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의 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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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의 들보
  • 박진 (다산인권센터 활동가, 수원교구 정의평화위원)
  • 승인 2016.10.06 22: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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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쇄신_연속기고②

 

신자가 아니다. 그러나 수원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이다. 처음 제안받았을 때, 제안한 분이 내가 신자가 아니라는 걸 모르시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래서 제안했다는 말씀이었다. 오래 인권활동하면서 천주교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앞으로 도움받을 일도 많다.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면 함께 하는 것이 영광이라 말씀드렸다. 그렇게 천주교의 야릇한 일원이 되었다. 신부님, 수녀님, 그리고 신자들을 만나뵙고 같이 활동하지만 여전히 낯설다. 성당에서 부르는 이름조차 헷갈리고, 그게 무언지 묻는 일이 다반사다. “골룸바? 이름 멋지네요. 왜 이름을 그렇게 지으셨어요?”, “주교님이 하시는 일이 뭐예요?”, “수도회는 뭐예요?” 온통 모르니 용감하기도 하다. “어떤 신부님이 이런 평판을 들으시던데, 어떤 분이세요?”, “왜 교회는 그런 일에 나서지 않아요?” 그러나, 그래서 교회에 희망을 가진다. 나 같은 아무 것도 모르는 외부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목소리 들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정의평화위원회 전국모임 같은 곳에서 만났던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을 인권이 짓밟히고 평화가 무너지는 현장에서 다시 만나는 일도 반갑다. 어느새 신자가 아닌데, 애정하게 되었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고, 여전히 가족들은 개신교를 다닌다. 한때 선교사가 꿈이었다. 하느님 앞에 봉사하며 살고 싶은 선량한 소녀였다. 대학 가서 망했다. 세상의 부조리 앞에 하느님은, 예수님은 뭐하는지 원망스러웠다. 이런 신이라면 믿을 이유가 없다 생각했다. 세속 욕망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탐욕에 젖은 교회 사람들도 미웠다. 이후로 교회를 끊었다. 믿음이 깊은 부모에게 불효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를 가지 않는다고 믿음을 버린 것은 아니다.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라는 프란치스코의 기도와 성가를 좋아하며, 벼랑같은 절망감 앞에 서면 여전히 기도를 한다. 그래서 나는 교회를 다니지 않지만 믿음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다. 친하게 지내는 신부님들께 가끔 말씀 드린다. “천주교 신자가 될까요?” 그러면 신부님들은 말씀하신다. “가까이서 보면 실망할텐데, 괜찮겠어요?” 이 길만이 구원을 받는 길이라 말하지 않아서 감사하다. “지금처럼 억울한 사람 도우면서 살면 돼요. 교회 다니면서 나쁜 짓 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길이예요.” 교회가 왜 있어야 하는지 알고 계시는 분들이 있어서 참, 좋다. 수원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최재철 신부님, 양기석 신부님, 김형중 신부님, 하나 수녀님, 김재욱 사무국장님이런 분들을 만나서 행운이다.

 

그러나 종종 교회 내 이야기는 아쉬움을 넘어 이해하기 힘들다. 천주교 재단의 어느 곳에서 벌어지는 부당해고, 인권침해 사건들을 듣고 볼 때 내 눈 안의 들보를 보기는 어렵구나.’ 생각한다. 사실 교회만 그렇지는 않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서 일한다는 시민단체에서도 그런 일은 종종 벌어진다. 최근 모 평화단체에서 있었던 유명한 역사학자이며 대표적 진보연구가의 비민주적 행동과 그를 두둔하는 이들을 둘러 싼 사건도 있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어찌 감히 나한테 이런 문제제기를.”, “그런 훌륭한 분을 모함하는 이들로 인해 문제가 심각해졌다.”는 말들이 넘친다. 이런 사건과 사고들은 어떻게 줄어들 수 있을까? 오랫동안 인권현장에 있으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누구나 인권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인간이니까 인권침해는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다. 그러한 일이 발생했을 때 조직과 단체, 모임과 교회가 어떻게 나서는 지가 아주 중요하다.’

 

어떤 회사에서 여성노동자가 직속상사로부터 성희롱을 당했다. 지속적으로 당했다. 산에 같이 가자, 마사지를 해줄게, 연애하자쥐덫에 갇힌 것처럼 끔찍했지만, 직속상사였기 때문에 웃으면서 거절했다. 그것이 성숙한 사회인의 미덕인 것처럼 배웠고, 상사로부터 찍히기 싫었다. 그러나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상사가 몸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회사에 말했다. “죽을 것 같아요회사가 내린 처방은 이랬다. “둘 다 그만 둬라.” 가해자를 처벌하는 게 아니라 문제제기를 한 너도 시끄러운 인간이니까 그만두라고 했다. 이럴 때 피해자는 어떨까? 그야말로 디디고 있는 땅이 없어졌다. 그녀는 몇 년 동안 회사와 전쟁 중이다. 무너진 존엄의 훼손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회사가 다르게 대처했다면? 피해를 구제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면?

교회는 어떤가? 혹시 성직자가 인권침해의 문제를 일으켰을 때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사회에 대고 정의를 외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내 눈 안의 들보가 있을 때, 그것을 작다 하지 않는 용기다. 내 안의 모순을 용감하게 대하고, 정직하게 대면하고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할 때 정의와 평화는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말씀에서 가능성을 보고 있다. 교회를 다니든 다니지 않든, 사람들은 정의와 공공선을 통한 위로를 기다리고 있다. 낮은 곳에 임했던 예수, 왕이나 귀족의 자녀가 아닌 나무를 다루는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 교회는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사회에 나서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교회 내에서부터.

 

얼마전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종무원들의 복지 및 권익향상을 다룰 노사협의회가 구성됐다. 3대 종단인 불교, 개신교, 천주교를 통틀어 종단 차원에서 노사협의회가 구성된 것은 조계종이 처음이다. 조계종 제20대 종무원조합 원우회(위원장 정유탁)는 지난 1일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가 노사협의회 구성에 대한 승인 결정을 공식 통보했다고 7일 밝혔다. 노동운동을 오래했던 시민단체 대표가 있었다. 그이가 있는 단체의 실무자들이 불만에 가득 차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근무시간이나 활동에 대해 권한을 넘는 간섭이 심하다는 불만이었다. 그래서 실무자 노조를 구성해 보는 게 어때?”라고 말했다. 그이들은 우리 대표님 뒷목 잡고 쓰러질걸?”이라고 대답했다. 아뿔사노동운동에 잔뼈가 굵은 그이가 설마 그럴 리가그러나 현실이 그렇다. 천주교에서는 아직 조계종에서 만든 노사협의회 구성과 같은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 ‘내 안의 들보를 보자는 말은 선한 의도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모든 이들이 하느님 앞에 평등하다는 원칙을 실천하자는 것이다. 어렵지만 그러한 구조를 만들고 제도를 구축하고 건물을 설계하는 것이다. 문제제기가 들어오면 권력이 많은 이들의 문제일수록 더욱 엄격해지는 것이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이라,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교회는 남성에게, 성직자에게, 직책을 가진 이들에게, 돈이 많고 지위가 높은 신자들에게 더욱 많은 권한을 주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세속과 무엇이 다른가?”

아무것도 모르는 야릇한 정의평화위원은, 어떤 인권활동가는교회에 언젠가 한번 묻고 싶었다. 이 물음들을 읽어주셔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