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번호 없는 세상을 꿈꾸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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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번호 없는 세상을 꿈꾸어 왔다
  • 장여경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
  • 승인 2014.02.26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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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은 흔히 몽상가라고 불린다. "실현성이 없는 헛된 생각을 즐겨 하는 사람"(네이버 국어사전)이라는 비아냥을 담고 있다. 정보인권 보장을 요구해 온 지난 십여 년 간 나도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특히 전자주민증을 반대하거나 주민등록번호 폐지를 주장하면 러다이트주의자 같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의 때라는 것은 때로 눈깜짝할 새 비현실을 현실이 되게끔 한다. 모두가 모르쇠하는 듯 했던 시스템의 문제가 한순간에 만천하에 드러나고 너나 할 것 없이 그에 대한 도전을 응원하는 날이 오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운동은 병 속에 편지를 써넣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 같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유동하는 공포>의 마지막에서 병 속의 편지 이야기를 꺼낸다. 근래 유래 없는 형사처벌 강화는 시민들의 요구로 나온 것들이다. 가난조차 엄벌하는 신자유주의, 이주민, 범죄자, 노숙인들을 인간 쓰레기로 규정하고 격리하는 정책들을 떠받치는 힘은 시민들의 지지이다. 그것은 그들의 공포에서 유래한 것이다. 위태한 경쟁 사회에서 자칫하면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낙오할지 모른다는 공포. 사회 안전에 대한 공포. 결국 우리는 공포에 맞서지 않고서 사회 연대를 달성하기 어렵다.

공포 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성의 목소리로 외칠 것인가? 세계인권선언을 읊을 것인가? 우리 마음의 깊은 곳을 건드리는 공포는 쉽게 극복할 수 없다. 그래서 바우만은 '병 속의 편지'를 쓰라고 했다. 지금 주변에서 읽어줄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편지를 병 속에 넣어 바다에 띄우면 훗날 누군가가, 깨인 생각을 가진 한 사람 쯤은 그 편지를 읽어주지 않을까.

나는 그런 심정으로 주민제도가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해 왔는지 모른다. 이건 정말 잘못되었어. 하지만 지난 2003년 인터넷 악플이 전 사회의 지탄을 받게 되면서 주민번호는 정부와 정치인들, 언론과 시민들에게 인터넷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능 수단으로 간택되어 왔다. 4번의 헌법적 도전 끝에 마침내 2012년 헌법재판소에서 그 위헌성을 인정받기 전까지 인터넷 본인확인제는 마구마구 확산되었다. 이 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책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여배우들이 악플 때문에 죽어간다는데 익명의 권리는 팔자좋은 소리였다.

이제 주민번호 폐지 요구는 더이상 몽상이 아니다. 카드 3사에서 사상 초유의 대규모 유출 사고가 발생하였다. 개인정보 유출 규모가 사고 때마다 최대치를 경신해 왔지만 전국민 수를 훌쩍 초월하는 1억 건의 유출 소식은 다시 한번 사람들을 놀래켰다. 더구나 대개의 사람들이 민감해 하는 금융 정보라는 것이 사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주민번호 개편 요구가 급물살을 탔다. 더이상 다른 대책은 나올 수가 없었다. 전국민 주민번호와 여기 연결된 금융 정보가 인터넷을 떠돌 지경이다. 급기야 대통령이 나서 주민번호 대체수단을 고민하라고 한마디 했다. 갑자기 언론과 국회, 정부 각 부처가 너나 할 것 없이 주민번호 문제를 떠들기 시작했다. 열흘 사이에 주민번호가 국민적 고민거리이자 해결이 시급한 국가 과제로 떠올랐다. 솔직히 어안이 벙벙했다.

그동안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날 때마다 정보인권 운동 진영은 주민번호 문제를 해결하라고 외쳤지만 외면당했다. 이 나라 국민들이 출생할 때 머리마다 부여된 이 번호는 사망할 때까지 변경할 수 없다. 이름도, 아이디도 국민이 원하면 변경할 수 있는 민주화 시대에도 정부는 주민번호만큼은 안 된다고 어깃장을 놓았다. 그 주민번호가 세계 인터넷에 유출되어 다른 사람이 나인 양 하거나 죽을 때까지 보이스피싱을 당해야 한데도 마찬가지였다.

민주화 정부도 국민 통제의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반민주 정부의 유물을 껴안고 말았다

주민번호가 무엇이길래 이다지도 신성한 것일까?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쿠데타 직후인 1962년 제정하여 1968년 북한특수 부대원이 청와대를 습격한 '김신조 사건'을 계기로 국민 번호 제도가 도입되었다. 목적은 간첩 색출과 국민 감시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 정권교체가 되자 비로소 전자주민증이나 주민등록제도에 대한 재평가가 시도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전자정부나 인터넷에서 주민번호가 편리하기 짝이 없는 국민 식별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경찰과 공무원들에게 결코 놓칠 수 없는 매력이었다. 민주화 정부도 국민 통제의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반민주 정부의 유물을 껴안고 말았다.

주민번호를 폐지할 때가 되었다. 물론 사회국가라면 국민에게 필요한 사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번호가 필요할 수도 있다. 어린아이들이 등록되지 못하거나 노인들의 소재도 파악하지 않고 죽어가도록 내버려둔다면 정부란 것이 영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설령 여기에 쓰기 위한 번호라 하더라도 그건 딱 그 목적으로만 사용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다목적으로 민간이나 공공이나 두루두루 사용되는 주민번호는 그만둘 때가 되었다. 주민번호 제도에 균열을 내는 첫걸음은 주민번호 변경, 그 신성함을 파괴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주민번호 제도에 균열을 내는 첫걸음은 주민번호 변경.

그 신성함을 파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2008년 옥션에서 1,800만 건이 유출되었을 때 정보인권 단체들과 피해자들 일부가 처음으로 안전행정부에 주민번호 변경을 신청했다. 거절당했다. 2011년 네이트에서 3,500만 건이 유출되었을 때 또다시 안전행정부에 주민번호 변경을 신청하였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이때는 시군구청장에 대해서도 변경을 신청하였고 거절 당한데 대하여 행정소송과 헌법소원으로 대응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유출 피해자들의 주민번호 변경 요구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정부 대책은 암호화와 같은 기술적 조치와 아이핀과 같은 대체수단 논의에만 그쳐 왔다.

덕분에 경찰과 국가정보원만 좋은 시절이었다. 공공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데이터베이스는 이들 것이나 다름이 없다. 모두가 주민번호를 기준으로 정렬되어 있는 데다가 개인정보보호법의 예외조항으로 그걸 제공받는데 영장도 필요가 없다. 검찰총장 아들로 추정되는 이가 있으면 구청에 전화 한통, 학교에 전화 한통 넣는 것으로 신원조회를 끝낼 수 있다. 인터넷 본인확인제가 시행되는 동안에는 민간 데이터베이스도 이들 것이었다. 다음 아고라에 촛불 시위를 가자거나 정부를 비판하는 게시물을 올린 사람의 이름과 주민번호를 파악하는 데 역시 영장은 필요하지 않았다. 세상에 이런 경찰 국가가 또 있을까? 그래서 경찰과 국정원은 인터넷 본인확인제 폐지를 끝까지 반대했다지.

공공과 민간에서 두루 사용되는 주민번호라는 연결자를 삭제해야

그러니 주민번호 폐지로 가는 두번째 길은 공공과 민간에서 두루두루 사용되는 주민번호라는 연결자를 삭제하는 것이다. 각자 자기 나름대로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이용할 일이 있으면 법률에 따라, 정보주체의 동의에 따라 정당한 절차를 밟을 일이다. 주민번호를 이 모든 개인정보 데이터베이스에 공통되게 써서는 안 된다. 특히 민간기업에서 자기 영리 사업 하는데 주민번호를 사용하는 일은 즉각 중지되어야 한다. 왜 내가 이동통신사에 주민번호를 줘야 하는데? 공공서비스에서도 원칙적으로 주민번호는 본래 제 목적으로만, 진정한 주민서비스 용으로만 사용될 지어다. 그것의 이름이 마침내 주민번호가 아닐 날도 올 것이다.

물론 쉬운 길은 아닐 것이다. 떠들썩했던 카드사 개인정보 유출 파동도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 여론의 뭇매에도 정부는 버티기로 일관해 왔다. 주민번호 변경은 어렵고 주민번호가 유출되었으니 아이핀을 대신 쓰라는 흰소리만 해댄다. 이 문제에 대한 국회 국정조사가 끝나는 2월 28일에 정말 무언가 하나라도 바뀌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이렇게 완고했던 시스템이 무너지려면 저항이 만만치 않을 텐데. 그러나 나는 믿는다. 병 속에 쓴 편지를 마침내 읽는 사람들이 나타났다고. 남은 건 시간 문제다.

마침내 병 속에 쓴 편지를 읽는 사람들이 나타났다고 믿는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흔히 신기술 반대자로 불리는 러다이트주의에 대해서 퇴행적이라고 보는 시각에 반대한다. 그건 자기 공장에서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권을 빼앗긴 노동자들의 반격이었으며 정당한 요구이기도 했다. 자기 공장에 달린 채 자기를 감시하는 첨단 CCTV에 대해 노동자가 반대를 제기할 수 없다면 찬란한 민주주의 담론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신기술을 따라가는 것이 진보이고 이것을 거부하면 시대착오적이라는 생각만큼이나 착오적인 것은 없다. 그러니 우리에겐 주민번호를 토대로 한 첨단 시스템을 반대할 권리 역시 충분하다. 중요한 기준은 인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