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은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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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은 생명입니다
  • 천주교인권위
  • 승인 2013.10.3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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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훈민 (진보넷 활동가 & 변호사)

 

▲ 산골마을에 빼곡히 들어서있는 경찰병력. 경찰은 공사현장에 주민의 출입을 금지하고 한전 공사차량을 출입시키는 일을 하고있다. 밀양 바드리마을 입구

10월 초 밀양송전탑 인권침해감시단 활동을 끝내고 거창 시골집으로 미뤄뒀던 하루짜리 휴가를 갔습니다. 하수내 마을. 거창에서도 오지에 속하는 마을입니다. 송전탑은 없습니다. 씁쓸하지만 다행입니다. 시골집 마당 한 구석에 수박 세 덩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수박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닌데, 왠 수박일까? 어머니께 여쭤보았더니, 여름에 놀러왔던 사람들이 뱉어 놓은 씨앗이 자라서 수박이 되었다고 합니다. 씨앗을 땅에 잘 뱉기만 해도 열매를 맺습니다. 땅이 아니라 아스팔트에 둘러싸여 살아온 저에게 아무렇게나 뱉어버린 씨앗에서 땅이 키워낸 수박 세 덩이는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땅은 생명을 키웁니다.

밀양 송전탑 분쟁에는 제도화된 권리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재산권, 환경권이나 건강권도 아니고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이었습니다. 밀양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8년 동안 정부와 한전에 맞서 싸울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재산권 침해가 있다고 하나, 8년을 유지시킬 힘이 될까? 올해 6월 인권침해조사단에 참가했던 의사 선생님의 견해에 따르면, 어르신들의 땅에 대한 애착과 그 의미는 우리와 다르다고 합니다. 도시민들은 이해할 수 없는 땅에 대한 근원적인 애착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도시민들에게 땅 1평은 곧 돈이지만, 밀양 어르신들에게 땅 1평은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그 무엇이라고 합니다. 저는 아직 이 부분을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던진 씨앗을 품고 수박으로 키워낸 시골집 땅을 보면서 신비로움을 느꼈지만, 아직 어르신들과 저의 근본적인 거리감을 메워버릴 정도는 아닙니다.

도시민들에게 땅 1평은 곧 돈이지만,

밀양 어르신들에게 땅 1평은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그 무엇

어르신들 수준에서 땅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재산권, 환경권, 건강권, 주민참여권, 전력수급계획, 원전건설, 전원개발촉진법과 관련된 법제도, 공사 과정에서 공력권 행사의 문제 등 우리가 밀양 송전탑 싸움에 침묵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많습니다. 저의 주 관심사는 재산권, 건강권과 주민참여권입니다.

법원에서 인정하는 농민의 가동연한(일을 해서 소득을 벌 수 있는 나이)이 65세 정도입니다. 밀양 송전탑 싸움에서 80세가 넘은 어르신들을 뵙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주민들이 고령에 힘든 노동을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누가 언제 일을 못하게 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한전에서는 송전탑과 송전선로가 인근에 건설되더라도 ‘농사는 계속 지을 수 있다’는 전제 하에, 광범위한 지역에서 토지의 가치가 폭락하는 현상을 무시하고 송전탑과 송전선로 바로 아래 주민에게만 소액의 보상금을 지급합니다. 그 외 주민들은 보상을 받지 못합니다. 고령의 주민들이 더 이상 영농활동을 하지 못한다면 이들은 어떻게 될까. 송전탑과 송전선로 건설이 예정된 후 송전탑을 중심으로 토지가격이 하락하였고 일부 지역에서는 매매와 담보대출이 불가능해졌습니다. 노후연금제도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한국에서 농민들의 노후연금은 사실상 토지뿐입니다. 현 상황에서 송전선탑과 송전선로 주변의 주민들은 일할 능력을 상실한다면 자신의 삶을 유지할 방법이 없습니다. 국책 사업이라는 미명 하에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진행되는 송전탑 건설은 밀양 어르신들의 재산권 침해를 넘어서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재산권 침해를 넘어서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는 송전탑 건설

송전선이 지나가면 항공방제를 못해서 밤농사를 못 짓게 된다는 어떤 할아버지의 탄원서를 읽었습니다. 약을 치지 않으면 벌레가 많이 생겨서 밤을 시장에 팔기가 힘듭니다. 연세가 많은 어르신들에게 항공방제만이 유일한 방법인데 송전선로 좌우 150미터 이내 지역은 항공방제 제한지역입니다. 할아버지는 밤농사로 한해에 700~800만원 법니다. 수입의 전부입니다. 한전에서 보상금 154만원 나왔습니다. 단 한번만 주는 보상금입니다. 1억이 넘었던, 밤나무가 심어진 산은 송전선 때문에 더 이상 팔리지도 않습니다. 할아버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수십 년 간 밤나무 심으며 일궈온 산을 껴안고 그냥 죽어야 하는 걸까요? 아니면 평생을 시골에서만 살아온 분이 도시로 와서 폐지를 주우며 살아가는 것으로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할까요? 밤농사 짓는 할아버지는 글을 모릅니다. 이웃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탄원서의 말미에서 할아버지는 먹고 살게만 해달라며 ‘나라의 도리’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믿고 기대고 싶은 ‘나라의 도리’가 우리나라에는 없습니다.

전자파로 인한 건강권 침해 가능성은 여전히 논란에 싸여 있습니다. 암 발생 가능성을 주장하는 측이나 가능성을 부인하는 측이나 모두 세계보건기구(WHO)를 근거로 들면서 각각 다른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생물 분야의 특성상 이 논란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입니다. 생물분야는 불확실합니다. 1957년에 판매된 임산부용 입덧 방지제인 탈리도마이드는 각종 동물실험에서 부작용이 거의 드러나지 않아 부작용 없는 기적의 약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무려 1만 명의 기형아가 태어났고 생존한 2,800여 명은 여전히 장애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이옥신도 10~15년 전에는 발암인자라는 사실을 모르다가 최근에야 입증되었습니다. 2011년부터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산모, 영유아 등 약 120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사람이 죽고 다치고나면 무엇으로 보상할까요? 돈이면 충분한 보상이 될까요? 건강권 침해가 현실화 될 경우 재산권 침해와는 달리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전자파로 인한 암 발생에 대해 전문가들이 경고하고 있음에도,

100% 입증되진 않았으니 문제될 것 없다는 정부와 한전의 주장은 무책임합니다

미국을 비롯해 여러 서구 국가들은 불확실성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건강권 등을 지키기 위해 다양한 사전예방책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버지니아주와 워싱턴주는 송전선의 잠재적인 인체유해성에 관해 지속적으로 연구·발표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콜로라도주는 송전설비에서 방출되는 전자파를 감소시키는 모든 대안들을 고려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전자파를 고려하여 최적경로를 선택하고 분배 시스템을 디자인하고 전기설비를 새롭게 개발하는 등입니다. 네덜란드는 만일을 대비해 전자파 규제 기준을 2mG로 잡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833mG) 전문가들이 전자파로 인한 암 발생 증가에 대해 경고하고 있음에도 100% 입증되진 않았으니 문제될 것 없다는 정부와 한전의 주장은 너무 위험하며 무책임합니다. 우리나라도 송전선 주변 지역의 주민들의 우려를 해소하고 건강권 침해를 예방하기 위해 사전예방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독일은 신재생에너지 강국입니다. 독일도 송전탑과 송전선로를 건설합니다. 우리와 같이 심각한 사회 혼란은 없습니다. 국민성 차이일까요? 독일 국민들은 이타적이고 우리나라 국민들은 이기적입니까? 아닙니다. 독일은 입지선정부터 시작하여 지중화선로, 보상, 향후 대책까지 모든 부분에서 피해지역 주민들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절차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독일 시민들은 매일 산에 오르며 공사를 막지 않아도, 경찰·용역·한전직원들에게 모욕을 당하거나 폭행을 당하지 않아도, 길거리에서 집회를 하지 않아도, 생명을 걸고 무기한 단식을 하지 않아도, 분신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아도 자신들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습니다. 국민성의 차이가 아니라 법제도의 차이입니다.

피해지역 주민들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절차를 보장하는 독일

한국과 독일 간 법제도의 차이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1978년 한전 등 전원개발사업자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졌던 법인 「전원개발촉진법」를 바탕으로 사업을 추진합니다. 산업통상자원부장관의 실시계획 승인을 받으면 다른 20여개 법률에 따른 인허가 등을 받은 것으로 의제됩니다. 국립공원에도 송전탑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현재 북한산, 설악산, 내장산, 월악산 등 전국 20개 국립공원에는 283개의 송전탑이 있습니다. 주민공청회에 관한 규정이 있으나 사업자가 단순히 의견을 듣는 것에 불과합니다. 의견 반영여부도 사업자에게 맡겨져 있어서 실효성을 담보할 수가 없습니다. 밀양에서도 주민설명회는 매우 형식적으로 진행되었고 처음에 주민들은 초고압 송전선로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1978년, 한전 등 전원개발사업자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졌던 「전원개발촉진법」

「전원개발촉진법」같은 법률을 폐지하거나 대폭 개정하고, 독립적인 기구를 통해 사업의 타당성에 대한 검증이 이루어지게 하며, 투명한 과정을 통해 정보가 공개되고 민주적인 의견수렴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송전탑 분쟁의 원인은 피해지역 주민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여전히 개발독재 시절의 타성에 젖어 있어서 군사작전을 펼치듯이 공사를 진행하는 정부와 한전에게 송전탑 분쟁의 책임이 있습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밀양 송전탑 건설을 중단하고 송전탑 건설과 관련된 문제들을 원점에서 재검토를 해야 합니다. 사회 각계의 의견을 종합하고 외국 법제도를 참고하여 제도를 정비하고 광범위한 실태 조사를 진행하여 피해 지역 주민들의 고충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 밀양 동화전 마을 95번 공사현장 부근. 경찰병력이 교대로 산 속에 상주하고있다. 체크무늬 상의를 입은 이가 마을주민이다. 과도한 경찰력이 상주하면서 채증이 빈번하고, 대치상황에서 주민들에 대한 인권침해가 일상이 되다시피 하였다.

 

개발독재 시절의 타성에 젖어 군사작전을 펼치듯 공사를 진행하는 정부와 한전

어르신들은 평생 땅을 만지며 땅이 생명을 키워낸 것을 지켜보며 살아 왔습니다. 그 마음을 헤아린다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밀양 송전탑 싸움이 실마리를 찾을 때까지 어르신들과 함께하려 노력하겠지만, 어르신들의 가장 깊은 마음을 공유하지 못하고 어쩌면 끝까지 그럴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타인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타인은 사라지고 자신의 아집만 남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열심히 어르신들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현장에서 천주교 성직자, 신자들을 만나면 힘이 납니다. 법과 제도가 보호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편에 선 천주교 분들의 모습에서 가장 낮은 자와 함께 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 10월 7일 밀양 금곡헬기장에서 봉헌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미사. 헬기의 잦은 이ㆍ착륙으로 미사가 오랜 시간 지연되었다. ⓒ천주교인권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