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역형을 앞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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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역형을 앞두고
  • 오리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 승인 2014.04.30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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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평화적 시위는 과도하게 해석되어 각종 법률을 침해한 범법이 되곤 하는지

우리는 정치적 행위를 할 자유가 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헌법 21조에 보장된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갖는다. 집회와 시위의 종류는 성명서를 발간하는 것에서부터, 행진, 연극, 음악, 보이콧, 파업, 직접행동 등 매우 다양하며 이 모든 것은 완전히 향유될 수 있도록 보장되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지배적인 정치 행위자는 국가, 기업 혹은 전문가들이다. 사회적 소수자는 이 과정에서 거의 완전히 제외된다. 사회적 소수자들은 자신들을 대변할 국회의원을 당선시킬 수도, 자신들의 얘기를 들어달라고 로비를 할 수도 없기 때문에 대의제 민주주의와 다수결에 의해 움직이는 현대 민주주의의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이기가 쉽다. 사람들이 흔히 어떤 사회적 문제가 있을 때 왜 현존하는 채널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느냐고 비판하곤 하는데 문제는 그 채널이 각종 편견에 사로잡힌 힘센 특정 그룹이 관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집회와 시위의 자유는 이러한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전달하고 차별을 시정할 수 있도록 하는 마지막 수단이자 유일한 수단인 것이다.

 

우리는 정치적 행위를 할 자유가 있다

2년 전을 떠올려본다. 우리는 거짓과 비민주로 점철된 국책사업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걸어도 보았고 탄원도 해보았고 각종 토론회며, 거리 홍보전이며, 엽서쓰기며, 거리에서, 직장에서, 국회에서, 인터넷에서 최선을 다해 호소했다. 우리 눈에 비친 제주해군기지는 건설되지 않는 것이 타당하며 건설되지 않는 것이 정의였다. 새로운 해군기지와 관련해 너무나 많은 정보들이 주어지지만 한국에서 추가적으로 대규모 기지를 건설한다는 것이 국가안전보장에 얼마나 큰 이득이 될 것인지에 대해 국가는 제대로 된 답변을 주지 못했다.

정부와 해군이 내세우고 있는 근거는 늘상 냉전적 사고에 근거한 보이지 않는 적들의 위협이었다. 하지만 금강산으로 소풍을 가고 일본의 문화를 자유롭게 즐기며 중국으로 전파되는 한류에 자랑스러워하는 요즘 세대들이 과연 이러한 구시대적 프로파간다를 100% 수용할 수 있을까. 남방해역보호와 이어도 수역 보호라는 해군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 하더라도 이 갈등은 엄청난 규모의 새로운 해군기지라는 군사적 해법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해경의 업무로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접근되고 해결되어야 한다. 이것이 군이 아닌 일반 시민의 상식에 근거한 해법이다.

이뿐인가. 2012년 9월, 장하나 의원실에서는 제주 해군기지가 미국의 핵항공모함이 정박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계획되고 설계되었다는 증거를 밝혀냈다. 핵이 어떤 물질이고 미군의 핵항모들이 일으킨 각종 사고 및 오염들을 지면상 다 열거할 순 없지만 1998년 하와이 항구에 정박 중이던 미함정에서 오작동으로 주민들이 사는 시가지에 핵무기의 일종인 열화우라늄탄 3발이 발사되었던 사건을 상기하고자 한다. 이러한 거대한 탄약고를 누구도 자신의 앞마당에 두길 원치 않을 것이다. 게다가 국익에도 도움이 된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는 한 말이다. 자신은 하기 싫으면서 남에게 강요할 권리를 세상에 어느 누가 가지고 있단 말인가.

또한 해군은 해군기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에게 수많은 거짓말을 반복해왔다. 기지 건설과정에서 처음부터 주민의 의견을 반영하겠다고도 했고, 토지 강제수용은 절대 없다고도 했다. 그러나 현재 국가가 하고 있는 것은 스스로 뱉은 말을 이행하는 것 대신, 오히려 삼성물산과 대림산업의 사적이익을 변호해 주는 역할만 하고 있다. 강정에서의 경찰 폭력은 이미 일상이 되어버렸다.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법은 대한민국 정부 ‘공무’ 자체의 성격과 위법성에 대해서,

그리고 과도한 시위 저지 행위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는다

하지만 주류미디어는 우리를 외면했고 정치인들은 이 문제에 관한 한 여나 야나 모두 한마음 한뜻이었다. 기어이 구럼비 바위가 발파되었을 때 우리의 마음은 급해졌다. 삼성의 굴착기가 제주 해군기지 건설저지 운동의 상징인 구럼비 바위에 생채기를 내기 시작했을 때 우리의 행동 역시도 더 드라마틱하고 더욱 효과적으로 변화되어야만 했다. 마음은 급하고 분노로 가득 찼지만 우리는 저들과 똑같은 수준으로 떨어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다치게 하거나 생채기를 내는 대신 나와 내 동료들은 그 고통을 스스로가 대신 기꺼이 감수하겠다고 결심하였다. 나는 내 몸에 쇠사슬을 묶었고 폭약고 앞에서는 옆의 동지와 파이프로 팔을 연결했으며 천박한 주류미디어 덕분에 제주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고 있는 내 고향 서울의 시민들을 위해 삼성물산 앞에서 페인트를 뒤집어 썼다.

 

 
   
 
▲ 2012년 3월, 발파된 구럼비를 표현한 퍼포먼스, 서울 삼성물산 앞 
 
 

나는 집회나 시위를 기획하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어떤 법이나 정부의 정책이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였다. 덕분에 나는 집시법 위반, 공무집행방해, 업무방해, 일반도로교통방해 등 다양한 죄목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렇듯 현재 한국의 현실에서 집회와 시위의 1차적이고 직접적인 피해자는 집회를 한 당사자, 활동가일 때가 많다. 누가 심사숙고하지 않고, 확신을 갖지 않고 충동적으로 이런 시위를 하겠는가. 우리는 공개적으로,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법으로, 철저히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으로, 법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행동을 준비하였고 실행하였다. 이 정도도 보호받지 못하는 표현의 자유라면 대한민국에 표현의 자유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가?

 

방해할 업무가 없는 권력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업무방해죄’가 과연 공평하고 정의로운 법인가

현재 진행 중인 3개의 재판 중 구럼비 발파 첫날 쇠사슬을 묶었던 행동으로 받은 벌금 200만원은 3심까지 다투었지만 결국 원심 그대로 확정이 되었다. 벌금납부고지서를 받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일반도로교통방해? 풋, 차도 안다니는 새벽4시 이미 경찰이 다 막아놓은 도로에 구럼비 발파를 막기 위해 앉아 있었던 것이 헌법에도 보장되어 있는 내 정치적 자유도 제한할 만큼 중죄였던가. 삼성은 왜 어떨 땐 국민기업이고 또 하나의 가족이면서 꼭 이럴 때만 사유재산인가. 왜, 어째서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법은 대한민국 정부 ‘공무’ 자체의 성격과 위법성에 대해서, 그리고 공권력도 아닌 삼성 에스원 직원들의 과도한 시위 저지 행위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는가. 그러면서 폭행, 협박 혹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지위와 권세에 의한 압박 등이 전혀 없는 일반 시민들의 평화적 시위는 과도하게 해석되어 각종 법률을 침해한 범법자가 되어야 하는지. 왜 공명정대하다는 법은 평화애호자들의 평화시위는 심대한 혼란 혹은 막대한 손해를 명확히 판단하고 구분하면서 정부, 해군, 삼성, 대림의 ‘업무’에는 판단을 유보하는지. 방해할 업무가 없는 권력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업무방해죄’가 과연 공평하고 정의로운 법률이라고 할 수 있는지.

 

왜 시민들의 평화적 시위는 과도하게 해석되어 각종 법률을 침해한 범법이 되곤 하는지

하루 5억의 황재노역을 살 수 있는 권력자들에게 벌금은 '그까이꺼~' 정도일지 모르지만 나에게 200만원이면 전쟁없는세상에서 받는 4달치 활동비와 같다. 그래서 나는 벌금 안 낸다. 아니 못 낸다. 대신 노역을 살겠다. 아니 살 수밖에 없다. 이번에 보니까 사회봉사명령으로 대체할 수 있도록 뭔가가 바뀌었나본데 다음 재판도 이런 식이라면 그것도 고려해보려 한다. 내 권리를 침해받아서 억울하기도 하지만 정권이, 삼성이, 재판부가 제주해군기지 건설저지운동 활동가들에게 높은 벌금형을 부과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활동이 효과적이었고 유효했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기도 할테니 가벼운 마음으로 교도소로 향하겠다.

 

 

이 글은 전쟁없는세상 계간지 <전쟁없는세상>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