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기억, 기억의 고통
얼마 전, 울산박물관에서 열리는 ‘폼페이’전을 보고 왔다. 갑자기 이 세상에서 사라짐으로 인해서 영원히 ‘역사’로 기록된 시간과 장소, 그리고 그 속에 존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화산 폭발 당시 죽음을 맞은 순간을 생생하게 전달해 주는 석고상에 눈길이 갔다. 죽음의 순간이란 어떤 것일까? 몸을 웅크리고 앉아 손으로 입과 코를 막은 남성, 땅에 엎어진 아이, 밀려드는 화산재를 막기 위해 옷으로 얼굴을 가린 여성, 온몸이 뒤틀린 채로 고통스러워하는 개. 비극적인 죽음은 그것을 마주하는 생명에도, 그것을 바라보는 생명에도 쓰라린 슬픔과 공포의 비참함을 안겨준다.
2천 년 전 사람들의 마지막 최후의 모습을 석고상 형태로 만나면서 차가운 바닷속 세월호에서 아직 나오지 못한 이들이 떠올랐다. 만약 세월호가 인양되어 우리 눈앞에 드러난다면 어떤 모습일지를 생각하니 좀처럼 발이 떼어지지 않았다. 나는 실시간 방송으로 죽음의 과정을 지켜본 목격자였고, 넋을 놓고 한없이 눈물을 흘린 유가족이었고, 어찌할 바를 몰라 두 손을 모으고 중얼거리기만 한 방관자였다. 슬퍼했던 고통은 기억으로 남고, 그 기억은 여전히 나에게 슬픔을 준다. 이제 난 무엇을 해야 하나?
4.16 인권선언 운동을 제안하며
4.16 인권선언 추진위원으로 참가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인권선언'은 지난해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일에 ‘세월호참사국민대책회의 존엄과안전위원회’가 제안한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에게 인간의 존엄이 훼손되는 경험의 기억이다. 우리가 빼앗긴 권리, 누려야 할 권리가 무엇인지 모여서 말하는 풀뿌리토론을 전국적으로 벌이고 이를 모아서 2016년 4월 416인권선언을 선포하려는 계획이다. 누구나 존엄과 안전을 누릴 수 있는 사회로 나아기 위해 스스로 존엄을 선언하고 행동을 약속하는 운동이다.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인권선언' 제안문
어쩌면 나에게는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방법이 슬픔과 고통을 기억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는지 모르겠다. 기억하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슬퍼하는 나의 마음을 잊지 않는 것이 내가 책임져야 할 부분에 대해서 도망치지 않는 최소한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416인권선언 제안문을 보면서 지난 1년여 간 세월호 참사의 기억으로부터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 다시 ‘인권’이다. 모든 사람은 존엄하다. 슬픔과 분노로 좌절하기보다 우리 스스로 존엄한 존재임을 선언하는 행동이 필요할 때이다.
다양한 목소리를 모아 아래로부터 만들어가는 인권선언운동을 만들자는 제안 취지를 보면서 ‘콜롬비아 어린이 평화 운동’이 떠올랐다. 열두 살이었던 마예를리 산체스(Mayerly Sanchez)는 내전으로 폭력이 끊이지 않는 콜롬비아에서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어린이들이 모여 평화를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납치와 전쟁의 공포 속에서 숨죽여 지내야만 했던 어린이들이 직접 힘을 모아 어린이의 권리를 묻는 투표를 하기로 계획한다. 무장단체의 보복을 두려워한 어른들은 어린이들의 참여를 말리기도 했지만, 어린이들은 투표에 앞서 무장단체에 평화롭게 투표를 하게 해달라고 편지를 썼고, 무장단체도 이들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전국에서 수백만 명의 어린이들이 참여해 투표는 성공적으로 마쳐졌고, 1996년 10월 25일은 하루 동안 콜롬비아 어디에서도 단 한 번의 총소리도 없고, 납치도 일어나지 않는 첫 번째 날이 되었다. 이러한 투표는 평화와 인권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현재까지도 대표적인 어린이 참여 평화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함께 참여하는 행동-인권선언운동
인권과 평화를 이야기하면 ‘배부른 소리’가 되고, 어린이들이 무슨 말을 하면 ‘네가 뭘 아느냐?’고 구박하는 우리 사회가 세월호 참사를 만들었다. 일상 속에서 존재하는지조차 잊기 쉬운 인권과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스스로 말할 수 있고, 참여할 수 있는 인권선언 운동이 되었으면 좋겠다. 무엇부터 해야 할까? 알고 지내던 마을 공부방, 청소년 인권단체(모임)을 만나서 함께 이야기하는 자리를 기획해 보자고 제안부터 해야겠지.
인권을 선언하는 것이 무슨 큰 힘이 되겠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다. 우리가 4.16 세월호 참사를 통해 느꼈던 슬픔과 미안함이 상처로만 남지 않고 우리 사회에 제대로 된 책임을 묻고 인간 존엄의 가치를 다시 세우는 ‘운동’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많이 이들이 함께 참여하는 행동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당신이 있는 공간에서 시작해 보기를 제안한다. 이것은 세월호가 인양되고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규명되는 그 ‘언젠가’를 앞당기는 당신과 나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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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5. 6. 8 뉴스민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