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농성장에 제주에서 보내온 선물들이 많은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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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농성장에 제주에서 보내온 선물들이 많은 까닭
  • 이은정 (천주교인권위원회 상임활동가)
  • 승인 2015.01.30 23: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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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14일 오전 서울 광화문 세월호희생자 농성장 앞에서 세월호참사진상규명을위한 범국민서명호소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 이희훈

 

매주 금요일은 인권활동가들이 세월호 광화문 농성장을 지키는 날이다. 지난 19일 금요일, 그날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 2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고,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의 해산 결정을 내린 날이기도 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어도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못하던 나는 헌재 앞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통합진보당, 역사 속으로'라는 기사 제목을 확인하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만 가지 표정을 하고 있는 헌재 앞의 수많은 사람들을 뒤로하고, 터덜터덜 광화문으로 향했다.

광화문은 세월호 참사가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여전히 서명을 받고, 이 참사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 약속지킴이가 돼달라 청하고, 노란 리본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어스름 늦은 저녁 4·16 약속지킴이 사랑방 천막에서 영석 아빠와 귤을 까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누군가 "광화문에는 제주도에서 온 게 많은 것 같아요. 아까 떡도 그렇고. 이 귤도 제주에서 온 거고"라고 했다. 별 생각 없이 듣고 있던 나는 영석 아빠의 대답에 귤이 목에 걸렸다.

"애들이 제주도를 가려다가 못 갔잖아."

그 순간 내 표정은 어땠을까? "그러게요" 하고 꾸역꾸역 대답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 한 문장은 내내 내 목구멍에 걸려 있다. 왜 그들은 제주도에 도착할 수 없었는지, 밝혀져야만 하는 진실들이 밝혀지고 세월호 참사 이전과는 분명히 다른 세상으로 한 발자국 더 내딛을 때, 이 날 얹힌 마음이 풀어지게 될까?

 

304줄의 문장으로도 모자랄 소중한 사람들

 

4월 16일에 나는 밀양에 있었다. 마지막 남은 4개의 송전탑 부지를 지키려 마을 주민들, 연대하는 시민들, 활동가들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국가'라 불리는 사람들이 언제 쳐들어와 농성장을 철거할지 몰라 산 속에서 24시간 돌아가며 불침번을 섰다.

어둔 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며 휴대폰을 붙잡고 애타게 기다린 소식은 세월호 탑승자들을 속속 구조하고 있다는 속보였다. 하지만 밀양에서 '살던 대로 살게 해달라'는 사람들의 외침을 무참히 짓밟은 이 '국가'는 침몰해가는 배 안에서 '살려달라'고 하는 국민들의 절규도 무참하게 외면했다.

세월호 참사는 막대한 죽음 앞에 나를 한없이 무력하게 만들었다. 304명의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의 고통을 상상하며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여름이 지났고, 시원한 바람이 불 때쯤에는 자주 잊고, 내 일상을 살면서 행복해했으며 무덤덤해진 듯했다. 그러다 매섭게 차가운 바람이 불고, 야속하게 눈 내리는 요즘 다시 툭하면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다 자취를 감춘다. 이제야 '희생자' 또는 '유가족'으로 통칭되던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가위와 박스를 든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 회원들이 9월 28일 오후 서울광장에 설치된 세월호참사 추모 노란리본 강제철거를 시도하며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 권우성

 

인권활동가들은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존엄과 안전위원회'를 꾸려 활동을 만들어가고 있다. 존엄과 안전위원회는 자유팀, 평등팀, 안전대안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평등팀은 '평등한 애도, 평등한 지원'을 중심에 두고 세월호와 관련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왔다. 일반인 희생자 유가족, 생존자, 화물기사들, 이주민, 민간 잠수사 유가족과 동료 잠수사들, 진도어민…. 시간은 점점 4월 16일에서 멀어졌지만 그들은 계속 그날에 남아 그 기억들을 되새기고 있었다.

세월호에는 수학여행을 가던 단원고 2학년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타고 있었다. 또 제주에서 새 삶을 꿈꾸며 이사하던 50대 부부가 있었고, 그 부부가 키우던 강아지를 옆에서 보고 같이 놀던 5살짜리 꼬마 아이와 그 가족들이 타고 있었다.

몇 년간 제대로 된 휴일도 없이 격무에 시달리다 연인과 함께 제주 여행을 계획한 재중동포도 있었고, 배 안의 커피숍과 식당에서 일하던 아르바이트생이 있었다. 이렇게 하나하나 다 나열하려면 304줄의 문장으로도 모자랄,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소중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누구를, 또 무엇을 잊지 않겠습니까?"에 대한 대답

 

그런데 어느 순간 단원고 대 일반인 희생자로, 내국인 대 이주민으로, 청소년 대 어른으로, 마치 '더' 슬픈 죽음이 있고 '덜' 슬픈 죽음이 있다는 듯이 모함하는 세력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모든 순간 '국가'는 그 존재를 감추어버렸다. 가장 책임져야 할 주체들은 사라지고, 이제는 '세월호 유가족과 세월호를 기억하며 진상규명에 힘쓰는 사람들' 대 '일반 국민'으로 나눠놓는다.

어떤 이들은 세월호 피로감을 들먹이며 이제 그만 잊으라고, 그만 하면 됐다고 악다구니를 쓴다. 이는 서북청년단이 재건되어 세월호 농성장을 찾아오는 것으로, 어버이연합과 같은 보수혐오세력의 난동으로 그 추악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일반인' 희생자 가족들은 "죽음 앞에서는 다 똑같은 슬픔 아닌가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사고 직후 가장 먼저 자신의 배를 갖다 대어 탑승객들을 구조하고, 이후에는 생업을 중단하고 희생자들을 수습하는 일을 한 진도 어민들은 매일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그것은 1년 총 예산 약 4조 원 중 구조·구난에 쓰이는 예산이 4억여 원에 불과하다는 해경을 대신해 수중 수색작업을 진행한 민간 잠수사들도 마찬가지다. 세월호에서 살아남은 화물기사들은 운전을 하는 것이 두렵다. 하지만 정부는 화물차를 잃은 이들이 다시 화물차를 살 수 있도록 1%대 저금리 대출을 해주겠다는 것을 지원 방안으로 내놓았다.

나는 이것이 4·16 존엄과 안전에 관한 인권선언(이하 4·16 인권선언)이 꼭 필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지난 12월 10일 4·16 인권선언 추진대회에서 "우리는 우리가 누려야 할 권리들을 사전에서 찾지 않습니다. 재난과 참사를 겪은 당사자들과 함께한 이들의 경험에서 찾을 것입니다"라는 이야기가 마음에 남았다.

4·16 인권선언에는 이러한 경험들이 구체적인 권리가 돼 하나하나 담길 것이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대부분의 국민들은 반드시 무언가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바뀌어야 하는지는 이러한 경험들 속에서 나올 것이다.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 건너편에 있는 혐오세력들을 보면서, 우리에게 모욕당하지 않고 애도하고 기억할 권리가 왜 중요한지 다시 한번 헤아리게 된 것처럼.

 

 

 이 글은 오마이뉴스 기획연재 [4·16 인권선언] "우리 권리는 함께한 이들의 경험에서 나온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