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8번 출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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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8번 출구에서
  • 다산인권센터 랄라 활동가
  • 승인 2016.01.26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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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8번 출구 앞에 발걸음이 멈춘 지 벌써 77일차 입니다. 쨍한 가을 날씨에서 시작된 우리의 농성은 이제 온 몸에 한기가 가득한 한겨울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땅값이 가장 비싸다는 동네 강남.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건물은 햇볕 한줌조차 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루종일 들끓는 소음과 매연은 귀마개와 마스크 없이 버티기 힘들었습니다. 분주히 지나가는 사람들의 무관심과 외면에 가끔은 외로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77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람을 외면한 기업, 소통을 거부한 기업 삼성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8년 전 한 아버지의 절규로 시작되었습니다. 23살의 딸을 먼저 보낸 아버지는 딸의 죽음에 의문을 품었습니다. 건강하던 딸이 갑자기 백혈병이란 무서운 병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한창 생기 있어야 할 23살의 나이에 딸은 시름시름 아팠고,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투병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아픈 딸을 지켜만 봐야하는 부모의 마음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어렵사리 택시운전을 해가며 병수발을 하던 아버지. 그 아버지는 딸의 투병과정에서 뜻밖의 이야기를 만났습니다. 딸과 같은 공정, 같은 라인에서 일하던 언니도 백혈병, 딸과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젊은 남성 엔지니어도 백혈병, 딸과 같은 공장에서 일했던 동료들에게 무수하게 일어났던 생리불순과 불임, 유산. 이야기를 전해들은 아버지는 딸의 병이 단순히 개인적이지 않음을 깨닫고, 여기저기 찾아다녔습니다. 국회의원, 언론사 등 찾아간 곳은 모두 아버지의 절규를 외면했습니다. 바로, 아버지의 딸이 일했던 회사는 세계 굴지의 기업이라는 삼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두 삼성과 싸움할 생각말라는 이야기를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삼성이든 그 무엇이든 딸을 아프게 한 이유를 밝혀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저기 수소문 한 끝에 마침내 아버지는 자신의 이야기에 공감해줄 사람을 만났습니다. 고 황유미의 죽음에서 시작된 삼성 반도체 직업병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황상기 아버님과 우리들의 싸움, 이것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의 시작이었습니다.

8년전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 황유미씨 아버지 황상기 님

그로부터 8년이 흘렀습니다. 고 황유미의 이야기가 세상에 얼굴을 내밀자, 숨죽여 있던 직업병 피해 노동자들이 제보를 해오기 시작했습니다. 황유미와 같은 백혈병, 뇌종양, 유방암, 재생불량성 빈혈, 다발성 경화증 등 이름도 외기 힘든 희귀질병과 유산, 불임, 2세로의 유전 등 질병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습니다. 지나 8년간 반올림으로 제보해온 피해자 수는 221명이고, 그 중 사망자는 75명입니다. 숫자로서 기록하고 있지만, 기록 너머에 피해자들이 느꼈던 질병의 공포와 좌절감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의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20대를 온전히 투병으로 보내다 세상을 떠난 피해자. , 아들, 남편, 아내를 잃고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 했던 피해자. 눈과 다리 중 무엇을 살리고 싶냐는 물음에 좌절해야 했던 피해자. 그리고 투병중인 가족들을 지켜봐야 하는 무수한 사람들. 직업병으로 인해 고통 받는 것은 피해자만이 아닙니다. 피해자와 가족들, 그리고 관계 맺는 많은 사람들 모두입니다. 삼성으로 인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아프고, 너무 많은 삶들이 고통스러웠습니다. 무엇보다 소중한 한 우주가 직업병으로 인해 서서히 소멸되어 갔습니다. 올해만 해도 벌써 5명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죽음의 행렬을 이제는 멈춰야 합니다.

굴뚝 없는 청정한 공장, 세계 초일류의 삼성 반도체. 삼성을 일류로 만들어준 반도체공정은 노동자들의 무덤이었습니다. 하얀 방진복과 티끌하나 없는 반도체공정. 하지만 방진복은 노동자들의 몸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칩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고, 일상적으로 화학물질을 사용하며 일했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화학물질을 사용하는지 노동자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화학물질이 내 몸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제대로 된 안전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화학물질의 유해성과 영향에 대해 알려줘야 할 사업주는 생산만을 강조할 뿐이었습니다. 3교대 근무, 화장실에 숨어서 빵을 먹고, 화장실 한번 제대로 갈 수 없을 만큼 일에 시달렸던 노동자들. 이렇게 열심히 일하다 병에 걸린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외면이었습니다. 삼성은 처음에는 직업병이 개인질병이라며 외면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자신들의 공정은 안전하다며 안전성을 증명해내려 했습니다. 법원에서도 직업병이라고 인정하자 그제서야 "직업병으로 의심되는 모든 분들에게 사과"한다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삼성이 자신의 책임을 간접적으로 시인하기까지, 사과라는 고개 숙임을 받아내기까지 7년이 걸렸습니다. 그토록 듣고 싶던 삼성의 사과를 듣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야 했던 피해자들을 삼성은 알까요?

삼성의 사과에 직업병 문제가 해결되는가 하는 희망도 보였습니다. 하지만 삼성은 여전히 "돈의 논리"만을 강조했습니다. 반올림과의 교섭에서 삼성은 "보상"을 먼저 하자고 했습니다. "먼저 보상, 연내 보상, 보상, 보상" 이제는 사회적 합의기구인 조정위의 권고안마저 무시한 채 삼성 독자적 "보상위원회"를 꾸려 피해자들에게 보상하겠다고 합니다. 보상받으면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는다,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받으려한 사실이 국회의원 은수미의원에 의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고통 받는 피해자들의 아픔을 얼마의 돈으로만 환산하려는 삼성의 꼼수, 이것이 강남역 8번 출구에 농성장을 마련하게 된 이유입니다. "보상"뿐 아니라, 진정성 어린 "사과",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안전한 공장을 만드는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하라는 요구를 건 싸움입니다. 77일이 넘어가지만 삼성은 여전히 모른 척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면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지만 우리는 끝까지 여기서 삼성의 세상과 싸워갈 참입니다.

 

강남역 8번출구 앞 반올림 농성장

겨울바람이 매섭습니다. 전기를 사용할 수 없어 전기장판은 엄두도 못 냅니다. 핫팩의 간간한 온기에만 유지하여 하루를 버팁니다. 너무 추워 비닐이라도 치려고 하면, 1미터이상 높이 치지 말라고 합니다. 대기업 삼성이 보여준 것은 1미터도 안 되는 알량한 자존심이었습니다. 근처 건물의 화장실도 못가서 지하철 역까지 빙빙 돌아갑니다.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합니다. 최소한의 편의와 편리가 없는 한겨울의 농성장이지만, 우리는 이곳이 제일 따뜻합니다. 모두의 바람이 뭉쳐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유미를 향한 아버지 황상기님의 마음, 뇌종양 피해자 혜경씨와 어머니 김시녀님의 눈물, 그리고 도시락의 온기로, 연대의 손길로 함께 하는 모든 이들의 희망. 그래서 아직은 힘이 납니다. "다시는 나 같은 피해자가 있어서는 안돼요" 라는 바람이 있는 이상, 삼성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마음이 있는 이상, 강남역 8번 출구의 농성은 계속됩니다. 오며가며 들러주세요. 이곳에 직업병 피해노동자들이 있습니다.

 

농성장을 우산 하나가 든든하게 떠받치고 있다

삼성 직업병 싸움, 내년이면 횟수로 9년이 됩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9년쯤 되면 삼성이 정신차려야 하지 않을까요? 노동자는 안전한 작업장에서 일할 권리가 있습니다. 기업은 안전한 작업장을 만들 책임이 있습니다. 제발 삼성이 그 책임에 충실한 기업으로 거듭나길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