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항쟁 66주년, 이제 무엇을 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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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항쟁 66주년, 이제 무엇을 말할 것인가?
  • 강호진 (제주대안연구공동체 실장)
  • 승인 2014.03.28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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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관광객 1000만 명이 넘게 찾는 아름다운 섬 제주.

‘국민관광지’ 제주의 관문인 제주국제공항 역시 여전히 속울음을 하고있는 곳이다. 제주공항은 4·3의 생채기가 남아있다. 4·3 당시 군경토벌대에 의해 학살된 양민들의 유해가 발굴됐던 곳이다. 여전히 당시 피해자들의 숨결을 다 찾지는 못했다.

몇 해 전 제주의 4·3 유적지 곳곳을 직접 조사할 기회가 있어 다시 찾은 적이 있다. 4·3지도 제작을 위해 찾아 간 300여 곳의 4․3 유적지들. 아로 새겨진 기억의 자취는 희미했지만 이름난 관광지마다 피맺힌 절규와 아픈 역사는 다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올해로 66주년은 맞는 4·3은 역사의 반동을 꿈꾸는 자들의 목소리도 여전히 살아있다. 최근 새누리당 제주도당 고문이 4·3 국가 추념일 제정을 반대하다 결국 도민 반발로 고문직을 박탈당하는 일도 있었다. 제주에서만이 아니다. 일부 보수우익들은 제주4·3을 폄훼하고 정부차원의 4·3추념일 제정마저 반대하기도 했다.

지난 3월 17일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는 보수 우익 단체가 모여 ‘제주4․3사건 바로잡기 대책회의’ 출범대회가 열렸다고 한다. 서경석 선진화시민행동상임대표, 이선교 현대사포럼 대표 등이 상임대표로 이름을 올렸다. 향후 투쟁도 불사하겠다고 선언도 했다.

침묵을 넘어 저항으로 찾아온 진실

다시 제주의 4월이 다가온다. 제주4·3항쟁은 침묵을 강요당해왔던 역사였다.

적게는 3만 명, 많게는 8만 명에 이르는 희생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을 비롯해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에 이르기까지 4·3의 진실에 대해서는 굴종을 강요해왔다.

1979년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은 불온서적이 되면서 작가가 합동수사본부로 끌려가야 했다. 1987년에는 대학 내에 4·3 대자보를 쓴다는 이유로도 탄압의 대상이 됐다. 1997년에는 4·3 다큐멘터리조차 ‘이적표현물’이 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침묵의 역사는 오래가지 않았다. 80년대 4․3의 금기를 깨자는 운동이 시작됐다. 4·3관련단체를 비롯한 운동진영의 헌신과 도민들의 투쟁이 이어졌다. 이로 인해 99년 제주4·3특별법이 제정됐고 진상조사가 진행됐다. 이를 토대로 한국현대사 중 사실상 처음으로 정부차원의 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됐다. 노무현 정권 시절에는 대통령이 직접 제주도민에 대한 국가차원의 ‘역사적인 사과’가 있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 다시 역사의 반동이 있었다. 진실을 향한 발걸음을 멈추기 위해 정부차원의 4․3위원회를 폐지하려 했지만 도민들의 강력한 저항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일부 보수 우익들의 반발 속에서 박근혜 정부는 3월 18일 국무회의를 통해 4․3을 국가추념일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백비’에 채워질 역사를 위해

제주시 봉개동에 위치한 4·3평화공원. 제주의 역사를 공부하고자하는 탐방객들의 기본 코스가 된 곳이다. 이 곳에서 어두운 터널을 지나 처음 만나는 곳은 ‘백비’(白砒)다. 백비는 4․3의 ‘정명’(正名)이 여전히 미완성의 역사임을 알려준다.

역사의 양지로 나온 4․3의 완전한 진상규명을 위해서는 여전히 해야 할 일들이 남아있다.

4․3이 왜 일어났는지, 누가 탄압의 주역인지에 대한 문제이다. 정부의 4․3진상조사보고서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서는 한계를 인정하고 있다.

대통령이 사과하고 국가 지정 추념일로 위령제가 봉행된다고 하지만 슬픔과 위로만 있다. 실제 정부의 진상조사보고서에는 희생자를 3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실제 희생자로 인정된 인원은 절반 수준이다. 무엇보다 4․3 당시 외침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확장까지는 나가지 못하고 있다.

“피해자에 대한 명예보상을 이루어냈을지는 몰라도 당시의 중요한 흐름이었던 변혁적 이데올로기와 그것을 위해 싸웠던 운동가들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제주 4.3이 왜 발생했는가에 대한 답은 없는 셈이다. 현재 제주 4․3이 전체의 모습을 그려냈다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3과 관련한 미국 문제에 대해서도 해결해야 한다. 기계적 반미가 아니다. 실체적으로 진실을 캐내고 잘못이 있다면 역사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미국신문 뉴욕타임스는 2001년 10월 24일자에 「남한 국민들 1948년 학살의 진실을 찾다(South Koreans Seek Truth About '48 Massacre)」란 제목 아래 제주4‧3을 대서특필했다.

1948년 남한에서 실시된 선거에서 제주도에서만 유일하게 보이콧되자 남한에 있던 미국 사령관들이 분개해 했고, 그 이후 미군정에 참여했던 남한의 지도자들은 공산주의자 선동가로 여겨지는 섬 주민들을 ‘청소하는 작전’(a campaign to cleanse)을 전개하였다”고 보도했다.

실제 특히 4․3 당시 미군정의 진압사령관이었던 브라운 대령이 발언했다는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라는 내용을 상기시켜 보면 학살의 책임을 그냥 지나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국가추념일 지정-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2014년 4월 3일 4․3평화공원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해 4․3을 첫 국가 위령제로 봉행할 예정이다. 공영방송 KBS에서는 이를 생중계할 계획이라고 한다.

시대의 침묵을 뚫고 진실의 빛을 찾아 온 4․3. 그 근원을 찾아보면 현재의 강정마을 제주해군기지 문제처럼 제주라는 섬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누구나 4․3의 역사가 미래의 좌표가 되기 위해서는 평화와 인권의 가치로 승화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아픈 역사만으로 끝나지 않고 미래의 가치로 자리매김 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진실규명을 찾는 발걸음이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 변병생 모녀상 - 비설(飛雪) 봉개동 지역에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벌어졌던 1949년 1월 6일, 변병생(당시 25세)과 그의 두 살배기 딸은 거친오름 북동쪽 지역에서 토벌대에 쫓겨 피신 도중 토벌대가 쏜 총에 맞아 숨졌다. 후일 행인에 의해 눈더미 속에서 이 모녀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이 모녀상은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생명들을 기억하고자 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