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인천 부평의 한 공장에서 연대집회가 열렸다. 자세한 내용은 몰랐지만, 사무실과 가까운 곳이기도 하고 정리해고 싸움을 한다고 하니 연대를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갔다. 그 공장은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들의 일터, 콜트악기였다. 서울로 이어진 고속도로 옆 그곳에 공장이 있는 줄 몰랐다. 부평 IC를 셀 수 없이 다녔지만 한 번도 공장에 눈길을 준 적이 없었다. 그곳에서 미국으로 독일로 팔리는 기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사실 난 ‘콜트’라는 기타가 있는 줄도 몰랐다.
공장 마당에 사람들이 모였다. 발언을 듣고 구호도 외쳤다. 집회가 끝난 줄 알았는데 공장 안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공장 마당에서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이 집회하는 중에도 공장 안에서 또 다른 노동자들은 일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공장 안으로 들어간다고 하니 긴장이 됐다. ‘공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으면 어떡하지? 공장 안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과 싸우게 되는 건 아닐까?’ 곧 해고될지도 모르는 노동자들과 여전히 공장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노동자들이 마주하는 그 공간과 시간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몰라 마음이 복잡했다. 공장 안에 있던 사람들은 아마도 우리가 들어오기 전까지 자신이 맡은 공정을 묵묵히 진행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들어간 순간 더 이상 일을 진행하지 않았고 작업대만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공장 안에 있던 사람도, 공장 밖에 있던 사람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수만 번 오고 갔을 것 같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서로 다른 미래 앞에 대화를 멈추고 시선을 돌리는 이 광경을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이들을 이렇게 잔인한 시간으로 몰아넣은 사람은 그곳에 없었다.
노동자들이 일하는 공간이 이런 곳인 줄 몰랐다. 공장 1층은 넓지만, 창문이 하나도 없었다. 작업대에 선 노동자의 머리까지 내려온 형광등이 수십 개지만 공장은 침침한 느낌이었다. 밖에 있던 노동자들이 연대 온 동지들을 이끌고 공장 안 구석구석을 소개했다. 작업대에 서 있는 사람들을 곁을 지나며 힐끗 작업대를 쳐다보았다. 손때 묻은 기계와 공구, 부품들, 먼지가 뽀얗게 앉은 전등갓이 보인다. 각 공정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기타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따라 걸었다. 기타에 색을 입히고 광택을 내는 곳에선 코를 찌르는 유기용제 냄새가 났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곳은 완성된 기타들이 진열된 곳이다. 알록달록 각양각색의 기타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이제 포장이 되어 누군가의 손으로 연주되길 기다리는 기타들. 낡은 공장에 저 홀로 빛나는 아름다운 기타를 보고 있으니 서러움이 울컥 솟는다.
기타는 자동화 기계로 뚝딱뚝딱 만들어지는 줄만 알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의 손을 거치는 노동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나무를 재단하고, 사포질을 하고, 페인트를 바르고 광을 내는 과정 하나하나가 사람의 손을 거쳐야했다. 그러다 보니 산재사고도 많았다. 기계톱에 손가락이 잘리고, 사포질과 연마질로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고, 나무먼지와 유기용제를 마시며 일하다 기관지염과 천식에 시달렸다. 노동자들이 창밖을 바라보며 딴생각을 할까 봐 있던 창문을 다 막아버린 공장에서 밤낮없이 기타를 만든 시간이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이 넘었다.
한 노동자가 얘기한다. “이 기타는 눈물의 기타, 내 눈물만이 아닌 각 공정을 거치며 눈물로 만든 기타. 그래서 기타를 누르면 눈물이 나와.” 자신의 임금보다 비싼 기타. 그래서 공장에서 함부로 뛰어서도 안 되고 기타한대를 가져본 적도, 연주를 해본 적도 없는 기타노동자. 지문과 바꾼, 손가락과 바꾼, 기관지와 바꾼 그 기타가 제일 자랑스러운 기타노동자. 텔레비전에 기타가 나오면 자신이 만든 기타인지 유심히 쳐다보고 콜트기타가 맞으면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만든 기타야.” 해고된 뒤에도 기타만 보면 눈을 반짝이는 기타노동자. 연대하러 온 뮤지션이 기타로 연주를 하면 어떤 브랜드의 기타인지부터 살피고 콜트기타가 아니면 자못 실망한 목소리로 말한다. “우리 기타도 좋은데.” 자신을 쫓아낸 사장은 미워도 여전히 콜트기타는 이들에게 소중하다. 노동자들이 말하는 ‘우리’에는 함께 일하는 노동자가 있고, 미래를 꿈꾸며 일하던 공장이 있고, 자신의 손으로 만든 기타가 있다. 그러나 박영호 사장에게는 ‘우리’가 없다. 그저 돈만, 이윤만이 있다.
기타노동자들이 9년째 싸우고 있다. 왜 이리 오래 싸우느냐고 사람들이 묻는다. 그 시간이면 다른 직장을 구해서 더 잘 살 수도 있을 것 같은 안타까움과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음이 이런 질문으로 이끈다. 근데 그 이유를 대체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해고가 옳지 않기 때문에 굴복하거나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또는 그냥 발걸음을 돌리기엔 너무 억울해서, 나의 마음이 용납하지 않는데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살 수는 없어서. 때로는 스스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그럴 수 없었던 그 마음을, 하루에도 몇 번씩 무너지는 마음을 다시 추스르고 쌓아올린 그 시간을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나는 그것을 노동자의 자존심, 노동자의 정의라고 말하고 싶다. 어찌 보면 대단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삶을 일구고 미래를 설계했던 그 공장이 소중했고, 자신의 노동이 자랑스러웠던 만큼 정당한 대우를 원했다.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하고 무시당하지 않고 제대로 임금을 받는 것이 당연했다. 기타가 소중한 만큼 노동자 자신도 소중한 존재였다. 너무 당연해서 대단하지도 않았던 그런 이유로 노동조합을 만들고 노동의 권리를 말했다. 하지만 사장은 철저히 무시하고 공장 문을 일방적으로 닫았다. 그것은 노동자들이 믿고 있는 정의가 아니었다.
노동자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노동의 정의를 위해 9년을 시간을 보내고 있는 기타노동자들을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모욕했다. “잘나가던 회사가 강성노조 때문에 망했다.”며 기타노동자들의 지난 9년의 시간을 짓밟았다. 거리에서 모진 시간을 견디던 기타노동자들의 가슴을 치게 만드는 이 발언은 결국 그들이 곡기를 끊게 만들었다. “싸우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라며 단식을 시작한 방종운 콜트악기 지회장은 단식 45일째 병원으로 실려 갔고 뒤를 이어 이인근 콜텍 지회장이 단식을 하고 있다. 이 잔인한 시간이 얼마나 오래 가야 하는 것일까? 그들은 여전히 정의를 믿고 희망을 건다. 싸워서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기타를 만들며 존중받는 노동자가 되길 바라는 무기한 농성 50일째, 여의도 찬바람 속에 오늘도 꾸준히 살아가고 있는 기타노동자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