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에 10층 빌딩 하나!”
친구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교수님은 ‘유토피아’ 연구의 가능성을 묻고 있었다. 각 시대의 유토피아는 그 시대상을 반영한다는 말과 함께. 우습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했다. “부자 되세요”가 가장 흔한 인사말이 되어버린 한국에서, 주식 그래프와 집값 변동표에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일상에서 “강남에 10층 빌딩 하나!”는 가장 허황되지만 동시에 가장 익숙한 삶의 태도이다.
팍팍한 삶을 벗어나는 방법으로서 ‘개인’은 언제부터 주목받았을까? 어떤 이는 식민통치와 분단, 전쟁을 경험한 한국사회의 근본적 문제라 말할 테고, 다른 이는 사회적 연대에 기초한 운동의 시대가 종말을 고한 1990년대 초반을 말할 것이다. 또 다른 이는 시장논리가 각종 공동체를 파괴한 1990년대 후반 신자유주의의 광풍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 글의 목적은 ‘사회적 연대’ 단절의 기원을 찾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2016년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연대’는 색 바랜 단어, 또는 치기어린 이상으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헬조선’과 ‘노오력’의 자조 섞인 유행은 구조적 모순 아래 무력한 개인을 잘 보여줄 뿐이다. 이 글은 ‘헬조선’ 극복에 도움 되지 않을 내용을 담고 있다. 다만 시계바늘을 40여년 전으로 돌려 유신체제라는 또 다른 헬조선에 살았던 여성노동자들의 삶을 통해 오늘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과 이촌향도
1970년대 한국은 새마을운동의 시대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을 “잘살기 운동”, “한국적 민주주의의 실천도장”이라며 강조하였고, 전국적 보급을 위하여 행정지원과 전국 새마을지도자 육성, 새마을교육 보급 등에 힘썼다. 농촌, 도시, 공장, 학교, 군대 어디를 가도 ‘새마을’ 표어가 나부꼈다. 농촌에서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로 시작하는 ‘새마을노래’가 불렸다면, 도시에서는 보다 발랄하고 신나는 건전가요 ‘좋아졌네’(1972)가 유행하였다.
다른 한편, 농촌지역의 활발한 새마을운동 전개에도 불구하고 많은 청년들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몰려들었다. 서울은 만원이다(1966)가 인기리에 연재될 정도로 서울은 이미 포화상태였지만 농어촌 젊은이들의 서울이주는 늘어만 갔다. 1970년 1년 간 서울시로 순이동(총전입-총전출)한 인구는 29만 여명이었는데 1975년에는 무려 한 해 동안 5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서울로 순이동하였다. 이는 서울시 공식통계이므로 전입신고를 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고려한다면, 훨씬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몰렸음을 알 수 있다.
농촌 젊은이들은 무턱대고 서울로 올라오지 않았다. 그들은 먼저 상경하여 정착한 친인척 또는 마을주민들의 집을 향했다. 산업화 초기에는 직업훈련, 직업소개 제도가 미비하여 일자리를 얻는데 연고채용이 일반적이었다. 농촌출신 청년들은 직업소개소도 들렀지만 주로 ‘고향 아저씨’, ‘친척’, ‘동네 언니’ 등의 소개로 일자리를 구했다. 특히 도시에서는 직업이 위계화 되어 있어, 고향 인맥은 청년들이 선호하는 대규모 사업장 취업 여부를 결정하는 ‘빽’으로 활용되었다.
공장새마을운동과 여성노동자들의 공동체
마찬가지로 1970년대 도시 여성노동자들의 직업은 위계화 되어 있었다. 학력수준과 ‘빽’의 여부, 나이 등을 기준으로 방직·방적업의 대공장부터 가발공장, 시다, 식모 등의 순서로 노동 공간은 줄 세워져 있었다. 심지어 농촌출신 여성들은 도시에서 부적응할 경우, 매매춘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사회적 편견과 실제적 위험 사이에 존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조운동으로 유명한 동일방직, 방림방적, 반도상사, YH무역 등은 당시 여성들에게 선망 받는 사업장이었다. 일이 고되었지만 다른 여성노동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후생복지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작업복은 교복을 입어보지 못한 저학력 여성들의 대리만족 수단이기도 하였다.
한편 대규모 사업장은 “근로자를 가족처럼, 공장 일을 내 일처럼” 슬로건을 내걸면서 공장새마을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본래 공장새마을운동은 노사협조의식을 고취시키고 순응적인 노동자를 육성하여 생산성을 극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는 새마을운동에 익숙하였던 농촌출신 여성노동자들에게 쉽게 먹힐 수 있는 전략이었다. 자본가들은 그녀들에게 ‘공장 종업원’의 집단적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현장 분임조를 활용하였다. 여기에서 ‘공장 종업원’ 정체성이란 공업기계의 리듬에 맞는 신체와 규율의 확립, 근면·성실하고 생산적인 노동자상 구축을 말하였다. 반장-조장-조원으로 이어지는 분임조는 생산의 기본단위였지만, 공장새마을운동 내에서는 그밖에도 집단 레크레이션, 새마을교육, 분임토의, 환경미화 등의 기초단위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운동 방식은 의도치 않은 효과를 발생시켰다. 법적으로 노동조합 활동이 제한된 상황에서 ‘분임조’ 모임은 노동조합과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여성노동자들은 분임토의 과정에서 자신들의 근로조건을 둘러싼 불만들을 토로했고, 새마을 반공교육을 받은 뒤에는 북한 천리마운동을 새마을운동과 비교하기도 하였다. 새마을조회에서 실시된 순번제 발표는 자신의 불만을 동료들 앞에서 공론화시키는 과정이었다. 즉 국가와 자본에게 분임조는 ‘생산력 향상’의 도구였으나 노동자들에게는 작은 수군거림을 모아 가며 사회적 연대를 구성하는 공간이었다. 실제로 민주노조였던 청계피복노조, YH무역노조, 반도상사노조 등은 ‘강성’ 이미지와 달리 초기 공장새마을운동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이처럼 국가와 자본가는 효율적 노동통제를 위하여 분임조를 활용했지만, 반대로 분임조의 ‘공동체성’을 언제나 경계해야 했다.
결국 정부는 1978년 분임조에서 논의할 수 있는 의제를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이 시기 노동정책은 더 이상 점증하는 노동문제를 관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노동자들은 공장새마을운동에서 교육 받은대로 열심히 일했는데 회사만 배를 불린다며 임금협상에서 자본가를 압박하였다.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으로 휴·폐업이 잇따르자 여성노동자들은 보다 강경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YH무역노조는 위장 폐업한 사장 장용호를 “공장새마을운동 원칙에 위배되는 반사회적 기업인”으로 비판하였고, 이는 유신체제를 몰락하게 만든 ‘YH무역사건’으로 전화되었다.
여성노동자들에게 사회적 연대를 묻다
현재의 ‘헬조선’은 분명히 과거와 다르다. 신자유주의는 권위주의 시기에 필요하였던 통치의 사회적 단위마저 최신 기술로 해체시켰다. 첨단기술은 더 수월한 노무관리에 활용된다. 광폭한 시장은 앞뒤를 가리지 않는 듯 보이지만, 그 이면에서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회로를 따라 촘촘하게 움직인다. 그 위에 ‘헬조선’의 개인은 더 없이 무력해보일 뿐이다. 제도정치와 운동정치 양 쪽에서도 ‘대안부재’를 토로하지만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다.
반대로 이런 상황이기에 40여 년 전 그녀들이 구축한 ‘사회적 연대’를 복기해보아야 한다. 한때 1970년대 노동운동은 이론의 부재로 인해 날선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론의 부재를 기준으로 그녀들의 경험을 평가 절하할 수 없다. 여성노동자들은 머릿속 휴머니즘으로 ‘사회적 연대’를 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작업장에서 자신들의 욕망을 타인에게 드러냈고, 그 좌절까지 스스로 마주하였다. 그것으로 ‘인간됨’을 선언하였다. 물론 이러한 수군거림이 한 자리에 모이기까지 무수한 사연들이 흩어지고 부서졌을 것이다. 또 사회운동의 흐름이 되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의 욕망과 좌절에 솔직해질 수 있는지, 타인의 그것을 들어줄 용기는 있는지 말이다. 헬조선 극복은 사회적 거처를 발견하고, 자신을 읊조리는 데에서 출발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