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정의로운 돌봄 사회로의 전환을 위해
책 [돌봄과 인권] 을 읽고
정의로운 돌봄 사회로의 전환을 위해
책 [돌봄과 인권] 을 읽고
배여진(사단법인 천주교인권위원회 이사)
4년 전 즈음, 아빠가 심장 문제로 응급실로 실려간 일이 있었다. 이미 심근경색으로 타 병원에서 심장 스탠스 시술을 받은 아빠가 또 심장 문제로 응급실을 방문한 것이었다. 당시 처방된 약이 기존에 있던 부정맥을 더 심하게 하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었는데 상태는 금방 진정되었지만 80세가 넘은 노인이라 2~3일 더 입원하여 상태를 지켜보기로 하였다. 아빠의 심장도 문제였지만, 내게 당면한 문제는 ‘간병’이었다. 보통 다른 배우자가 간병인을 자처하지만 아빠의 경우 오래전 이혼 후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간병인은 병원에 상주해야 했고, 고로 아빠의 자식인 나와 내 동생은 생업과 육아 등의 이유로 간병이 힘든 상태였다. 결국 기댈 수 있는 곳은 돈을 주고 고용하는 ‘간병인’이었다. 간병인을 구하는 어플을 통해 당시 하루 약 10만원 정도의 일당으로 간병인을 구할 수 있었다. 아빠의 경우 겨우 2~3일 입원하는 상황이었으니 약 20~30만원으로 간병의 부담을 덜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한 달을 입원하는 상황이라면 어땠을까. 정말 눈앞이 캄캄해지는 상황이었을테고, 난 이날 이후로 간병의 국가 책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4년 뒤, 나와 내 동생은 또다른 간병 문제에 직면하게 됐다. 바로 폐섬유증을 앓고 있는 엄마의 문제이다. 폐섬유증과 폐암 치료의 후유증인지 몰라도 엄마가 어느 날부터인가 자그마한 턱만 있으면 넘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진단은 파킨슨병이었다. 파킨슨병의 진행이 생각보다 빠른지 이제 엄마는 혼자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힘들고, 차에 타고 내릴 때에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수이다. 누구보다도 빠른 걸음을 자랑하던 엄마는 이제 누구보다도 느리고 불안한 걸음으로 세상을 마주한다. 그리고 나와 내 동생은 간병이라는 또다른 세상을 마주한다. 과거 굉장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으며 엄마의 속을 뒤집던 남동생은 마치 그때의 빚을 갚기라도 하듯 엄마의 병원진료를 책임지고 모시고 다니며 뒤늦은 효도를 하고 있다. 생업과 아이 둘을 양육해야 하는 나와 달리 남동생은 미혼에 자영업을 하고 있으니 시간을 좀 더 자유롭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내 지갑에서 야금야금 용돈을 자발적으로 몰래 뽑아간 빚을 지금 갚는 것이라 생각하라는 우스갯 소리를 나누며 이 상황들을 함께 보내고 있다.
80세를 넘은 할아버지가 된 아빠와 계속 안 좋아질 일만 남은 폐섬유증과 파킨슨을 앓고 있는 엄마. 그리고 사춘기의 절정을 향해 달리고 있는 중학교 2학년 아들과 운동 뒷바라지가 필요한 아들 하나 더. 여기에 나의 일터는 어린이집이니 내 일상 그 어느 곳을 둘러봐도 모든 곳이 ‘돌봄 세상’이다. 이제 갓 걷기 시작한 어린이집의 영아들과 초등과 중등 학생인 나의 자녀들, 그리고 병들고 허약해지는 나의 부모님들. 인간의 한 생애가 각각 다른 형태로 나뉘어 나의 돌봄 노동을 필요로 한다.
4년 전, 아빠의 응급실 방문 이후 나는 진지하게 ‘간병의 국가 책임’이라는 것에 대해 고민을 했는데 사실 구체적으로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을 기회는 없었다. 김영옥과 류은숙이 함께 쓴 책 <돌봄과 인권>은 ‘돌봄’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확장과 제대로 된 정의, 그것이 ‘권리’로서 작용해야 하는 이유, 돌봄과 인권의 상관관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인간존엄성에 대한 진중한 고민들이 담겨있다.
이 책의 들어가는 말에서 저자들은 인간의 탄생과 죽음, 죽음 이후의 과정까지 관여하는 것이 돌봄이라고 한다. 이 중 그나마 국가의 책임이 ‘그나마’ 적극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시기가 영유아 시기라고 생각된다. 이건 최소한의 기준이지 충분하다는 것은 아니다. 저출생 문제가 큰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면서 영유아 돌봄에 대해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수라는 것을 사회적으로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노인과 환자 등에 대한 돌봄은 여태껏 부모 혹은 자녀 등 가족이 책임져야 하는 문제로 협소한 대응이 이어지다 이제야 국가의 책임에 대한 논의가 오고 가고 있는 것 같다. 내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간병의 문제 또한 결국은 기승전‘요양원’이라는 결말로 귀결되는 현실이니 말이다. 산후조리원의 고비용 문제로 공공산후조리원이 생긴 것처럼, 공공간병인제도나 공공 요양시설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치듯 들기도 했다.
엄마의 거동이 힘들어지면서 내가 제일 조심하는 부분이 있다. 엄마를 너무 ‘환자’ 대하듯 하지 않는 것이다. 최대한 엄마의 의사를 먼저 물어보고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다리고 내가 엄마를 돕는 행동을 엄마가 이해할 수 있도록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 책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엄마의 인간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해 우리는 부단히 노력한다. 마음 같아서는 간병인을 고용하고 싶지만 엄마는 ‘아직’이라고 말한다. 그런 엄마의 의견을 존중하여 나와 동생은 불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엄마의 느린 걸음을 지켜보며 엄마가 집안을 좀 더 수월하게 다닐 수 있도록 더욱 신경을 쓰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아마도 전문 간병인의 도움이 필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돈과 ‘좋은 간병인’이라는 걱정거리가 더 얹혀질 것이다. 곧 닥칠 미래라는 걸 알지만 나와 동생 모두 함구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 책 5장의 소제목을 보고 나는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 했다. “폐 좀 끼치면 어때”. 내가 바로 얼마 전에 엄마에게 했던 말이다. 엄마는 식당을 가거나 집앞에 외출을 할 때면 “남한테 폐를 끼치면 안 되는데” 하고 습관처럼 말을 한다. 그 말을 듣던 나는 “폐 좀 끼치면 어때. 다들 서로 돕고 도움받고 사는건데. 이 정도는 다들 이해하며 사는 세상이야.”라고 말이다. 엄마의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엄마가 당당하게 폐를 끼치면 좋겠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 나이가 들며 소멸해가는 과정을 거친다.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약해지며 세상에 ‘민폐’라는 이름으로 끼치게 되는 여러 불편함들은 어찌보면 사회가 그 개인에게 응당 제공해야 할 권리였을지도 모른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자연히 약해진다. 그러니 아픈 사람들의 목소리는 자꾸만 분산된다. 이제 이걸 모으고 모아 ‘돌봄국가’로서 돌봄을 제도화하라고 국가에 요구해야 한다.
책 <돌봄과 인권> 12장은 돌봄의 국가 책임이 복지의 확충과는 다르게 가야 한다고 얘기한다. ‘돌봄’이 사회복지의 영역에서만 논의가 됐을 때의 명확한 한계 등을 짚고 넘어가며, 현재의 돌봄과 관련된 서비스가 민간중심으로 구축되어 있는 점, 그리고 복지급부와 사회서비스는 개인의 기본권이라기보다 여전히 선별적인 구제에 가깝다고 비판한다. 실제로 엄마의 경우, 장기요양서비스를 받기 위한 심사에서 탈락했다. 엄마는 “죽기 직전에나 받을 수 있다더니 정말 그럴 모양이네” 하며 냉소를 지었다. 특히 민간중심으로 돌봄 서비스가 구축되어 있는 점은 돌봄의 책임을 온전히 한 가족 혹은 자녀들에게 전가하며 재정적인 부담까지도 지게 만들고 있다. 최근 청년 중심의 정책 관련 뉴스들에 달리는 댓글 중 “자녀의 양육에 부모 부양까지 책임지고 있는 40-50대의 노후는 보이지도 않는다. 버림 받은 것 같다.”는 식의 댓글이 괜히 달리는 게 아닌 것이다. 저자들은 사회 환경이 급변하면서 돌봄 관련 사회복지서비스의 탈가족화, 탈젠더화, 탈중앙화(지역 중심 통합 접근)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유로 단순히 ‘복지 확충’이 아니라 ‘돌봄 국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돌봄은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의존적 · 호혜적인 활동이며, 자율성을 가능케 하는 활동이다. 돌봄 국가에 대한 요구는 시혜적이고 잔여적인 복지 지원을 늘리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관계를 돌봄을 중심으로 급진적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돌봄 제도가 튼실하면 그것에 기대어 사람 사이 관계가 달라질 수 있다. 튼실한 돌봄 제도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믿고, 서로에게 기댈 수 있다.”(268쪽)
내가 둘째를 임신하고 둘째의 성별이 아들이라는 걸 알았을 때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딸이 있어야 늙어서 챙겨주는데.” 였다. ‘딸’은 늙은 부모의 돌봄 담당이라는 말이다. 여태껏 그렇게 늙은 부모들의 돌봄을 국가가 여러 딸들에게 전가해왔으니 아직도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늙은 부모가 됐을 때에는 여전히 이런 세상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들이고, 딸이고 그 누구도 늙은 부모들을 돌봐야 하는 무게를 지게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돌봄의 문제를 더 이상 한 가족, 자녀들에게 전가해서는 안 된다. 복지의 영역으로 축소 시켜서도 안 된다. ‘돌봄’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너무나 필요한 현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돌봄에 대한 국가 책임은 어떤 상태의 사람이든 그 사람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가치를 드러내고 강조하는 데서 출발한다.”(270쪽) 결국 출발은 인간의 존엄성이다. 돌봄을 상업화하지 않고, 국가의 책임하에, 누구나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약해지며 늙어갈 수 있도록 지금이라도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주길 바란다.
우리는 모두 비루하지 않고, 외롭지 않게 늙어갈 권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