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0시, 경향신문사 13층
아침 9시 반이 넘자 한 사람 두 사람씩 사무실로 출근합니다. 출근하는 이들의 손에는 집에서 가져온 과일과 빵집에서 사온 빵이 들려 있습니다. 누군가 기증한 커피포트에 커피를 내리며 나누는 수다는 길지 않습니다. 수다가 끝나면, 사무실 복도는 공장이 됩니다. 한 명은 박스를 접고, 다른 이는 12개의 철봉을 박스에 담습니다. 정육면체 모양의 아크릴과 현수막 4장도 박스에 들어갑니다. 하나의 공정이 끝나면 이어서 유인물(정책홍보지)과 포스터, 투표용지를 담습니다. 포스터에는 “박근혜 정부 노동정책, 개혁인가 재앙인가? ‘을’들의 국민투표”라 적혀있습니다. 박스별 투표용지 200장씩, 유인물 200장. 혹시라도 수량이 틀리면 큰일입니다. 물건이 다 담기면 박스를 테이프로 봉합니다. 작업이 끝난 박스는 복도 빈 공간에 쌓여가고, 오전 내내 수백 개의 투표함 세트가 만들어집니다.
작업반장은 기륭전자분회 조합원 오석순입니다. 꼼꼼한 오반장은 작은 실수 하나 쉽게 넘기지 않습니다. 오늘도 박점규 활동가는 오반장에게 한 소리 들었습니다. 박스 포장을 건성건성 한다는 이유로요. 10년을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싸웠던 오반장과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은 10월 7일, 국민투표가 시작되면서 매일 경향신문사 13층으로 출근합니다. 10년 투쟁의 상흔이 몸 곳곳에 남았지만 주말도 반납하고, 매일 저녁 9시까지 투표함을 포장하고, 배송합니다. 평생 비정규직 시대를 열겠다는 정부의 정책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작년 말 ‘비정규법제도 전면폐기’를 외치며 도심을 기었던 오체투지 행진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국의 비정규노동자들이 10년 넘게 싸워왔던 마음에 비수를 꽂으려는 ‘박근혜표 노동정책’을 그냥 두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전 작업이 끝나고, 오후 작업이 시작되자 새로운 얼굴이 보입니다. 쌍용자동차 전 지부장 김정우 입니다. 국민투표 운동에 몸이라도 보탤까 싶어 왔답니다. 기륭 조합원들과 박스포장을 하던 김정우는 “왜 이렇게 작업 속도가 빠르냐.”며 혀를 내두릅니다. 일을 이렇게 잘하는 사람들이 왜 해고됐는지 모르겠다며 잠시 쉬었다 하자고 보챕니다. 77일 파업, 대한문 농성, 단식, 구속, 굴뚝농성 등 안 해본 투쟁이 없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국민투표에 함께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회계조작으로 정리해고 되어 26명의 동료가 목숨을 잃고, 7년간 ‘함께살자’고 외쳤지만 정부는 이제 정리해고만이 아니라 일반해고도 쉽게 하겠다고 합니다. 기업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는 세상을 열겠다고 합니다. ’박근혜표 노동정책’이 만들 참사가 눈앞에 빤히 보이기에 바쁜 일정을 쪼개 아픈 몸을 이끌고, 경향신문사 13층을 찾았습니다.
노동시장 구조개혁, 아니 노동재앙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8월 6일 대국민담화를 통해 “이제는 우리의 딸과 아들을 위해서,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 결단을 내릴 때가 되었다”며 임금피크제와 직무성과급제 도입과 노동유연화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9월 13일 한국노총과 경총, 정부가 함께한 노사정위원회는 ‘노사정 대타협’을 이루었다며 ‘노동시장 구조개선을 위한 노사정 합의문’을 발표했습니다. 직후 새누리당은 ‘노동시장 선진화 법안’이라는 이름으로 근로기준법, 고용보험법,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기간제 및 단기간근로자보호등에 관한 법률, 파견근로자보호등에 관한 법률 등 5개 법률에 대한 개정안을 당론으로 발의했습니다.
주요내용은 5가지입니다. 첫째 노동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징계사유가 없더라도 성과가 낮은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일방적으로 임금체계를 호봉제에서 직무성과급제로 변경해 성과가 낮으면 임금을 삭감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기간제법을 개정해, 기간제 노동자의 사용기간을 현행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여 노동자를 4년 동안 자유롭게 사용하다 해고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넷째, 55세 이상 고령자의 경우 일부 업무만 제외하고 모든 업무에 파견을 허용하고, 제조업의 근간인 뿌리산업에까지 파견을 허용해 비정규노동자를 확대한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법정 최대 허용 근로시간을 현행 주52시간에서 주60시간으로 연장하고, 구직급여(실업급여) 수급기준을 상향하고, 수급액을 축소하겠다는 것입니다.
‘박근혜표 노동정책’이 만들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요. ‘성과가 낮다’는 이유로 쉽게 해고되고, 사장 마음대로 임금이 삭감되는 세상입니다. 이제 기준은 회사 마음대로 결정합니다. 누군가는 임신을 했다는 이유로 저성과자로 분류될 수 있고, 누군가는 노동조합을 열심히 한다는 이유로, 사장의 눈 밖에 났다는 이유로 저성과자로 분류됩니다. 저항하며 모일 권리마저 ‘성과’라는 두 글자 아래 질식되는 세상이 열립니다. 기간제가 늘어나고, 파견이 확대되는 세상은 청년은 인턴, 35세 이상 노동자들은 기간제, 55세가 넘으면 파견으로 일하는. 평생 비정규직 시대입니다. 수십년간 노동자들이 투쟁을 통해 만들어오고 지켜왔던 모든 권리와 가치들이 기업의 손끝으로 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박근혜표 노동정책’이 열고자 하는 세상입니다.
정부는 국민들의 70%가 노동개혁을 지지한다고 말합니다. 고용노동부는 수십억을 쏟아 ‘노동개혁’이 필요하다고 광고를 합니다. 여당대표는 조직률이 10%도 안 되는 노동조합 때문에 나라가 발전하지 못한다며 노동조합을 공격합니다. 누구도 노동자의 손을 잡아주지 않습니다. 이제 당사자들이 직접 나섰습니다. 또한 각계각층의 양심 있는 인사 554명이 모였습니다. 이들이 모여 지난 10월 7일 국민들이 ‘박근혜표 노동개혁’에 대해 찬성하는지 직접 묻자며 국민투표를 제안했습니다. “‘을’들의 국민투표”는 전국에 시민들이 1만개의 투표함을 만들어 정부의 노동정책에 대한 민심을 묻자는 사회운동입니다. 등 떠밀어 하는 투표를 넘어 각자 생활공간에 투표함을 직접 설치해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결정하자고 외치는 주권운동입니다.
오후 7시, 다시 경향신문사 13층
오전에는 박스포장 작업, 오후에는 배송작업을 하다 보니 어느덧 저녁입니다. 사무실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듭니다. 곳곳을 돌아다니며 투표함을 알리고, 투표함 신청을 요청하러 다닌 이들입니다. 다들 모여 오늘 하루 투표함이 얼마만큼 나갔는지, 앞으로 투표함이 어디어디에 나갈 예정인지를 점검합니다. 어제는 300개가 나갔는데 오늘은 50개밖에 안 나갔다며 속상해하기도 합니다. 하루 종일 포장작업을 했던 오반장도 “더 바빠져야 한다.”며 혀를 끌끌 찹니다. 우리는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정말 ‘박근혜표 노동정책’에 찬성했나요. 우리의 미래를 저들의 손에 맡겨만 둬도 되는 것일까요. 아니라면 제안 드립니다. 각자 생활공간에 “‘을’들의 국민투표” 투표함을 설치해주세요. 주변에 투표함을 선물해 전국을 ‘박근혜표 노동개혁’에 대한 찬반을 묻는 투표함으로 가득 채워주세요.
['을'들의 국민투표 1만개의 투표함을 함께 만들어요]
▶ 투표함을 신청해 전국 각지, 각자의 생활공간에 설치하는 국민주권운동입니다.
▶ 성당, 까페, 아파트 입구, 사무실 등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 주변 지인에게 투표함을 선물해주세요.
▶ 투표함 신청/선물하기(신청비 1만원) : votechange.kr / 010-9633-0314
▶ 후원계좌 : 국민은행 362701-04-184403 김소연(국민투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