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2일 보건복지부가 인공임신중절수술을 ‘비도덕적 진료 행위’로 규정하고 시술 의사의 처벌 강화를 골자로 한 의료법 개정안을 발표하면서 한국은 역사 상 처음으로 낙태 처벌에 대한 대중적인 저항이 확산되는 중이다. 최근 폴란드에서 일어난 낙태 처벌 강화 반대 시위인 ‘검은 시위’의 영감을 받아 검은 옷 차림을 한 젊은 여성들의 시위는 이번 사태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렇듯 단기간 동안에 수많은 입장서가 발표되고 연서명이 모아진 것이나, 낙태죄 폐지와 같은 사안으로 거리 시위가 거듭 조직될 수 있는 것은 지난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이래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기에, 그것도 젊은 여성으로 살아가기에 지친 여성들의 분노가 축적된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미 정부는 시행령 철회를 거의 결정한 후 전문가 간담회 등의 절차를 거쳐 ‘모양새’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라는 소문도 있고, 밀어붙일 것이라는 우려도 있지만, 현재 거센 여성 대중들의 반발과 전문가집단을 포함한 여론의 부정적 향방을 보면 아마도 의료법 개정안 자체는 철회 수순을 밟을 것으로 예측된다.
그렇게 개정안이 철회된다면 그 자체로 여성운동의 승리라고 볼 수 있을 것인가? 현 정부가 하도 고집불통이다보니 그런 자그마한 후퇴에 대해서도, 심지어는 공식적으로 일어나기도 전에, 여성운동 참 대단하다며 축하를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이제 예전대로 낙태할 수 있으니 그럼 된 거 아니냐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이번 운동이 단순히 낙태를 처벌한다면 여성과 실제로는 국가나 사회 역시 곤란할 테니 이제까지 하던대로 인공임신중절을 허용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핵심적인 사실을 놓치는 것이다. 시위에 나선 여성들이 성취하려는 바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대한민국에서 국가가 필요에 따라 여성의 임신, 출산을 도구화하고 통제해 온 역사에서 불가역적인 전기를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국가가 필요에 따라 여성의 임신, 출산을 도구화하고 통제해 온 역사
실제로 이제까지 낙태를 둘러싼 논쟁과 이번 사태가 매우 다르다는 사실은 여러 지점에서 나타나고 있다. 앞서 이야기 했다시피 일부 여성단체들만이 아니라 최근 페미니즘의 세례를 깊이 받은 여성대중들이 거리로 나오고 있다는 점이 다르며, 국제 연대까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도 새롭다. 하지만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지점은 이제까지 낙태 문제만 나오면 예외 없이 휘말려들어 갈 수밖에 없었던 태아의 생명권 논리가 큰 힘을 쓰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여기에는 의료인의 성범죄나, 향정신성 의약품을 복용한 상태에서의 진료나 대리진료 등 누가봐도 명백히 해서는 안 될 의료행위와 인공임신중절이라는 현실적으로 필요하기도 하고 실제로 많이 일어나고 있는 행위들을 동일선상에서 비도덕적이라 규정한 이번 의료법 개정안의 문제점 때문도 있었을 것이다.
저출산이 국가적 위기라고 하면서도 보육환경이나 노동조건 개선에는 지지부진한 국가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우리 사회에서 생명권이라는 말 자체에 대해 일반인들이 느끼는 감상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한다. 한마디로 이 국가가 생명을 입에 담을 자격이 있느냐에 대해 의구심을 넘어 분노를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이제까지 가족계획과 경제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여성들에게 낙태를 강요해 왔던 국가가 이제는 출산을 장려하겠다며, 기왕에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일말 회개하는 바 없이 오로지 여성들에게만 앞장서 돌을 던지는 현 사태의 부당함은 말할 것도 없고, 저출산이 국가적 위기라고 하면서도 보육환경이나 노동조건 개선이 지지부진한 데 대해서도 대중들은 분노하고 있다. 거기에 기껏 어렵게 태어나 다 자란 아이들을 구조하지 못한 세월호 사건은 아직도 거리에서 진실을 찾아 헤매는 중이며, 반도체 공장이며 구의역 등 수많은 노동 현장에서 끝없이 들려오는 희생자 소식은 우리 사회가 생명의 가치를 얼마나 하찮게 여기고 있는지를 매순간 확인시켜줄 뿐이다. 이렇게 이미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전혀 보호하지 않는 국가가 태어나지 않은 생명에 대해서만 생명존중 운운하는 것에 대해 시민들이 집단적으로 회의하고 반발하는 상황에서는 출생 이전의 태아를 여성의 선택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국가와 법의 정당성이 유지될 길이 없는 것이다.
함께 아이를 만든 남성도, 그 여성의 임신을 사회문제 취급하는 사회도, 지원보다는 통제와 억압만을 일삼아온 국가도 떠난 자리에 여성만이 홀로 남아서 죗값을 치르고 사회적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낙태가 죄라면 과연 그 죄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저 누군가의 통렬한 질문과 진지하게 마주할 필요가 있다. 왜 함께 아이를 만든 남성도, 그 여성의 임신을 사회문제 취급하는 사회도, 지원보다는 통제와 억압만을 일삼아온 국가도 떠난 자리에 여성들은 홀로 남아서 홀로 죗값을 치르고 사회적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가하는 문제 말이다. 실제로 낙태를 금지해서 출산을 늘리고 저출산을 극복해보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기획을 내놓기 이전부터 한국 국가는 여성들을 아이 낳고 기르는 도구로 대접해 왔다. 출산을 장려한다고 하면서도 막상 임신을 하는 경우에는 10대라는 이유로,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직장 생활에 충실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이주여성이라는 이유로, 임신을 빌미로 남자 발목 잡는다는 이유로 많은 임신이 사회적으로 냉대 받는 것이 한국의 민낯이다. 임신과 중절을 둘러싼 과정에서 막상 또다른 당사자인 남성은 책임과 처벌에서 완전히 면제되어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낙태 사실을 헤어진 배우자나 파트너에 대해서 협박을 할 빌미로까지 활용하여 법정으로 가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다. 그러니 출산이 여성에게 축복이라며 출산하지 않는 여성들을 뭔가 모자라는 사람인 듯 차별하곤 하지만, 막상 임신이 여성의 몸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은 국가와 남성이 여성들을 지배하고 통제할 구실이 되어왔을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임신할 수 있는 몸을 가졌다는 이유로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모욕은 이제까지 여성은 결국 한국 사회의 이등 시민이었다는 분노로 이어지고 있으며, 지금의 낙태죄 폐지 요구 역시 이러한 분노가 폭발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사회가 바뀌지 않고서 낙태죄를 엄하게 적용하는 것만으로 생명의 존엄함이 지켜지지는 않을 것
현실에서 여성들이 임신을 중단하겠다고 결심하는 이유는 대부분 실제로 여성이 삶에서 겪는 어려움이나 차별과 무관하지 않다. 원하지 않는 임신이란 살다보면 어쩌다 일어날 수도 있는 일임에도, 낙태죄라는 조항을 통해 어쩌다 일어날 수도 있는 그 일의 책임을 오롯이 여성에게 지우는 사회에서 여성들은 더 많은 임신중절을 하게 된다. 어쩌다 있을 수 있는 원하지 않는 일 한번으로 인생이 돌이킬 수 없게 되는 일, 한국 사회에서 그 일이 물론 원하지 않는 임신만은 아니다. 한번의 실패나 사고, 실수, 혹은 큰 병 한 번 앓는 일로 삶의 추락을 경험하고 삶의 기회를 박탈당할 수 있다는 공포는 어린 학생들로부터 장년의 가장, 노년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것이다. 이러한 사회가 바뀌지 않고서 낙태죄를 엄하게 적용하는 것으로 생명의 존엄함이 지켜지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낙태죄의 폐지야 말로 낙태를 줄일 수 있는 첫걸음이라는 명제가 성립한다. 그러므로 여성이 언제 어떻게 누구와 아이를 낳을지, 아니면 낳지 않을지를 자유롭고 안전하게 결정할 수 있는 삶의 권리를 누리는 사회라야, 태어나는 아이 역시 어떠한 사회적 조건에서 출생하든 삶의 권리를 누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여성들에게도 살아갈 권리, 삶을 결정할 권리를 허해야 한다. 결국 그것 이상의 생명존중 대책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