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있어 '다행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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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있어 '다행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해달라
  • 정욜(인권재단사람,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 승인 2017.09.12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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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SNS에 대구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한 이들의 인증샷이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다. 즐겁게 참여하고 있는 모습에, 그곳에 함께 있지 못한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집회신고를 하기 위해 경찰서 앞에서 노숙을 하고 성소수자 차별과 혐오를 선동하는 이들의 공공연한 방해가 예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황리에 잘 마친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몇 해 전 퍼레이드 대열에 누군가 인분을 투척했던 적도 있어서, 대구로 모인 성소수자들의 자존감이 훼손되지 않을까 우려했었나보다.

성소수자 인권이 나중으로밀린 한국 사회에서 퀴어문화축제는 광란, 음란축제라는 오명과, 에이즈 확산이라는 전염병 위험에 대한 잘못된 공포까지 더해졌다. 숨어있는 개인은 인정할 수 있지만, 드러내고 모이는 것에 대해서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물어뜯으려는 이들 때문에 퀴어문화축제를 안정적으로 개최한 것만으로도 다행스럽다라는 안도감을 먼저 느껴야 하다니 설명할 수 없는 씁쓸한 감정들이 올라온다.

 

동성애 때문에 에이즈가 창궐했다는 악의적인 거짓말

성소수자 인권을 흠집 내기 위해 단골 레퍼토리로 등장하는 혐오논리는 단연 에이즈다. 동성애 때문에 에이즈가 확산되고 있다는 말과 함께, 에이즈 환자 치료비에 수천억 원의 돈이 세금으로 쓰이고 있다고 강조하며 감염인을 세금도둑으로 묘사한다. 대선 후보토론에서도 등장하지 않았던가. "동성애 때문에 대한민국에 14000명 이상 에이즈가 창궐했다는 걸 아느냐고 말했던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의 발언은 거짓말임을 JTBC ‘팩트체크에서도 검증하여 보도했다. 성적 지향이 에이즈 발병의 원인이 될 수 없고, 전 세계적으로 에이즈 발병율이 매우 낮은 나라가 한국이라는 사실을 언급하며 바로 잡으려고 해도, 말은 이미 쏟아졌고 잘못된 정보가 전달되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서 에이즈는 공포의 질병으로 다시 재정립되었을 것이다.

같은 주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동성애 도시 만들기 싫다며 충청남도 인권조례를 폐기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 차별금지법은 동성애 허용법이라고 떠들며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동성애자 A대위가 합의에 의한 성관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처벌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리고 퀴어문화축제를 방해하기 위해 동원되는 혐오세력의 입을 통해서도 늘 확인하고 있다.

 

성소수자 인권을 흠집 내기 위한 단골 혐오논리로 쓰이는 에이즈(AIDS)

특히 감염인을 세금도둑으로 표현하는 그 말은 인간의 존엄을 위협하는 매우 위험한 말이다. 감염인 의료 지원 체계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의 경우, 정말 정부가 세금을 잘못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만든다. 본인의 잘못으로 병에 걸린 사람을 정부가 지원해주는 것이 맞는지 묻고, 나에게 돌아올 세금을 마치 쓸데없는 곳에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게끔 하고, 감염인을 세금이나 축내는 사람으로 묘사하며 인간성마저 모조리 삭제해버리는 그 논리. 낙인과 차별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감염인들이기에 이런 말들이 계속될 때마다 상처받고 힘들어하고, 사람으로서 존중받고 싶다는 마음조차 갖지 못하게 한다.

 

에이즈에 대한 왜곡은 감염인의 삶을 위협한다

에이즈 치료제가 지속적으로 개발되면서 복용방법도 간단해졌고, 비 감염인과 비교해 기대수명도 거의 차이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의학적으로는 그렇더라도, 감염인들과 이야기 나누다보면 깊은 상실감과 관계단절로 인해 사회적 죽음과 늘 사투를 벌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자신이 부주의했기 때문에 감염되었다는 생각, 타인을 감염시킬 수 있다는 두려움, 가족이나 지인의 돌봄은 커녕 아프다고 말하지도 못하는 답답함, 의료차별을 경험했어도 억울함을 표출하기보다 참고 견뎌내야 하는 현실, 치료제라도 국가가 지원해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말하는 상황 속에서 감염인에게 인권은 사치이자 감히요구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국가가 감염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삶을 포기하고 싶다고 말하는 감염인들에게 치료제는 생명줄과도 같다. 전체 감염인수의 10%가 넘는 이들이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아가고 있고 3개월마다 청구된 약값만 200만원이 훌쩍 넘는 상황인데 어떻게 개인이 국가의 지원없이 치료비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감염인이 정부에게 갖는 고마움은 당연하게 느끼는 감정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정부가 HIV감염인 치료비를 지원하는 것은 감염인의 딱한 사정을 헤아려서라거나, 감염인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비감염인의 건강을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질병확산을 통제하기 위해 시행하고 있는 제도라고 설명하는 것이 더 맞겠다. 치료제를 꾸준히 복용하는 감염인의 경우 HIV를 전염시킬 확률이 거의 없어지기 때문에 감염인의 건강은 물론 정부의 목적대로 국민 모두의 건강을 지킬 수 있다. 만약 치료비 부담을 개인에게 전가해 알아서 건강을 챙겨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대다수 감염인들은 치료비 부담에 삶을 포기하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치료비 지원은 물론 감염인들이 자신의 일상을 포기하지 않고 건강을 챙길 수 있게 도움을 주고, 사람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포기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에이즈 혐오와 공포를 조장하는 분위기 속에서는 에이즈는 나와 상관없는 질병일 뿐, 검사를 기피하거나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상황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는 감염인의 경우 치료를 포기하거나 숨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이 에이즈 예방에 도움이 되는 길인지 생각해본다면, 에이즈 혐오를 선동하는 행위는 더 이상 방치하거나 표현의 자유로 두둔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정부가 진정으로 에이즈 예방을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면 에이즈 혐오에 단호히 대처하고, 올바른 정보 전달은 물론 감염인 당사자들이 자기긍정을 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드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인권이 시혜적 선물이 아니라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임을 감염인들이 인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적 죽음을 강요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버티고 또 버틸 수 있지 않겠는가.

 

에이즈 혐오와 공포를 조장하는 것은 치료와 예방을 방해한다

6월은 프라이드 먼스(Pride Month)’로 불린다. 동성애 해방운동의 도화선이 된 스톤월항쟁을 기념하기 위해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성소수자 퍼레이드가 개최되고 기업들에서는 평등의 가치를 상품화해 레인보우 스페셜 제품들을 선보이기도 한다. 한국도 매년 6월 경 퀴어문화축제가 개최되었지만 올해는 7월로 연기되었다. 서울광장을 점거하고 있던 박근혜 탄핵반대세력도 문제였지만, 민원으로 포장된 성소수자 혐오선동에 서울시가 단호한 태도를 적극적으로 보이지 않으면서 성소수자들의 프라이드(자긍심)가 광장심의위원회의 심사까지 받아야 하는 상황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해마다 언제 어디서 개최될지 모르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715일 서울시청광장에서 퀴어문화축제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혐오의 편이 아니라

인권의 편에 서주길

 

시민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가 반복적으로 침해되고 유예되고 있다 보니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그 말. 모이고 말할 단 하루의 기회조차 뺏길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나온 그 말 다행스럽다상처투성이 이 말은 입 밖으로 내뱉을 때마다 쓰라리고 아프다. 이제는 다른 의미로 쓰여 졌으면 한다. “에이즈 혐오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어 다행이다”, “퀴어문화축제에서 예년보다 더 많은 성소수자 지지자를 만나서 다행이다”, “나중으로 유예된 성소수자 인권이 아니라 지금 당장 말하고 떠들 수 있어 다행이다라고.

 

이제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뜨거운 여름, 내 옆에 서 달라. HIV감염인의 손을 잡아 달라. 인권의 편이 되어 달라. 당신이 있어 다행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해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