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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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의 이야기
  • 엄마의 노란 손수건 김연지
  • 승인 2016.04.04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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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2주기에 즈음하여

Y는 집에서 아이만 잘 키우면 된다고 생각하는 평범한 엄마였다.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6살 난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던 Y는 어느 봄날 수많은 사람들이 탄 배가 침몰하고 있다는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곧이어 전원 구조의 소식을 듣고 다행이라 생각하며 하루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낮에 접한 기사와는 달리 저녁에 보도 된 내용은 구조인원 0. 그 배 안에는 수학여행을 가던 학생들이 타고 있다고 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써 그 아이들의 부모가 얼마나 애가 탈지를 생각하니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Y는 단 한명이라도 살아 돌아오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결국 단 한명도 구조되지 못한 상황에서 자식의 구조를 애타게 기다리는 부모들의 소식을 접하게 될 뿐이었다.

왜 구조를 받지 못하고 죽어야만 했는지 국가가 알려주길 바랐다. 그러나 국가는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런 국가를 대신해 희생자 가족들은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특별법 제정 서명과 단식을 시작했다. 희생자 가족들에게 한이 남지 않도록 모든 조치를 취하겠다고 한 대통령의 기자 회견과는 달리 나아지는 것은 없었고 돌아가는 실상은 언론에서 보도되는 것과는 달리 이상한 상황들만 벌어질 뿐이었다. 그들을 위해 무어라도 해야겠단 생각으로 동네에서 짬짬이 서명을 받던 Y는 희생자 부모들이 단식을 하는 곳으로 매일같이 피켓을 들러 나갔다. 46일간을 곡기를 끊고 자식이 죽은 이유를 알려달라고 호소하던 한 아이의 아빠. 그러나 그 목숨 건 호소에 응답하는 높은 분들은 없었다. Y는 뼈만 앙상한 몸으로 대통령에게 향하는 그 아빠를 테러리스트 취급을 하며 막아서는 사복 경찰들을 보았다. 단식을 하는 아빠를 조롱하며 피자와 햄버거 파티를 벌이는 일베들의 모습도 보았다. 21페이지의 특별법 내용 중 재난발생시 국가가 해야 하는 통상적인 배보상 내용을 부풀려 유가족이 과도한 요구라도 하듯 호도하는 정치인과 언론을 보았다. 그 유언비어들만 믿고 가족을 잃은 사람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경찰들이 희생자 가족들을 둘러싸고 경찰버스로 막은 채 몰래 폭력을 일삼는 모습들도 보았다.

특별법이 제정 되어 죽음의 원인이 밝혀진다 한들 희생자 가족들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책임자가 처벌 되고 이 사회가 바뀐다고 한들 그들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이미 소중한 가족을 잃었는데.” 8월 땡볕에 처절한 마음으로 피켓을 들다 돌아온 Y는 달궈질 대로 달궈진 몸을 차가운 물에 식히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으려 애를 썼다. 그 물음들의 답은 하나였다. “이 일은 절대로 남을 위한 일이 아니구나. 앞으로 이 땅에서 살아 나가야 할 나의 가족, 나의 아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일이구나.”라는 것이었다.

Y는 희생자 가족들과 시민들이 함께 받은 수백만의 특별법 제정요구 서명지를 청와대로 전달하러 가는 날에도 함께 했다. 가족을 잃은 아픔을 지닌 채 계속되는 노숙생활로 만신창이가 된 희생자 가족들은 삼보일배를 하며 청와대로 향하려 했다. 그러나 몇 걸음 떼지도 못한 채 수 많은 경찰들의 벽에 가로막혀야만 했다. 서명지만 전달하게 해 달라는 간곡한 호소도 소용이 없었다. 제 자리에서의 삼보일배는 4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흐느낌과 통곡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제발 길을 터 달라 처절하게 애원하는 가족들의 모습. 그 곁에서 안타까움에 이 사람들 이러다 몸 다 상해요. 제발 길 좀 터줘요.” 애원하는 시민들의 호소도 소용이 없었다. 한 엄마가 다리 밑을 기어서라도 가려고 경찰들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러나 길을 터주기는커녕 그 엄마의 목을 다리로 조르는 경찰들의 모습을 Y는 똑똑히 보았다. ‘처참하다. 선혈이 낭자하지 않고도 이렇게 처참한 광경이 있을 수가 있구나.’ Y는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 광경들을 목격하며 또다시 수많은 물음들에 휩싸였다. “도대체 왜? 진실을 밝혀달라는 사람들의 호소를 저토록 막는단 말인가?” 이러한 상황들은 주요 언론에는 제대로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상황을 왜곡하는 기사들만 난무할 뿐이었다.

할 수 있는 갖가지 방법들을 다 써봤다. 그러나 그 해 11, 가족들이 바라던 수사권과 기소권은 빠진 채 반쪽짜리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 되었다. 통과시킨 그들의 변은 이것이었다. “특검을 하면 되지 않느냐.”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바다 속에 아직 가족들 곁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음에도 수색을 중단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로써 그 사건은 종결 되었다고 국민들이 믿기를 그리고 희생자 가족들과 진실을 원하는 사람들이 포기하기를 바란다는 듯이.

그러나 자식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부모이다. 그리고 곁에서 모든 과정들을 지켜본 시민들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다짐을 새기며 Y와 많은 사람들은 그 사건이 잊혀 지지 않도록 애를 쓰며 힘겨운 겨울을 보냈다.

이듬해 1, 특별법에 따라 진상을 조사하는 기구가 출범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러나 실상은 보도만 나왔을 뿐 예산도 지급되지 않았고 조사할 인원들조차 꾸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허상뿐이던 기구를 허수아비로 만들기 위해 대통령 시행령이 발표 되었다. ‘조사받아야 할 대상들이 조사를 해라. 정부에서 조사한 내용만을 가지고 검토만 해라.’ 누가 봐도 비정상 적인 내용인 이 시행령을 막기 위해 희생자 가족들은 삭발을 하고 아이의 영정사진을 들고 행진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거대한 권력 앞에는 모든 것이 허사였다.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채 배가 침몰한 그 날로부터 일 년이 지났다. 1주기 즈음 다시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언론에서는 누구도 동의하지 않고, 받은 적이 없는 배보상금을 부풀려 흘렸다. 국민들과 희생자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듯. 그리고 여태 하지 않고 있던 인양도 대단한 노력을 하고 있는 듯 보도를 했다. “대체 어느 부모가 자식의 죽음에 돈 몇 푼 더 받자고 수작을 부리겠습니까? 도대체 누가 차디찬 바다 속에 가족이 있는데 다리를 뻗고 잘 수가 있겠습니까?” Y는 보상금 운운하며 사람으로서 내뱉지 못할 말들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 되물었다.

잊혀 진 줄 알았지만 따뜻해진 봄날과 함께 잊지 않은 많은 시민들이 1년 전 그 사건의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광장에 모였다. Y도 남편과 일곱 살이 된 아들과 그 자리에 함께 했다. 또 며칠 째 희생자 가족들이 경찰들에 둘러싸여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희생자 가족들이 고립된 채 참석하지 못하고 치러지는 추모행사 도중 경찰들이 또 가족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다급한 소식이 전해졌다. 가족들의 목을 조르고 때리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추모객들은 위험한 상황에 처한 가족들 곁으로 가길 원했다. 그리고 분향소에 국화꽃을 헌화하자며 꽃 한 송이씩을 손에 들고 가족들이 있는 방향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그런 그들 앞을 어느새 준비 해둔 경찰 차벽과 캡사이신 물대포가 막아섰다. Y와 시민들은 추모조차 온전히 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언론은 추모객들을 폭도로 둔갑시켜 보도를 해댔다. Y는 그 기사에 현혹되어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었다. “그 곳에는 아이를 데리고 나온 추모객들이 많았습니다. 저 또한 그랬습니다. 폭력적인 시위를 할 생각이었다면,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나갈까요?”

일 년 넘게 많은 사건들을 목격한 Y는 정말로 알고 싶었다. 진실 저편에 무엇이 있기에 이리도 촘촘히 막는 것인가를. 미리 정해둔 답은 없었다. 그냥 왜 사람들이 구조를 받지 못하고 죽어야만 했는지를 밝혀, 잘못된 것을 고칠 수 있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진실을 밝히는 일을 일상으로 받아들인 Y는 어느 날 또 기가 막힌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사건을 조사하러 만든 기구에 방해인물들을 심어 두었다고 했다. 해수부로부터 내려온 자세한 지령이 담긴 문건이 발견 되었다는 것이다. ‘설마, 문건까지 유출됐는데 그대로 하겠어?’라고 생각했던 것은 큰 오산이었다. 뻔뻔하게도 그들은 그 문건 그대로 끝까지 임무를 수행했다. 이 또한 언론에선 침묵을 했고 진실을 알리고 잘못을 바로잡으려던 이들의 몸부림은 또 허사로 돌아갔다. 시민단체를 매수해 조사기관을 무력화시키는 활동을 하게하고, 희생자 가족들을 고소하라는 내용이 담긴 문서와 녹취록도 나온 일이 있었지만 이 또한 언론에선 침묵했다.

위의 이야기들은 음모론이 난무하는 소설이 아니다. Y는 필자이며, 내가 직접 겪고 보고 듣고 사실을 확인한 내용들이다. 위의 이야기는 세월호 침몰 후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상식대로라면 국가재난 상황에서 왜 구조 활동이 잘 되지 못했는지, 왜 그러한 재난이 발생했는지의 원인을 밝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이 국가의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는 상식 밖의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아무도 구조하지 않던 침몰시각에 학생들을 구조하다 돌아가신 선생님들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순직처리를 받지 못했다. 국가를 대신해 시신을 수습하던 이들도 민간 잠수사들이었다. 그들은 위급한 상황에서 사용할 의료장비 하나 갖추지 못한 채 목숨 건 작업을 했다. 그러던 중 한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 또한 정부는 책임을 지지 않았고 동료 민간잠수사에게 책임을 묻는 재판을 했다. 세월호 참사는 가만히 있으라고 가르치는 교육이 빚어낸 참사이기도 하다. 아직 바다 속에서 돌아오지 못한 선생님과 학생들이 있는 단원고. 희생학생 부모들은 단원고로부터 시작하여 잘못된 교육이 바뀌기를 바랐다. 아이들이 생활하던 교실이 그 역할을 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교실을 보존하면서 신입생을 받을 수 있는 방법들을 제안하고 함께 의논하기를 바랐지만, 학교와 교육청은 외면을 했다. 그 사실은 숨기고 이제 와서 마치 가족들이 생떼라도 쓰는 듯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다. 그 모습에서 교육을 하러 간다며 아이들을 데리고 간 사람들의 책임 의식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지난해 12월 보도되지 않은 채 조용히 세월호 청문회가 치러졌다. 그곳에 나온 증인들은 하나같이 모르겠습니다.”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데서 할 줄 알았습니다.”라는 대답들을 했다. 그에 보다 못한 민간잠수사가 울면서 물었다. “보잘 것 없는 저희들도 생생하게 기억이 다 나는데, 높은 곳에 계신 훌륭한 분들은 왜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십니까?” 어느 증인은 희생된 학생들에 대해 아이들이 철이 없어 배에서 탈출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희생자만 있을 뿐 책임지려는 이는 하나도 없는 세월호 참사.

오는 328,29일 제 2차 세월호 청문회가 열린다. 국민의 알 권리를 묵살한 채 생중계 또한 미지수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찾아보기를 바라는 것이 이 나라에서 바랄 수 있는 최선일 뿐이다. 특검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던 자들은 이제는 특검조차 하지 말라 한다. 세월호는 목숨을 잃은 304명과 그 가족만의 일이 아니다. 안전을 위해 원칙을 지키며 일하는 기업을 바라는,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해줄 국가를 바라는, 비정규직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서민들인 우리 모두의 일이다. 진실을 밝혀 바로잡지 않는다면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들이 만든 4.16연대가 출범되었다. 행동하지는 못하더라도 많은 이들이 회원이 되어 그들에게 힘을 모아준다면 희망은 더욱 커질 것이다.

아직도 가족 곁으로 돌아오지 못한 9명의 미수습자가 있다. ‘세월호에 아직 사람이 있습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있다가 행인에게 사람이 있다고? 벌써 물고기 밥이 되었지 그게 사람이야!!!(욕설)”라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대한민국의 인간성을 바로잡아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함께 행동하자는 4.16인권선언도 제정되었고 함께 선포할 선언인도 모집 중이다.

 

사진출처 : 정운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채 세월호 2주기가 다가오고 있다. 그 날을 앞두고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는 시간들을 갖기를 바란다. 잊지 않았다는 의미로 노란리본을 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작은 것이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한다면 자신이 살아갈 세상을 바르게 바꿔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일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만으로 외면하고 침묵하고 가만히만 있다면, 언젠가는 나의 고통으로 되돌아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