대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배세력에게 87년체제는 자신들의 기득권에 언제나 위협적 요소를 담지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87년체제가 대중의 힘과 그 투쟁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고 이는 대중의 힘을 체제내적으로 관리할 필요성으로 이어진다. 대중의 힘을 과거 독재체제와 같이 폭력으로 억압만 할 수 없고 어떤 식으로는 체제의 경계 내에서, 그 한계를 넘지 않도록 그 힘을 통제해야 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합법적 운동으로서의 시민운동이 등장했으며, 개혁입법을 통한 제도개선이 이루어졌고, 노사정위원회를 비롯한 가버넌스가 강화되었다. 하지만 대중의 힘은 언제든지 기득권 연합의 사익추구회로를 위협할 수 있는 잠재적인 위험요인으로 남아있게 된다.

그런데 1997년 IMF 구제금융사태와 이로 인해 본격화된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은 지배세력에게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노골적인 이윤추구가 하나의 사회적 덕목이 되고 합리성으로 부상하면서 지배세력은 경제적 이익을 전방위적으로 추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를 정당화할 수 있게 되었다. 신자유주의의 본격화는 지배세력에게 '경제적 자유'를 바탕으로 정치적 권력의 일방적 장악을 다시 모색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준 것이다. 소위 '민주정권'의 수장이었으며, 그 자신이 대중의 힘에 기대어 집권했던 노무현 전대통령의 말처럼 이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 그렇다면 권력을 잡은 시장이 정치권력을 영구히 접수하려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87년체제의 민주적 계기는 이제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이다.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과 더불어 87년체제의 유통기한은 이제 사실상 끝난 것이다.

시대착오적 퇴행이 아니라 새로운 분기점일 수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종북공세는 이러한 지배연합의 헤게모니에 저항하는 세력들을 위험하고 혐오스러운 존재들로 낙인찍음으로써 대중과 진보운동의 연결고리를 끊으려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을 통해 지배연합은 87년체제의 잔재를 걷어내고 신자유주의 질서에 부합하는 정치체제를 구축하려 하고 있다. 그 체제는 지배연합의 사익추구를 안정적으로 보장하고 이에 대한 실제적 저항행동을 최대한 억압하는 것을 기조로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체제의 구축을 위해서는 87년체제의 민주적 계기, 즉 대중의 힘을 확실하게 무력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체제의 경계 내부에서, 즉 체제 자체를 위협하지 않는 합법적 수준에서도 대중의 힘이 표출되지 못하도록 하거나 그러한 힘을 최소화하는 방식을 통해 추구된다.

이는 제도 정치적으로는 새누리당 세력의 준영구적 집권을 목표로 하는 듯하다. 1997년 대선과 2002년 대선에서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세력에게 권력을 넘겨준 경험이 있는 새누리당 세력으로서는 2007년 대선에서 승리한 자신들의 집권을 영속화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려 했던 것 같다. 치안기구의 강화와 언론장악, 시민사회에 대한 고사전략, 사회운동에 대한 강도 높은 탄압 등이 이러한 의도를 드러내준다. 그러나 MB정권은 무능력과 파렴치성으로 인하여 이 과제를 달성하지 못했고 이는 곧 19대선에서 새누리당 세력(당시는 한나라당)의 집권이 불투명한 상황으로 이어졌다. 민주당 세력의 무능력과 무기력과 더불어 정권과 기득권세력의 총력투입으로 어렵게 2012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새누리당 세력으로서는 영구적 집권을 위한 기반확보를 위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고 이 프로젝트를 계속적으로 추진할 듯 보인다.

현재의 상태는 기득권연합의 힘이 대중의 민주적 힘을 완벽히 압도하지는 못하는 상황이다. 불안한 우위라고 할 수 있다. 이 불안한 우위를 안정적이고 영구적인 우위로 전환하고 그러한 우위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영구집권체제를 구축하려는 시도라는 맥락에서 종북공세와 신공안정국의 의미망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전투이다. 87년체제의 시효만료 이후 한국사회에서 어떤 성격의 사회체제가 들어설지를 결정할 매우 중요한 전투인 것이다. 만약 이 싸움에서 진보진영 내지는 민주세력이 패배하게 된다면 우리는 또 다른 형태의 공안사회, 새로운 성격의 독재사회를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싸움은 차후 한국사회의 성격을 둘러싼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잘 싸우는 것이 매우 중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