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언컨대,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는 소중한 기관이다. 내가 사회로부터 존중받지 못하고 배제되었을 때, 마땅히 사람이라면 영위해야 할 ‘삶다운 삶’을 살 수 없을 때, 그럼에도 아무도 그 부당함을 인정해주지 않을 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앞장서 변화를 이끌어야하는 것이 인권위다. 그래서 누군가 인권위를 국민권익위원회로 혼동할 때, 나의 솔직한 심정은 ‘거봐, 쌤통이다’보다는 안타까움이 크다.
국가인권기구의 위상
유엔에서도 국가인권기구는 특별대우를 받는다. 모든 회의에서 그들은 별도의 발언기회를 보장받고 그 발언에 대한 신뢰도 또한 정부 기관에 비해 높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유엔이 국가인권기구를 정부 기관도 시민사회도 아닌, 제 3의 독립적이고 공정한 주체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당연하게도 국가인권기구에게는 보다 엄격한 기준이 요구된다. 국제적인 기준은 일명 ‘파리원칙’이라 불리는데, 국가인권기구의 역할과 책임, 구성과 독립성 및 다원성 보장, 운영 방법, 준사법적 기능 등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일례로, 구성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하고도 명백한 원칙은 “인권의 보호와 증진에 관여된 사회적 세력의 다원적 대표성 보장”이다. 이를 통해 국가인권기구 인선은 우선 인권의 보호와 증진에 관여해왔다는 점을 대전제로 두고 그러한 요건에 부합하는 사람들 중 다원성이 보장되는 방향으로 해야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차기 인권위원장, 그는 누구인가
이쯤에서 우리나라 현실로 돌아와 보자. 지난 20일 박근혜 대통령은 차기 인권위원장으로 이성호 서울중앙지법원장을 내정했다. 시민사회의 첫 반응은 ‘누구지?’였고 청와대가 입을 꾹 다문 탓에 지금으로써는 현 내정자가 그간 인권의 보호와 증진에 관여해왔는지 여부를 명확히 판단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 요건은 위 파리원칙에 따르면, 속된 말로 ‘기본으로 깔고 가는’ 전제이기 때문에 가능한 빠른 시일 내 반드시 그 부합여부가 확인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두 번째 요건에 대한 결론은 너무도 분명하다. ‘다원성’을 어떻게 정의해도, 이미 인권위원 11명 중 8명, 상임위원 4명 중 3명이 법조인 또는 법학자인 상황에서 또 한 사람의 법조인을 구성에 추가한다는 것은 다원성 보장에 심히 어긋난다. 인권에 관한 전문성은 단순히 법에 관한 지식과 경험만으로 쌓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그러한 지식과 경험이 없어도 충분히 쌓을 수도 있다. 나아가 법의 테두리에 갇혀 오히려 인권보다 법이 우선시되는 상황이 발생될 수 있는 위험성도 있기에 더욱 경계가 필요하다. (사실 이렇게 장황히 설명할 필요도 없이, 전국민 중 법조인은 과연 몇 퍼센트나 될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 비율이 이미 얼마나 과한 것인지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내정자 개인의 문제이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인선절차의 부재, 그리고 그를 마련할 의지가 없는 청와대로부터 비롯된다.
실질적인 인선절차가 필요하다
현재 인권위원장에 관한 ‘인선절차’는 대통령의 지명과 국회의 인사청문이 끝이다. 그러나 인사청문마저도 형식적인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현 인권위원장의 연임 당시 여실히 드러났다. 인권위원장으로써의 그의 행태를 일단 차치하고 단순한 절차의 문제만을 놓고 보았을 때, 국회가 인사청문보고서를 채택하지 않았음에도, 심지어 인사청문 당시 위증한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대통령은 연임을 강행했다. 이 때문에 사실상 인선절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대통령이 점찍으면 게임오버.
그렇게 하여 수많은 반대와 비판, 시위에도 불구하고 임명되고 연임까지 한 현병철 인권위원장은 개인적으로도, 한 기관의 장으로서도 상상 이상을 선보였다. 언론에 공개된 것만 더듬어 보아도, “깜둥이”도 함께 살고 있는 ‘다문화 사회’를 뿌듯해 하고 “야만족”이 고품격(?) 유럽을 지배한 역사에 깊은 감명을 표하는 등 전후 맥락 없이도 그의 어록은 주옥같다. 그리고 인권위원장으로써 그는 자신의 권한을 민감한 인권 현안이 인권위에서 다루어지지 않도록 하는데 총동원했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 장본인이 “독재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까지 하였으니.
이처럼 인권위원장 개인의 인권 경험 및 감수성 부재는 단순히 개인의 반인권적 행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관 전체, 즉 인권위의 ‘제 역할 실패’로 번지기 때문에 제대로 된 절차를 통해 검증된 사람을 임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는 인권위 A등급 보류 사태
이 문제에 대해, ‘파리원칙’의 이행을 모니터링하는 국가인권기구간 국제조정위원회(ICC)의 승인소위원회(SCA) 역시 2008년부터 시정을 권고해왔다. 6년간 아무런 변화가 없자, ICC도 응수에 나섰고 2014년 3월과 10월, 그리고 2015년 3월에 또 다시 인권위의 A등급을 보류했다. 무려 세 차례의 보류, 이는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는 일이다. 아마도 등급 하락을 해야-혹은 진즉 했어야- 마땅하나, 당해 연도에 현 인권위원장의 임기가 만료될 예정이니, 그 인선과정 및 결과를 지켜본 뒤에 최종 판단을 하자는, 일종의 최후의 기회를 준 셈이라고 생각된다.
지금, 현 인권위원장 임기 만료일(8월 12일)까지 남은 단 몇 주간의 기간에 많은 것이 달려있다. 일차적으로는 인권위가 A등급을 유지할 수 있을 지 여부가 달렸고 2차적으로는 당장 앞으로 3년간 인권위가 독립성, 투명성, 공정성, 그리고 시민사회의 참여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본연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지 여부가 달려있다. 가장 중요하게는, 가장 전략적으로 용이한 지금 이 시기에 이번 7대뿐 아니라 향후 모든 인권위원장이 독립적으로 임명되어 독립적으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다시금 ‘인권 없는 인권위’가 되지 않도록 제도적 안전장치를 마련할 수 있는지 여부도 달려있다.
단언컨대, 지금 이대로는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