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술서를 통해 말하는 나의 부모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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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술서를 통해 말하는 나의 부모님 이야기
  • 이철 (레미지오)
  • 승인 2014.12.30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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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조작간첩사건 이철 씨의 진술서

재일동포 조작간첩사건으로 지금도 재판을 받고있는 이철 씨가 지난 11월 28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제출한 진술서입니다.

 

진 술 서

 

진술에 앞서 재심의 기회를 주신 판사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 자리에 서게 되니 오래 전에 재판 받았던 무서운 기억이 되살아나서 저의 가슴을 짓누릅니다. 두 다리도 더 떨리는 것 같습니다.

그 때부터 39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27세 청년이었던 저도 이제 백발이 가까운 67세의 노인이 되었고, 한을 품고 돌아가신 저의 아버지,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살아 계셨을 때의 연세를 훨씬 넘었습니다. 저도 이제 언제 죽어도 낯설지 않은 나이가 되었으니, 제가 죽어서 저승의 부모님을 뵙기 전에 판사님들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재일동포들이 일본사회에서 민족차별을 받으며 살아온 이야기나, 많은 동포 유학생들의 간첩사건이 잔혹한 고문으로 날조되었다는 것은 이미 여러 재심 사건을 통하여 잘 알려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사건 또한 40일 간의 무자비한 고문을 통하여 꾸며졌음은 종전에 재판부에 제출한 진술서에서 상세히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자리에서 그 점에 대해서는 반복을 피하고, 저의 부모님에 관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제일 존경하고, 또 어머니를 누구보다 공경하면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재심에 임하면서 특별히 저의 부모님 사진을 가슴에 담아 모시고 왔습니다. 저는 67세가 되도록, 이 나이까지 살고 있는 것에 대하여 아버지, 어머니께 늘 미안하고 죄송스럽게 느껴 왔습니다. 부모님은 평소 병원과 약을 모르고 살아 오셨는데, 저의 아버지는 53세, 어머니는 57세 장년의 한창 나이에 제 사건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판사님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단 하나입니다. 이 재심을 통해서, 저의 억울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며 애통해 하셨을 저의 아버지, 어머니의 한을 풀어주시기를 간절히 또 간절히 기원합니다.

저 또한 출소한 뒤에 13년 동안 기다려 준 약혼녀와 결혼하여 지금은 두 아이의 아버지로 있습니다만, 저의 부모님이 저를 얼마나 정성을 들여서 키워 주셨는지 아버지가 되어보니 비로소 잘 알 수가 있었습니다.

저희들이 어릴 때 더러운 한국인, 냄새나는 조선 놈은 저리 가라는 둥 민족적 차별을 받아서 울며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는 “너희들은 한국 사람이다. 옛날의 조선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안아주시며 달래주셨습니다. 또 해마다 1년에 한번, 어린 6남매를 다다미방에 앉혀놓고, 안중근 의사와 안의사의 부인, 자제분들의 사진을 여러 장 펴놓고 손으로 가리키면서 저희들의 민족애를 고취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린 시절부터 안중근 의사와 부인 마리아의 이름은 아버지께 들어 알고 있었는데, 그 당시부터 어린 마음에 ‘이름이 마리아라니, 한국여자들의 이름은 다 그러한가?’하고 신기하게 생각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는 민단창단 초기 때부터 열심히 활동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민단에서 무슨 행사가 있는 날에는 저희들을 사무실에 데리고 가시곤 하셨는데, 저는 거기서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도 “동해물과 백두산이”하며 어른들을 따라 애국가를 부른 기억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모국에서 무슨 중요한 일이 생기면 여유가 많지 않은 형편인데도 적지 않은 돈을 기부하시곤 하였는데, 그것 때문에 어머니하고 종종 다투시던 일도 기억납니다. 또 아버지는 민단 일을 열심히 하시면서도, 저희들에게 “박정희는 믿지 마라. 그 사람은 공산주의자니까 김일성한테 나라를 팔아먹을지 모른다.”라고도 말씀하실 정도로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습니다.

그런 사람의 아들을 잡아가서 혹독한 고문을 가하여 몸서리나는 간첩으로 만들어 사형 선고까지 받게 하였으니, 그 어떤 부모인들 과연 제 명을 다할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검사가 사형 구형을 하면서 한 말을 잊을 수 없습니다. “피고인은 악질이니, 이 사회에서 영원히 말살되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내 나라에서 살고 싶어서, 배우고 싶어서 조국을 찾아온 순박한 모국유학생이 도대체 무슨 나쁜 일을 하였기에 ‘악질’로 사형선고를 받아야 하는지, 또 평소 누구보다도 나라 걱정을 하며 선하게 살아오신 부모님이 도대체 저를 어떻게 키웠기에 제가 이 사회에서 영원히 말살되어야 하는지,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검사님께 물어보고 싶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순수한 열망으로 모국을 찾아온 저희들 재일동포 학생이 아니라, 그 당시에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게 이 사회를 통치하던 군사정부에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연행되어 간 뒤, 두 달 있으면 결혼식을 올리게 되어있던 저의 약혼녀마저 어떤 괴한들한테 연행되어 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저의 아버지는 쓰러지셨다가 저와 약혼녀 두 사람이 서울구치소에 같이 수감된 바로 그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제가 처음 재판받으러 법정에 가서 꽁꽁 묶인 채로 버스를 내리는데, 어디선가 “철아, 너 아버지 돌아가셨다! 너 걱정하면서 돌아가셨다! 너 알고 있냐?”하는 큰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저로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공판 첫날 하루종일, 그리고 그 뒤, 오랫동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라는 말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저의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공판 개시 후 상당기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임한 것은, 재판이 끝나면 곧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하던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이나, 검사 신문 시 “언제쯤 집에 갈 수 있냐”고 물어보는 저에게 “조금만 기다리면 가게 될 것”이라고 한 검사의 말을 어리석게 믿었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저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어서 제 혼이 완전히 나갔던 것입니다.

또 저의 어머니의 경우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내 아들은 간첩이 아니라고 하시자, 검사가 “아들을 간첩으로 키워놓고 무슨 제대로 된 어미냐”라고 힐난하여 큰 모멸을 받으신 뒤, 병을 얻어 3년 동안 시름시름 앓다가 제 이름을 부르며 세상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이런 탓에 저는 제 부모님은 불의한 국가권력에 의하여 제 명을 다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재심을 통하여 너무나 억울하게 돌아가신 부모님의 한을 풀어 주시기를 간철히 바라는 것입니다.

 

재판장님,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더 드리겠습니다.

저는 이제는 사실 징역살이 13년을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어찌 보면 다 흘러간 이야기고, 저 또한 그 혹독한 시대에 고생한 이름도 모르는 많은 희생자들 속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 체념할 수 있습니다. 징역살이 13년은 육체적으로 참으로 고단한 세월이었지만, 저는 그 긴 시간 동안 다행스럽게 우리나라의 귀한 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나라 사랑하다가 감옥에 들어온 많은 청년학생들, 민주회복과 민족분단을 극복하려고 애쓰시다가 들어오신 어르신들, 여기서 굳이 그 이름들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 없이 그 분들을 감옥 안에서 만나게 된 것은 저의 인생의 큰 행운이었고, 그 분들로부터 배운 것은 제 인생의 커다란 보배로 지금도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제가 조국과 민족을 위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지만, 그분들과 함께 징역살이를 같이 함으로써,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의 고난과 고통, 민족분단의 아픔에 조금이나마 간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쪽이 뿌듯하고 큰 기쁨마저 느낍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저의 청춘은 과거의 재판으로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만, 그 뒤 그와 같은 고귀한 기회가 저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하니, 진심으로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저는 현재 동생의 회사가 맡아 하는 건축현장에서 전기 배선 업무를 보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작업 중 떨어져서 등뼈가 부러지는 등 크게 부상을 입은 일도 있습니다. 적지 않은 나이에다가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저에게 이 재심은 마지막 기회가 될 것입니다. 부디 저희들의 맺힌 한을 풀어주시고, 제가 저승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부모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재심을 열어준 판사님들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간첩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던 유학생 이철(오른쪽)씨가 가석방으로 풀려나 13년을 기다린 약혼녀 민향숙(왼쪽)씨와 88년 10월 지각 결혼식을 하게 된 소식을 담은 민가협의 회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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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한국의 과거사정리와 재일교포 조작간첩 문제>

안병욱 _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전 위원장, 가톨릭대 교수

 

국방부과거사위 보고서에 의하면 1970~80년대 간첩사건은 모두 966건에 달했는데 그 가운데 재일동포 및 일본관련 간첩사건은 319건이며 보안사가 73건을 수사했다.

국군보안사령부는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데도 수많은 ‘재일교포유학생간첩사건’을 수사했다. 그런 보안사는 대공삼십년사에서 “71년부터 74년 말까지 공작과 부활과 對日工作係의 신설에 따라 ‘공작근원 발굴작업’에 착수하여 총 384명의 대상을 선정하여 집요한 공작활동을 진행한 결과 김영작, 진두현, 최철교, 김철우 등 30여명의 간첩을 일망타진했으며, 75년부터는 교포유학생을 대상으로 737명을 선발하여 공작활동을 전개하여 강종헌 일당 20여명의 간첩을 색출하였”다고 했다. 보안사의 ‘공작근원 발굴작업’은 1980년대에 들어서도 ‘재일교포 모국유학생 위장간첩 근원발굴계획’을 통해 계속되었다. 모국 유학 교포학생들을 어항 속의 물고기처럼 낙점해 필요할 때마다 간첩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재일교포나 납북어부를 수사한 수사관들은 가증스럽게도 이중 탈을 쓰고 인간적으로 동정하는 척 가장하여 피의자를 유도하여 회유했다. 그 밖에 불법 감금, 무자비한 고문, 주위 지인들에 대한 무차별적 협박을 통한 증거 조작, 영사증명서 등의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새삼 따로 거론하지 않겠다.

조작된 간첩사건을 송치 받은 검찰이나 더욱이 재판을 진행한 사법부 또한 피의자가 고문을 통해 무고하게 간첩으로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도, 검찰은 날조된 수사기록 그대로 기소하고 사법부는 똑같이 유죄판결을 내렸다. 지배권력과 최고의 전문 지식인들이 공조해서 무고한 이들을 희생양으로 만든 것이다. 사법기관도 독재정권의 수혜자로서 독재자의 폭력행위를 옹호하고 동참했다. 또 그 그늘에서 상대적 약자를 침탈하면서 사회 발전을 억제하는 수구적 기능을 수행해왔다.

1970년대 박정희 유신정권과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은 사회통제를 위한 필요성에서 거의 정기적으로 간첩사건을 조작하여 발표하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 2012년 10월 20일 <한일공동학술행사> “유신체제와 재일동포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진실과 의미” 기조강연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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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기사 [한겨레] “재일동포 간첩몰이, 반성없는 정부에 경종”

 

완전한 한국인도, 일본인도 될 수 없었던 재일동포 2세였던 이씨는 “재일동포를 졸업”하고자 한국 유학을 결심, 1973년 고려대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러나 1975년 중앙정보부에 연행된 뒤 결혼을 약속한 부인 민향숙(60)씨와 함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으로 사형, 3년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그 뒤 그의 구명운동이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벌어져, 이씨의 사건은 조작이 의심되는 대표적인 재일동포 간첩사건으로 꼽히고 있다.

1988년 석방된 뒤 일본에 돌아와 1970~80년대 재일동포 간첩사건 당사자들의 모임인 ‘재일한국인 양심수 동우회’를 만들고 대표로 활동하던 이씨는 동우회 전체 이름으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했지만 정작 자기 사건의 진실규명은 거부했다. 재심도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한국 정부는 식민지와 분단 유산인 재일동포를 간첩으로 몰아세우고 고통을 준 만큼, 재일동포 간첩사건은 개인의 노력이 아닌 정부 차원에서 일괄적으로 해결돼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우회 회원들과 이 변호사의 설득 등에 이씨는 결국 “친구들이 말 타고 싸움터로 나가는데 나만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재심을 결심했다.

지난해 12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이석태·심재환(법무법인 정평)·조영선(법무법인 동화)·장경욱(법무법인 상록)·이상희(법무법인 한결) 변호사들이 모여 만든 ‘재일동포 재심 변호인단’이 12일부터 이틀간 오사카를 찾아 조작으로 보이는 재일동포 간첩사건 당사자 12명을 면담했다. 이 중에는 “한국에서 공부해 변호사 자격을 딴 뒤 재일동포를 위한 변호사가 되겠다”며 한국에 유학 왔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976년 5년형을 선고받고, 사회안전법으로 7년을 보안감호소에서 살아야 했던 강종건씨, 1974년 부모님 병문안을 갔다 김포공항에서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은 고병택(74)씨 등도 있었다.

재일동포 간첩사건은 1970~80년대 일제 강점기에 강제동원이나 생계 때문에 일본으로 건너간 이들의 2세가 일본 내 차별 등을 이유로 유학, 취업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사건이다.

진실화해위가 진실규명 결정을 내린 10명의 재일동포 조작간첩사건을 보면, 중앙정보부와 국군보안사령부가 재일본대한민국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등이 함께 섞여 있어서 북한과 연계로 조작하기 쉬운 일본 사회에서 온 재일동포들을 대상으로 불법구금·가혹행위 등을 통해 간첩사건으로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원문_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67980.html 김민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