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자에게 “당신은 가난한가?”라고 끊임없이 묻는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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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에게 “당신은 가난한가?”라고 끊임없이 묻는 정부
  • 이은정 (천주교인권위원회 상임활동가)
  • 승인 2014.08.25 16: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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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생존자들의 이야기

누군가 말했다. 2014년 4월16일, 세월호에 탑승하지 않아, 살아 있는 우리 모두가 세월호 ‘생존자’라고. 이 말은 누구도 이 참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으로 읽힌다. 또한 ‘살아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7월의 마지막 날, 서울에 거주하는 세월호 탑승 생존자 김민철(가명)씨와 그의 아내 이혜선(가명)씨를 만났다. 건물시설 설비 작업을 하는 그는 지난 4월16일 제주에 일하러 가던 길이었다. 30년간 손에 익은 온갖 장비와 평소 즐기던 사진 촬영을 위한 도구를 차량에 싣고 세월호에 탑승했다. 민철씨는 3층 선실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었다. 배가 확 기울어지면서 들고 있던 책과 함께 뒤로 넘어졌다.

 

소리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도움

 

배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구명조끼 남는 것 없느냐’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바닷물이 밀려들어와 소용돌이쳤다. 그는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순간을 “새끼손가락 하나라도 걸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걸고 버티고 싶었다”고 표현했다. 그동안 살아온 날들이 영화처럼 스쳐 지나갔다. 죽는구나 싶었을 때 뒷덜미를 강하게 휘어잡는 손이 있었고, 갑판으로 끌어당겨졌다. 그렇게 세월호에서 빠져나와 어선을 타고 인근 섬으로 갔다. 집집마다 이불을 꺼내와 젖은 몸을 덮어주고, 물을 끓여 뜨거운 차를 손에 쥐어주었다. 그는 섬 주민들에게 특별히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민철씨가 같은 날 다시 뭍으로 나올 때까지는 배로 1시간30분여가 걸렸다. 진도체육관으로 옮겨졌으나, 도저히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체육관 안은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단원고 학부모들과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한 사람들의 절망 어린 울음소리가 뒤섞여 산 사람인 민철씨에게는 고통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가족이 기다리는 서울로 올라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진도에 있는 119구급차량은 관할구역을 벗어날 수 없다고 했다. 소식을 듣고 급하게 달려온 친구가 이 사람 저 사람 찾아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119구급차량에 몸을 싣고 집 근처 병원으로 향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이렇게 소리치고 요구하지 않으면 정부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이도 저도 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비 50만원을 들여 사설 구급차량 129를 이용했다.

민철씨가 입원한 뒤 가장 먼저 찾아온 사람은 거주지역 구청장, 경찰서장, 그리고 관할경찰서 정보과장이었다. 정보과 형사는 서너 번 찾아왔다. 입원한 지 보름이 지나 퇴원한다고 했더니 또 득달같이 달려왔다. 처음엔 고마웠으나 이유 없이 계속되는 만남에 불쾌해지기도 했다. 그렇게 여기저기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준 명함이 쌓여갔다. 하지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곳은 없었다. 보건복지부의 긴급복지 지원금은 4인 가족 기준 108만8천원이지만, 아들이 군대에 가 있다는 이유로 20만원이 차감돼 지급되었다. 혜선씨는 이 와중에도 그런 계산을 하는 정부에 화가 난다고 했다. 이마저도 혜선씨와 딸이 일을 하고 있어 정부가 정한 소득 기준을 넘게 돼 한 차례 지원받는 것에 그쳤다. 이 나라 정부는 국민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사고에 대한 최소한의 지원에도 이런 식으로 잣대를 들이댄다. “당신은 가난한가, 그렇지 않은가?”

 

실질적인 지원을 못 받았는데도

많은 보상금을 받았으리라는 오해까지 받는 생존자들

 

‘꼬박꼬박 낸 세금이 아깝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구나 싶다. 이것은 언제부턴가 국가가 줄곧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모습이다. 이 나라에는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이분법적으로만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하지만 돈이 많건 적건 나이가 많건 적건 예기치 못한 참담한 사고와 죽음 앞에, 또 이를 겪어내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저 한 인간일 뿐이다. 이럴 때 작동해야 할 국가 시스템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게다가 매번 각기 다른 부서와 담당 공무원에게 관련 서류를 제출하고 똑같은 설명을 반복해야 했다. 정부 지원은 이렇게 마치 동정하고 적선하듯 이루어졌다. 혜선씨는 한탄했다. “우리는 다 손에 쥔 돈 한 푼 없이 살았어야 지원받을 수 있는 거예요.” 남편이 사고 이후 쉬고 있는 것을 본 주변 지인들은 조심스레 이렇게 물어오기도 했다. “정부에서 보상금 많이 받았다며? 사망자는 개인당 10억원씩은 받는다던데.” 가만히 듣고 있던 내 속도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민철씨는 지난 6월3일 목포해양경찰서로부터 자신의 휴대전화 카카오톡 대화 내용 및 착·발신 전화번호 일체를 광주지검 목포지청에 송치했다는 통지서를 받았다. 4월15일 저녁 6시부터 사고 발생 3일 뒤인 4월19일 자정까지 해당 정보를 압수수색했다는 내용이었다. ‘세월호 검경합동수사본부에서 수사한 사건으로서’라고만 언급했을 뿐 그 이유조차 명확히 기재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경찰로부터 통보받은 뒤에야 알게 된 것이다. “정말 기분 나쁘더라고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고 원인 규명을 위해서라고 하기엔 대상 기간이 필요 이상으로 넓고 이들은 피의자가 아님에도 이런 식의 강제 수사가 정당한지에 대한 의문이 남았다.

 

“1년 뒤에도 기억해주고 찾아주세요”

 

정부의 지원 정책에 답답함을 느끼는 건 피해자들뿐만이 아니다. 최근 만난 강서진(가명) 사회복지사는 굉장한 무력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위기가족 지원 서비스를 통해 서울에 거주하는 세월호 참사 생존자 및 유가족을 돕고 있다. “전장 한가운데 홀로 떨어진 병사 같은 느낌이었어요. 지휘관은 따로 있고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무엇이든 해야만 했어요.” 해당 구청별로, 담당 공무원에 따라 지원 정도가 달라지는 것도 목격된다. 예를 들어 ㄱ구청 공무원은 자신이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업무인데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계속 연락하면서 필요한 게 없는지를 묻고 지원 또는 후원을 받을 수 있는 곳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반면 ㅇ구청 주민복지과 관계자는 “(세월호 유가족이) 가난한 분도 아닌데, 우리가 왜 그분을 케어해야 하죠?”라고 반문했다. 서진씨가 만난 가족들 역시 지원받을 때마다 각기 다른 양식에 관련 서류를 첨부해 똑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해야 했다. 온갖 곳에서 연락이 와 취조하듯 꼬치꼬치 캐묻고, 필요한 게 무엇이냐고 묻고는 정작 실질적인 지원은 하지 않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저는 정부의 지원 가이드라인이라는 것이 3개월 생계비를 줄 테니 그 안에 모든 걸 추스르고 사회로 복귀하라는 걸로 보여요. 지자체 예산에 따라 그마저 제대로 해주지 못하는 곳도 있는데…. 정부에 대한 신뢰는 이미 완전히 무너졌어요. 피해 당사자들에게 정부 지원책들이 억지로 내놓은 듯한 느낌을 준 것 자체가 실패라고 봐요.” 서진씨는 정부 지원책에 대해 이렇게 말하며 덧붙였다. “참사 100일이 지나면서 처음보다는 조금 덤덤하게 ‘요즘 어떻게 지내요’라고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생겼어요. 저는 계속 이분들과의 끈을 놓지 않고 이어가고 싶어요.” 그는 피해자들이 지역사회로 건강하게 복귀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이웃과 공동체가 피해 가족을 돕는 또 하나의 매개체 역할을 하길 바란다. 정부가 땅에 떨어진 신뢰를 회복하려면 이런 과정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했다. 단순한 배·보상만으로는 신뢰를 회복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생존자 민철씨는 인터뷰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 “이 세월을 살아내려면 ‘세월’호를 잊는 수밖에 없어요.” 사회복지사 서진씨가 자주 만나는 유가족 중 한 명은 “1년 뒤에 우리를 누가 기억해줄까요. 그때 저희를 기억해주시고 찾아와주세요”라고 말한다.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있다는 두려움 곁으로, 세월호를 잊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막막함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 분명한 것은 하나 있다. 이 참사가 왜 일어났는지 명명백백하게 밝혀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존자와 유가족 모두가 원하는 일이다. 성역 없는 진상 규명을 위해 수사권과 기소권이 포함된 특별법이 제정돼야 함은 그래서 마땅히 옳다. ‘살아 있는 성자’라 불리며 평생 가난한 이와 함께한 피에르 신부님이 하신 말씀을 세월호 특별법은 선례가 없는 일이라느니 떠들어대는 정치인들에게 해주고 싶다. “여보게 그건 나도 아네. 그러니 자네가 법률을 좀 바꾸어주게나. 법보다 사람이 훨씬 중요하지 않나?” (공지영의 책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중에서)

 

‘누구’를 잊지 않겠습니까?

 

잊혀진다는 두려움과 잊어버리고 싶다는 막막함 사이에서 우리가 함께 만날 수 있는 곳은 어디쯤일까. 어쩌면 이 참사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는 과정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나를 비롯해 잊지 말자고, 기억하겠다고 다짐했던 사람들에게 묻고 싶어진다. 그 다짐 속에 어떤 어떤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느냐고.

 

이 글은 한겨레21 제1025호에도 실렸습니다. 

 

 

▲ 사진_ 서해지방해양경찰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