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바라지 골목’이라는 명칭에 대해
최근 ‘강제철거’와 관련하여 서울시 종로구 무악동 46번지 일대가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철거를 집행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상황을 이 글에서 너무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이곳이 철거의 집행과 반대라는 입장 차이에 따라 ‘무악 2구역’―‘옥바라지 골목’이라는 완전히 다른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는 점은 환기하고자 한다. 특정 공간이 여러 이명(異名)으로 불린다는 것은 그 자체로 특이한 일이 아니지만, 이곳의 상황을 유심히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현 시점에서 호명의 차이는 곧바로 이 공간에 대한 인식에 어떤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 근본적인 차이를 알아차리기 위해, 예를 들어 이런 접근은 어떨까? 이곳을 ‘무악 2구역’으로 부르기 시작한 종로구는 불과 4년 전에 구정(區政)의 일환으로 “서대문형무소 옥바라지 아낙들의 임시기거 100년 여관골목”이란 간판을 만든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올해 초 롯데건설에 아파트 건설 인가를 내 주면서 이 간판을 너무나 무심하게 떼어버렸다. 더 이상 이렇게 부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반면 주민과 활동가, 일부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옥바라지골목보존대책위원회’는 음악회, 낭독회, 강연회, 상영회 등을 통해 끊임없이 사람들을 이곳에 불러 모으려 노력하고 있다. 이 활동의 의미는 ‘옥바라지 골목’의 보존과 더불어 이 명칭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길 바라는 데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다소 무의미해 보이는 이 질문을 이 글 말미에 새롭게 탈바꿈시키고 싶은데, 이를 위해 ‘옥바라지 골목’의 역사를 조금 따라가 보고자 한다.
옥바라지하는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
옥바라지가 수감자를 뒷바라지 하는 행위임을 새삼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 단어에 ‘골목’이라는 표현을 부칠 수 있다는 점에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 사람들이 어느 곳을 ‘옥바라지 골목’이라고 부르는지를 다른 방식으로 떠올리자. 우선 바로 맞은편에 서 있는 감옥이 떠오를 것이다. 이 감옥은 1908년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근대식 감옥으로서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서울구치소 등의 개칭을 거쳤지만, 흔히 서대문형무소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범죄자’를 수용하는 기능을 우선 수행하는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범죄’ 행위를 아예 포기하게 만든다는 보다 근본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서대문형무소는 요즘 감옥처럼 변두리 지방에 따로 위치하여 사람들의 눈 밖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 않았다. 현저동 101번지에 당당히 자리 잡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과시했다. 이 근대식 감옥은 공포와 무기력감을 사람들에게 각인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렇다면 감옥의 기능은 완벽하게 수행되었을까?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통치자가 인식하는 ‘범죄’와 ‘저항’의 관계일 것이다. 통치자에게 범죄란 사회를 혼란하게 하는 일탈 행위일 뿐이겠지만, 사실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제가 범죄라고 판정한 모든 행위 중에는 식민지 조선에 살던 사람들의 저항이 언제나 포함되어 있었다. 때문에 식민지 조선인으로 하여금 “범죄 행위를 아예 포기하도록” 만든다는 것은 “저항 행위를 아예 포기하도록” 하는 것과 거의 같은 뜻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결국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저항이 포기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감옥이 웅장하게 서 있었음에도 저항은 그 형태와 규모를 달리하며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옥바라지’는 이 “끊이지 않음”의 근저에서 잔잔하게 그러나 끈질기게 움직였다. 통치에 직접적으로 저항하는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갇힌 이들은 가족과 동지의 옥바라지 덕분에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사식이나 의복 … 등을 들여보내주지 않았다면, 배고프거나 추워서보다 신세가 서러워서 못살았었을 것”이라는 어떤 사람의 회고는 분명 진심이었을 것이다. 공포의 상징이어야 할 형무소 근처에는 하루 종일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사식이나 의복을 파는 가게, 대서소(代書所), 여관 등도 생겼다. 1933년 무렵 어떤 소설가는 이곳에 “형무소사식차입소, 감옥밥파는집 … 간판들이 지붕을 디디고 선 것”을 보고 “감옥냄새”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이는 옥바라지하는 사람들이 감옥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여서 만들어진 분위기였다고 봐야 한다.
정말이지 너무나 자연스럽게 감옥에 맞서 저항을 근저에서 뒷받침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한 곳에 집결했다. 옥바라지 골목은 이렇게 만들어져 지금에 이르렀다.
무형의 행위를 기억한다는 것
그렇지만 아마 떠도는 의문이 있을 것이다. 서대문형무소는 1987년에 이미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우선 이 의문을 정리하기 전에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저항으로서 옥바라지가 식민지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민주화운동 역시 범죄로 인식되었다. 운동의 주체들은 수감된 이후에도 감옥을 새로운 운동 공간으로 삼아 활동했다. 나는 옥바라지가 이 활동을 가능하게 한 요소 중 하나였음을 다시 한 번 말하고자 한다. 오히려 옥바라지 골목에 대한 유형(有形)의 기록은 식민지 시기보다 해방 이후에 더 많이 발견하고 발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분명한 것은 서대문형무소(이때는 서울구치소)가 문을 닫자 더 이상 이 골목에 옥바라지를 위해 사람들이 올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골목을 지킨다는 것에 어떤 새로운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또한 요즘은 인터넷 시대이다. 옥바라지는 더 이상 특정 공간을 거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마치 의미가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옥바라지 골목은 ‘무형의 행위’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와 같은 새로운 차원의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한 고민 역시 이미 여기저기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 같다.
이쯤에서 두 개의 인용문을 제시하고자 한다. 옥바라지라는 무형의 행위를 지금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를 고민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는 식민지기를 살던 이봉수(李鳳洙)란 사람이 생각한 서대문형무소이다. 또 하나는 해방 이후를 살던 어떤 사람이 쓴 감상이다. 그는 자신의 남편이 민주화운동 때문에 억울하게 구속되었다가 대법원에서 유죄를 확정 받자 시를 한 편 지었다.
여하간 나는 때때로 벽이라도 박차고 나갈 생각이 불붙듯 나다가도 … 또 잡혀 갈 근심 있는 세상에 있다가 이 이상 더 잡혀 갈 데가 없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습다. 그러기에 어떤 날 밤에는 형사한테 잡혀서 경찰서 문전에 이르렀다가 눈을 번쩍 뜨면 숨이 하― 나오는 때가 있었다. (『동아일보』1930년 10월 22일)
심장이 떨고/ 숨이 가파르다/ 무엇이 두려우냐/ 온 몸 떨며/ 모든 기운이 땅 속으로/ 빨려 가는데/ 흐릿한 시야에/ 졸리운 판사의 목소리/ 언제나/ 정해질까 기다려보아도/ 결국/ 남는 건/ 또 다른 감옥이다. (『양심범의 아내가 쓴 눈물의 수기』 1978년)
이봉수는 세상과 감옥을 “또 잡혀 갈 근심 있는” 공간과 “이 이상 더 잡혀 갈 데가 없는” 공간이라고 느꼈다. 두 번째 글의 부인은 “결국 남는 건 또 다른 감옥”이라고 했다. 게다가 얼마 전 발표된 ‘옥바라지골목보존대책위원회’의 성명서에는 그곳을 떠나지 않고 있는 주민들의 삶을 “감옥살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미 감옥과 세상의 경계가 없어져 있는 상황이 존재했었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옥바라지는 감옥이라는 건축물에 수감된 자와 그 수감자의 가족·지인 등의 관계에서만 이루어지는 행위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감옥과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까? 그렇게 이야기한 이후에 이런 곳에서 절망하지 않고 삶을 지속하게 하는 동력이 언제나 우리로부터 나왔고, 또 나오고 있다고 지금보다 강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옥바라지 골목’을 지킨다는 것은 형태가 없는 저항의 기억을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선명히 하려는 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더구나 이 지키는 행위는 국가와 자본에 의해 감옥이 되어버린 골목을 해방시키려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저항의 새로운 형태를 우리 사회에 축적시키고 있다. ‘옥바라지’라는 무형의 행위는 무엇이며, 또 어떻게 기억하고 보존하며 계승해야 하는가? 우리 사회가 해 본 적 없는 생각들이 지금 다시 옥바라지 골목에서 태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