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 성명/논평
[보도자료] 서울고등법원, 군 사망사건 故박혜종 상병 국가유공자 인정 판결
icon 천주교인권위
icon 2012-09-03 15:14:17  |   icon 조회: 9136
[보도자료]

서울고등법원,
故박혜종 상병 사건 국가유공자비해당처분취소 판결

고인은 지휘관의 심한 가혹행위와 부당한 징계처벌,
부대의 총기와 탄약 관리의 소홀 등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망임을 자살에 이르게 한 것,
이는 교육훈련 또는 직무수행 중 사망한 것 봐야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고 박혜종 상병은 1996년 11월 해병대에 입대한 후, 복무 16개월 후인 1998년 3월 소속대 보급창고 앞에서 K2소총으로 자살로 사망하였습니다. 지난 2009년 7월 대통령소속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고인은 군복무 중 중대장에게 심한 가혹행위를 받아왔으면, 지휘관의 잘못된 지휘방식과 과중한 징계와 처벌, 관리감독의 소홀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조사결과를 발표하며 국방부장관에게 전공사상구분 재심의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고인의 유족들은 대통령소속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결정에 근거하여 국가보훈처 서울지방보훈청에 국가유공자유족등록을 신청하였으나 국가보훈처는 2010년 10월 고인의 사망이 개정이전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2011. 6. 30. 법률 제10471호로 개정되기 이전의 것, 이하 구 국가유공자법) 제4조 제6항 제4호(자해로 인한 사망의 경우)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다시 국가유공자유족요선비해당결정을 하였습니다.

고인의 유가족들은 천주교인권위원회에 진정을 통해 사건을 접수하였고 '천주교인권위원회 유현석공익소송기금'의 지원을 받아 2011년 7월 서울행정법원에 국가유공자비해당처분취소 행정소송(2011구단16028)을 제기하였으나 2011년 12월 패소하여 서울고등법원에 즉시 항소하였습니다.

지난 8월 31일(금) 서울고등법원 제10행정부(재판장 강민구)는 1심의 판결을 취소하고, 서울지방보훈청장이 2010년 결정한 국가유공자비해당처분 역시 취소하여 고인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서을고등법원은 구 국가유공자법이 국가를 위하여 희생하거나 공헌한 국가유공자와 그 유족들에게 합당한 예우를 다하고자 함을 입법목적으로 하고 있고, 국가유공자의 희생과 공헌의 정도에 상응하여 국가유공자와 그 유족의 영예로운 생활이 유지보장되도록 실질적인 보상을 하는 것을 예우의 기본이념으로 삼고 있음에 비추어 보면 ‘교육훈련 또는 직무수행 중 사망이’이라 함은 교육훈련 또는 직무수행과 그 사망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는 경우인데, 이는 자해로 인한 사망의 경우에도 마차가지라고 판시하였습니다.

서울고등법원은 고인의 사망이 교육훈련 또는 직무수행과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는지 여부를 면밀히 살핀 후, 고인은 지휘관의 심한 가혹행위와 부당한 징계처벌, 부대의 총기와 탄약관리의 소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고인의 자살로 인한 사망에 대한 직접적이고 중요한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판단하였고, 이는 교육훈련 또는 직무수행과 고인의 사망과 자살로 인한 사망 사이에는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으므로 고인이 교육훈련 또는 직무수행 중 사망한 것으로 봄이 상당하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서울고등법원의 이번 판결은 대통령소속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결과를 법원이 존중하여 판결하였다는 점, 1심 행정법원의 결정을 뒤집은 판결이라는 점, 국가유공자법이 자해로 인한 사망의 경우 국가유공자가 될 수 없다는 조항을 삭제하여 개정된 이후에 내려진 판결이라는 점, 자살로 인한 사망이라도 교육훈련 또는 직무수행과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판단되면 국가유공자로 인정해야한다는 것을 판결한 점 등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천주교인권위원회는 서울고등법원의 이번 판결이 반인권적인 군 복무 환경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린 사건들임에도 불구하고 자살로 인한 사망이라는 이유만으로 국가유공자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던 국방부의 잘못된 입장을 법원이 바로 잡았다는 점에서 법원의 판결을 환영합니다. 이번 판결이 오랜 시간 고인들의 명예 회복과 죽음의 진실을 위해 고통속에서 노력해 온 많은 군의문사 유가족들의 사건을 해결하는 시작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 소송은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천주교인권위원회 유현석공익소송기금’의 지원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 기금은 평생을 실천하는 신앙인으로서, 의로운 인권변호사로서, 약자들의 벗으로서의 한결같은 삶을 살다 2004년 선종하신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유족들이 고인의 뜻을 기리고자 출연한 기부금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천주교인권위원회는 고 유현석변호사님과 유족들의 뜻을 받아 2009년 5월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5주기에 맞춰 ‘천주교인권위원회 유현석공익소송기금’을 출범시키고 지금까지 조작간첩 재심사건, 군의문사 사건 등 20여 건의 사건을 공익소송사건으로 선정하여 천주교인권위원회 소속 변호사들로 하여금 수행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별첨: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걸어오신 길)

많은 관심과 보도 부탁드립니다.









2012년 9월 2일
사단법인 천주교인권위원회
※별첨: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걸어오신 길

유현석 변호사님은 1927년 9월 19일 충남 서산군 운산면 거성리에서 출생하였다. 1945년 경성대학 문과을류(법학과)에 들어갔으나 1946년에 하향, 서산법원 서기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1952년에 제1회 판사 및 검사특별임용시험에 합격하였다.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시작해 법무장교, 육군고등군법회의 검찰관, 서울고등법원판사, 서울지방법원부장판사 등을 지낸 후 1966년에 한국최초의 로펌인 ‘제일합동법률사무소’를 열어 변호사의 길에 들어섰다. 70년대 남민전사건, 80년대 광주항쟁, 90년대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등 굵직굵직한 변론으로 인권옹호와 사회정의 실천에 분투하셨다.
1987년부터 1991년 2월까지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이사직을 역임했으며, 1991년 서울지방변호사회 법률실무연구회 운영위원장에 선임됐고, 1999년 대한변호사협회 총회의장으로 취임하였고,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원로회원으로, 언제나 든든한 배경이 되어 후배 변호사들에게 큰 힘을 실어주셨다.
1950년 서산성당에서 유봉운 신부님에게 세례(세례명 사도요한)를 받은 이후, 교회 안에서도 많은 일을 하셨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는 한국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회장, 1988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상임대표직을 맡아 활동하셨다. 그리고 천주교인권위원회를 창립해 후배를 키우신 선각자이자 1992년 이후에도 고문으로 재직하면서 늘 천주교인권위원회에 각별한 애정을 쏟으셨다.
또한, 1992년 한겨레신문 자문위원장을 비롯해, 1997년 경제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 1999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고문, 2002년 사단법인 언론인권센터 이사장 등 여러 사회단체의 좌장으로 신실한 신앙인이자 용기 있는 법조인으로, 지혜로운 예언자의 모습으로 한평생을 사셨다.
199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으며, 지난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사건의 대통령 대리인단 대표로 법정에 서신 것이 마지막 재판이 되었다.
유현석 변호사님은 2004년 5월 25일 선종하여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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