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 한 알 같은 믿음이 자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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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 한 알 같은 믿음이 자라다"
  • 박종인 (예수회 신부)
  • 승인 2013.11.29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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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을 맞이하며-

작년 대림시기를 맞던 무렵 내 마음에는 추워지는 날씨에 대한 푸념보다 대선에 거는 기대가 더 컸었다. 그러나 수긍할 수 없는 대선 결과로 머리는 둔기로 얻어맞은 듯, 한 동안 기능을 멈춘 듯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이 부조리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캐어묻기로 하고, 한 해를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좌절에 주저앉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마음 안에 깔려있었다. 이것이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계속 찾아 나서도록 했다는 걸 또 한 해가 지나가려는 지금 되새기게 된다. 개인적으로 내가 주로 접했던 현장은 쌍용자동차 해직 노동자들이 있는 곳과 제주도 강정마을인지라 주로 노동문제와 평화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수면 위의 주제가 되어왔다. 그러나 현장에서 끊임없이 소식을 듣게 되는 콜트콜텍, 밀양 송전탑, 용산 참사,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투쟁 등등 이곳저곳의 어려움은, 이들이 안고 있는 각 주제의 기저에 '인권'이라는 근본 주제가 있음을 끊임없이 확인하도록 해주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모든 이가 함께 사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한 해가 다 가고 있는지 모를 만큼 정신없이, 우리 사회는 대선 이후 부정 선거에 대해 온갖 증거와 그걸 덮으려는 온갖 거짓말이 뒤섞인 혼돈의 한 가운데에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금 작년과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다. 아직 선거가 안 끝난 것 같다. 선거가 불의하게 치러진 것이 분명하기에 그럴 수밖에. 그만큼 주류 언론들은 제 기능을 방기한 채, 현 정부와 재벌 등 기득권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이 부정을 좀 더 알리고 싶은 내적 욕망을 느끼는 요즘이다.

부정하게 정권을 획득한 정부가 재벌과 친밀한 관계를 정리할 리 없고, 복지정책에 신경 쓸 리 없으며, 사회적 불안을 조장하여 안보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라 국민들에게 교육시키지 않을 리 없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미래란 없다. 또한 안보 논리 앞에서 우리는 헌법을, 그것이 보장하려 하는 인권을 유린당해 왔으며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데도 목소리와 힘을 합치지 못하고 있다. 권력은 인간의 존엄함을 지켜주라고 국민으로부터 양도된 힘임에도 오히려 인간의 존엄함에 폭력으로 대응하며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다.

그만, 고통당하는 이들을 만나고 말았다

조용히 지내도 될 걸, 난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어차피 가난하게 살고자 수도자가 된 것 아닌가? 그래, 맞다. 그래서 수도자가 됐는데 그만, 고통당하는 이들을 만나고 말았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품위가 훼손당하고 있는 현장을 어쩌다 보고야 말았다. 나 하나가 겪는 고통이라면 그건 하느님이 내 성장을 위해 도모하신 선물이라 받아들일 수 있으나 다수가 겪고 있는 이 부조리는 사실 우리가 빚어낸 것임을 알았을 때 나 홀로 발뺌할 수는 없었다. 결국, 우리는 형제자매로서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들임을 알았기에 "함께 살자"는 그 외침에 목소리를 보태고 싶었다.

신자유주의, 글로벌 경제 등의 전략은 지역 사회의 벽을 허물어 이 전략을 수행하는 주체의 영역을 넓히려는 욕망을 실현시킨다. 세계를 지구촌으로 묶고 함께 살자고 하면서도 그것이 결국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지구촌 안에서 수익이 될 만한 지역(그곳의 사람들)을 정리하여 수익을 창출하려 하기 때문이다. 재개발을 명분으로 기존의 거주자들을 몰아내듯 말이다. 그러므로 이 거짓된 공존의 슬로건 앞에서 참되게 함께 살기를 요청하는 이들이 되어야 함을 현장에 나보다 먼저 나와 있던 이들이 가르쳐 주었다. 천주교인권위원회, 빈민사목위원회, 환경사목위원회, 정의평화위원회 등 다양한 단체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만이 아니라 수월치 않은 일상을 견디며 살아가는 소시민들 중에서도,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고통을 분담하려는 이들이 거기 이미 있었음을 알게 된 것은 매우 소중한 체험이었다.

그리고 어려움에 처한 이웃과 함께 하려는 이들도 만났다

하느님께서 내게 당신을 닮은 심장을 주셨음을 나는 믿는다. 인간 각자가 지닌 위대한 가치를 지켜주려는 것은 곧 하느님을 하느님답게 모시려는 경건한 태도이다. 그래서 현장에서 나의 가난한 존재를 함께 나누는 것이 기도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결국 하느님께서 나를 그리로 부르셨으니 그 부르심에 충실하고자 한다. 내게 유쾌한 천성을 주셨으니 이왕이면 유쾌하게 따르고 싶다. 이 경험들은 내가 수도자의 삶을 살고자 서약한 ‘청빈’의 의미를 뚜렷이 보여줬다. 청빈은 부를 앞세워 자본(금융)의 영역을 넓히려는 우상의 세상에 매우 강력한 대항마인 것이다.

현장에서 나의 가난한 존재를 함께 나누는 것이 기도가 된다는 것

역사상 그 어떤 부조리하고 악한 정권도 영원할 수 없었다. 고통의 기간이 좀 길어진다고 해도 나는 그 종지부를 보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나는 기다릴 것이다. 기쁨의 때가 찰나에 머문다 해도 기쁨의 때는 옷을 갈아입고 또 올 것임을 안다. 게다가 믿는 이들의 세상은 이곳이 전부가 아니다. 그들은 영원한 삶을 믿기 때문이다. 무엇을 두려워하랴! 음... 겨자씨 한 알 같던 믿음이 일 년 새 조금은 더 자라났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