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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고창표 조작간첩 사건, 재심 무죄 판결
icon 천주교인권위
icon 2012-05-10 15:46:45  |   icon 조회: 9136
[보도자료]
고창표 조작간첩 사건, 재심 무죄 판결
안기부 지하벙커 불법구금·고문…29년만에 벗은 간첩 누명


1.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2. 2012년 5월 4일 서울중앙지법 제24형사부(재판장 염기창)는 1983년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혐의로 안기부에 의해 강제 연행, 불법 구금된 채 고문을 받고 간첩으로 조작되어 10년 가까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던 고창표 씨 사건의 재심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별첨1 : 판결문)

3. 1979년 육군본부 인사장교(중령)로 예편한 고 씨는 1983년 12월 1일 자택에 갑자기 들이닥친 안기부 수사관들에 의해 강제 연행되어 영장 없이 안기부에 불법 감금되어 갖은 고문을 받았습니다. 고 씨는 재판 과정에서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법원은 고 씨가 사돈인 재일교포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 북한공작원에게 육군사관학교 졸업생의 수 등 기밀을 누설했다는 등 안기부가 고문으로 조작한 간첩 혐의를 그대로 인정해 유죄판결을 내렸습니다. 고 씨는 1985년 대법원의 상고기각 판결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의 형이 확정되었고 이후 1993년 5월 가석방되기까지 10년 가까이 복역해야 했습니다. (※별첨2 : 고창표 사건 경과)

4. 고 씨는 재심 공판에서 “매일 안기부 지하 조사실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안기부 조사관들은 내가 진술을 거부하거나 조사관들이 만들어 놓은 내용에 따라 작성하는 것을 거부하면 군에서 사용하는 야전침대봉으로 구타하거나 배를 찔렀고, 입은 옷을 모두 벗긴 채 여러 명이 무차별적으로 구타하거나 무릎을 꿇으라고 한 다음 그 사이에 각목을 집어놓고 허벅지를 밟았으며, 뒤에서 엉덩이를 발로 걷어차는 등 폭행 및 가혹행위를 하였다”고 증언했습니다. 또한 안기부 수사관들이 “이곳은 대통령님 외에 외부인 출입이 불가하다. 여기서는 뒈져도 아무도 모른다. 좋은 말할 때 들어라. 수틀리면 네 가족들도 가만 두지 않는다. 여편네, 새끼들 가서 당장 잡아올 수 있다. 새끼들 앞에서 조사받고 싶냐”고 협박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고 씨는 “검사 앞에서 범죄 사실을 부인하자 검사는 ‘안기부에 돌아가서 새로 조사를 받고 와야 정신을 차리겠냐’고 말했고, 검사 옆에 앉은 타자수는 안기부의 조서 내용을 그대로 옮겨 타자를 쳤고 검사는 날인과정에서 이미 다 시인한 것이니깐 날인하라면서 강압적으로 무인을 찍게 하였다”고 증언했습니다.

5.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고 씨의 연행은 “강제력 내지 심리적 압박이 개입된 것으로서 임의동행의 한계를 벗어나 강제연행에 해당”된다고 판단했습니다. 또한 재판부는 피고인이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자백을 강요받으면서 고문을 당한” 사실을 인정하며, 당시 작성된 피의자신문조서 등은 “안기부 조사 당시 장기간의 불법구금 또는 혹독한 고문으로 인하여 임의성 없는 진술을 하였다”고 판단했습니다. 또한 고 씨가 구금되어 있는 동안 가족이나 친지, 변호인을 만나지 못했음을 지적했습니다.

6. 2009년 10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는 진상규명 결정을 통해, 고 씨가 안기부가 작성한 인지동행보고 등 수사기록에 의하더라도 최소 16일간, 그의 기억에 따르면 56일간 영장 없이 불법구금 되었다고 확인했습니다. 당시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수사기관이 피의자를 계속 구속하기 위해서는 48시간~72시간 내 판사로부터 구속영장을 발부받아야 했습니다. 진실화해위는 이러한 안기부의 불법 수사행위가 형사소송법상 재심사유에 해당한다고 지적하면서 국가가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고 씨는 이를 근거로 2011년 3월 14일 재심을 청구했으며 2011년 6월 9일 재심개시결정이 나왔습니다. 서울중앙지법은 당시 재심개시 결정문을 통해 안기부 수사관들이 최소 16일간 고 씨를 구속영장 없이 구금한 사실이 인정된다면서 이는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행해진 것으로서 형법 제124조(불법체포, 불법감금)에 해당하는 범죄”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7. 이번 무죄 판결은 진실화해위와 재심개시 결정 당시 인정된 불법구금 사실을 재확인한 점과 함께, 진실화해위가 증거 부족으로 진실규명이 어렵다고 판단했던 고문을 사실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습니다. 우리 위원회는 과거 사법부의 부끄러운 판결을 바로잡은 이번 무죄판결을 환영합니다. 또한 무죄판결을 통해 간첩으로 몰려 오랜 세월 고초를 겪은 고 씨와 간첩의 가족으로 손가락질 당한 가족들의 한이 조금이라도 풀어지기를 기대합니다.

8. 이 사건은 유현석공익소송기금(이하 ‘기금’)의 지원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기금은 평생을 실천하는 신앙인으로서, 의로운 인권변호사로서, 약자들의 벗으로서의 한결같은 삶을 살다 2004년 선종하신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유족이 고인의 뜻을 기리고자 출연한 기부금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우리 위원회는 유족의 뜻을 받아 2009년 5월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5주기에 맞춰 기금을 출범시키고, 지금까지 20여 건의 사건을 공익소송사건으로 선정하여 소속 변호사들로 하여금 수행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별첨3 :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걸어오신 길)

9. 많은 관심과 보도 부탁드립니다. (끝)


※별첨2 : 고창표 사건 경과

■ 1979년 4월 30일 : 고창표 씨, 육군본부 인사장교로 예편(중령)
■ 1983년 12월 1일 : 고창표 씨, 안기부 직원 3명에 의해 자택에서 연행
이후 영장 없이 안기부 지하벙커에 불법 감금된 채 고문당함
■ 1984년 1월 25일 : 서울형사지방법원 구속영장 발부, 서울구치소에 인치
■ 1984년 1월 27일 : 안기부, 고창표 씨 사건을 서울지방검찰청에 송치
■ 1984년 2월 24일 : 서울지방검찰청(검사 최연희), 고창표 씨 기소(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 1984년 5월 15일 : 서울형사지방법원(재판장 서성, 판사 정재훈, 김상균),
유죄 선고(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
■ 1984년 9월 19일 : 서울고등법원(재판장 김성일, 판사 최동렬, 조용무),
항소 기각
■ 1985년 1월 22일 : 대법원(재판장 윤일영, 판사 강우영, 김덕주, 오성환),
상고 기각
■ 1993년 5월 27일 : 고창표 씨, 가석방
■ 1999년 2월 25일 : 고창표 씨, 사면복권
■ 1999년 12월 18일 : 고창표 씨, 보안관찰면제 처분
■ 2005년 12월 14일 : 고창표 씨, 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 신청
■ 2009년 10월 20일 : 진실화해위, 진실규명 결정
■ 2011년 3월 14일 : 고창표 씨, 재심청구
■ 2011년 6월 9일 :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4형사부(재판장 염기창), 재심개시결정
■ 2012년 5월 4일 :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4형사부(재판장 염기창), 무죄 선고


※별첨3 :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걸어오신 길

유현석 변호사님은 1927년 9월 19일 충남 서산군 운산면 거성리에서 출생하였다. 1945년 경성대학 문과을류(법학과)에 들어갔으나 1946년에 하향, 서산법원 서기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1952년에 제1회 판사 및 검사특별임용시험에 합격하였다.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시작해 법무장교, 육군고등군법회의 검찰관, 서울고등법원판사, 서울지방법원부장판사 등을 지낸 후 1966년에 한국최초의 로펌인 ‘제일합동법률사무소’를 열어 변호사의 길에 들어섰다. 70년대 남민전사건, 80년대 광주항쟁, 90년대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등 굵직굵직한 변론으로 인권옹호와 사회정의 실천에 분투하셨다.
1987년부터 1991년 2월까지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이사직을 역임했으며, 1991년 서울지방변호사회 법률실무연구회 운영위원장에 선임됐고, 1999년 대한변호사협회 총회의장으로 취임하였고,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원로회원으로, 언제나 든든한 배경이 되어 후배 변호사들에게 큰 힘을 실어주셨다.
1950년 서산성당에서 유봉운 신부님에게 세례(세례명 사도요한)를 받은 이후, 교회 안에서도 많은 일을 하셨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는 한국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회장, 1988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상임대표직을 맡아 활동하셨다. 그리고 천주교인권위원회를 창립해 후배를 키우신 선각자이자 1992년 이후에도 고문으로 재직하면서 늘 천주교인권위원회에 각별한 애정을 쏟으셨다.
또한, 1992년 한겨레신문 자문위원장을 비롯해, 1997년 경제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 1999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고문, 2002년 사단법인 언론인권센터 이사장 등 여러 사회단체의 좌장으로 신실한 신앙인이자 용기 있는 법조인으로, 지혜로운 예언자의 모습으로 한평생을 사셨다.
199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으며, 지난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사건의 대통령 대리인단 대표로 법정에 서신 것이 마지막 재판이 되었다.
유현석 변호사님은 2004년 5월 25일 선종하여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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