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의 ‘수형자 선거권 보장’ 판결을 환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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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의 ‘수형자 선거권 보장’ 판결을 환영하며
  • 전박길수 (전쟁없는 세상)
  • 승인 2014.02.26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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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8일 헌법재판소에서 공직선거법 헌법소원에 관한 판결이 있었습니다. 심의 대상이 된 조항은 금고형 이상의 형을 받아서 감옥에 수감된 사람들, 혹은 감옥에 수감되는 것이 유예된 집행유예자들의 선거권을 박탈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선거에 출마할 수도 없고 투표를 할 수도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날, 헌법재판소는 집행유예자, 수형자들의 선거권을 보장하라고 판결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투표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난 2012년의 총선과 대선에서 투표하는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로 1년 6개월 징역형을 받고 수감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병역거부를 하게 된 이유는 군대가 시민의 인권과 평화를 지키기 못하고 오히려 위협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은 적과도 싸웠지만 민간인 또한 학살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 군은 여전히 이러한 사실들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성찰하지 않는 집단은 또 그런 잘못을 저지르게 마련이지요. 전쟁이 끝나고 80년 광주에서 시민들을 공수부대가 진압하고 2003년 이라크에 파병하는 것들은 그러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모습의 군대로 평화를 지키는 것을 바라는 것보다 군대를 바꿀 수 있는 행동, 아니 군대는 바꾸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제 신념에 따르는 행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군대를 가지 않았고 그에 대한 처벌로 수감되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수감되어 있는 기간에 총선과 대선이 모두 있었습니다. 국회의원은 4년, 대통령은 5년 동안 국정에 임하는데, 저의 1년 6개월이 하필 선거기간과 겹쳐서 투표를 할 수 없는 것이 무척이나 불합리하게 느껴졌습니다. 국가가 저의 병역거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수감기간이 끝나면 저 또한 국가가 인정하는 시민일 텐데, 저의 선택이 요만큼도 없이 다른 사람들이 뽑은 대통령과 정치인의 정부에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게 너무 이상했습니다. 또 누군가는 저와 같은 형을 받더라도 때가 맞으면 투표를 할 수 있으니 불평등한 법률이었습니다.

제가 감옥에 수감되면서 놀랐던 것은 제 생각보다는 꽤 많은 것이 감옥 안에서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나 선택 등에 일정한 제한이 있지만, TV시청, 신문구독, 음식물 구매 등이 가능했습니다. 수감자들 사이의 폭력행위도 금지하고 있고 교정시설로부터 인권 침해를 받았을 때는 그에 대한 청원 및 구제를 할 수 있는 통로도 있었습니다. 어떤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 아니라 법으로써 수형자의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해주고 있다는 것이 신선했고 저한테도 다행이었습니다. 특히 수형자들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이나 청원을 많이 제출합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진정 사례 중에서도 교정시설에서 제출하는 것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수형자들이 기댈 수 있는 곳이 국가인권위원회정도밖에는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국가인권위원회의 위원장과 위원은 대통령과 국회, 대법원장이 지명을 하는데, 막상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뽑을 수 있는 권리는 수형자들에게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교정시설 안에서의 처우 문제에 있어서도 정치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그러니 감옥 안에서 수년을 지낸다고 해서 선거와 무관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법을 어겨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이들에게 선거권을 주는 것이 필요한 것인지가 고민입니다. 사실, 공식적으로 감옥이라는 명칭은 쓰이지 않습니다. 구치소나 교도소라는 이름이 붙어있지요. 그걸 통괄하는 조직도 법무부 산하 교정청입니다. ‘교정(敎正)’이나 ‘교도(矯導)’라는 말은 인간이 저지른 죄를 반성하게 하고 다시 사회로 내보낸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병역거부자, 용산 철거민, 국가보안법 피해자, 노조 활동가 등 국가와 정치적인 뜻이 맞지 않거나 국가의 탄압을 받아 수감된 이들에게 저 말은 ‘국가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라’는 뜻이 있으니 섬뜩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교도소의 옛 말이 형무소(刑務所)였던 걸 감안하면 그나마 괜찮은 변화라고 할까요.

교정시설이 내세우고 있는 교화라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고 그 한계 또한 분명해 보입니다. 한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는 데에는 원인들이 다양하게 있을진대 그걸 제한된 인력과 재정으로 해결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만나 본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는 너무 다양해서 몇 마디로 정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서 보이스피싱 사기를 치거나 도둑질을 하였고, 누군가는 쉽게 돈을 벌기 위해서 불법적인 일을 하였습니다. 어떤 경우는 사회적, 구조적인 문제가 더 영향을 끼친 것 같고, 어떤 경우는 개인적 성품이 더 좌우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 또한 수감기간 내내 법을 어긴 사람들에게 합리적인 처벌이라는 것은 어떤 걸까, 계속 고민했습니다.

과거에 비해 현재의 교정시설은 수형자들을 위한 교정시설의 교화 및 사회복귀 프로그램은 꽤 다양하게 있는 것 같습니다. 성폭력 가해자 교육, 종교집회, 직업훈련, 외국어 학습, 취업 지원 및 창업 교육 등이죠. 그런데 이런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제가 떠올린 의문은 이런 교화프로그램들이 생계를 위한 경제적 기술에만 치중할 뿐 시민의 덕목을 기르는 프로그램은 거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나가서 이런 기술을 익혀 돈을 벌고 착실히 살아라’라고는 가르치지만, ‘돈을 벌기 위해 이런 짓은 해서는 안 된다’라든가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타인을 고통받게 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은 접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수형자의 선거권이 보장되지 않았던 이면에는 이러한 ‘교화’에 대한 철학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어떻게 이끄는 것이 바른 것이냐 하는 게 ‘교정’이라면 현재 ‘교정’의 태도는 ‘나가서 다시 들어오지만 말아라’ 하는 소극적인 태도입니다. 수형자들은 우리 사회의 공통 규칙인 법을 어긴 사람들이니 이들을 교화하는 과정 중에 필수적인 것은 민주주의 국가로서 법의 중요성 내지 준법의 중요성을 이해시키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 했는데, 그런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자칫하면 군대에서 정신교육 하듯이 국가에 대한 사랑, 시민들의 철저한 준법정신만을 강조하는 교육과 프로그램들로 흐를 위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차라리 없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 평화와 인권 등 다른 사람의 삶에 관심을 갖고 공동체성을 함양할 수 있는 내용을 전하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가 민주주의 국가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일까요?

교정시설에서는 공중파 TV프로그램을 편집하여 드라마, 뉴스, 예능, 영화 등을 방송합니다. 그런데 시사나 토론 프로그램은 방송해주지 않습니다. 국가대표급 축구나 야구 경기는 이례적으로 실시간 중계도 해주고 올림픽 시즌에는 정규 프로그램 대신 스포츠 프로그램만 집중적으로 내보내는데, 총선은 존재감이 없고 대선의 비중 또한 아주 적습니다. 그러니 시설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매우 적습니다. 신문을 보더라도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구속되어 재판을 진행중인 미결 수용자(아직 형이 확정되지 않아서 이들은 투표할 수 있었습니다)들은 선거공보물을 한 번 받고는 부재자투표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헌재판결이 단지 수형자의 선거권을 기계적으로 보장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형자에게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미국의 반전운동가, 정치가였던 유진 뎁스

더불어서 저는 수형자의 투표권뿐만 아니라 피선거권, 즉 후보로 출마할 수 있는 권한도 보장되길 바랍니다. 1920년 정치가이자 반전운동가였던 미국의 유진 뎁스는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90만표를 얻었습니다. 당시 그는 1차세계대전 중 징집을 거부하라는 연설로 기소되었고 유죄판결을 받아 애틀랜타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었습니다. 90만표의 유권자는 그를 처벌한 국가를 불신하고 그에게 표를 던짐으로써 공안정국을 조성하는 국가에 제동을 건 것입니다. 비록 그는 당선되지 않았지만 이 선거를 통한 90만 명의 의사표시를 전국에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선거가 ‘민주주의 꽃’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누군가를 당선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선거를 통해 시민들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 그러한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하고 거기에 어떤 예외도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이지만 자유와 평등, 사회에 대한 관심과 기여 등은 여전히 부족합니다. 그런 걸 배울 수 있는 곳이 없으니까요. 저는 수형자들의 교정은 민주주의 사회에 한 시민으로 만드는 데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들의 인권을 보장하고 존중해주면서 사회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런 과정 중에 정치에 대한 접근권인 선거권이 보장되기를 바랍니다.

 

사진 출처) http://www.bibliotecapleyades.net/sociopolitica/codex_magica/codex_magica05.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